이사를 할 때마다 가장 골치아픈 건 책장 가득 꽂히고도 자리가 부족해 방안 여기저기 층층이 쌓여있는 책무더기들이다. 버릴 수도 없고 이고 지고 가자니 너무 버거운 그 책들. 하지만 그냥 부담스러운 짐이라기엔 책들의 의미가 남다르다. 따로 일기를 쓰지 않는 내게 그 책들은 나만의 방대한 일기이자 나의 성장기를 함께 했던 친구이자 스승이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번쯤 큰 맘 먹고 책장을 정리할 때면 각각의 책들마다 얽힌 기억들이 드문드문 솟아오른다. 지금은 인연이 끊긴 고등학교 단짝 친구의 예쁘장한 생일축하 인사말이 앞장에 가지런히 적힌 소설책, 나를 ‘불온한 고슴도치’라고 불렀던 한 시인지망생 선배가 선물한 시집, 어설픈 솜씨를 발휘하여 내가 직접 만든 지우개 책도장을 여기저기 펑펑 찍어둔 낡은 책들, 신촌의 오래된 헌책방에서 운좋게 발견한 모 문학계간지 1호, 여기저기 펜으로 죽죽 밑줄을 그어둔 프랑스 문인의 에세이집, 저자의 독단성만을 한껏 보여주는 권위적인 문체로 온통 모호한 얘기들만 늘어놓아 하품나게 만들었던 번역 철학서들… 네 개의 책장을 가득 메우고도 넘치는 그 책들과 과연 언제 대면을 했었던가 아득하다.
가끔은 뽀얗게 먼지내린 책들의 갈피에서 빳빳한 지폐가 나와 횡재한 기분도 맛보고, 언제 써붙였는지 알 수 없는 노란 포스트잍 메모나 네잎 클로버가 불쑥 고개를 내밀어 한참 옛기억을 더듬으며 그 당시의 정경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제는 누렇게 탈색하여 오래된 종이냄새를 풍기는 책들이 내 책장속에서 묵은 시간만큼 오래된 추억의 토막들. 내 기억의 저장고에서 길어올린 그 토막들에는 한때 정신없이 활자 사이를 달리며 감동하며 울고 웃었던 청춘의 흔적이 남아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전통적인 서적의 자리를 전자책이 넘보기 시작했다. 나같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사이의 낀세대들은 디지털의 편리함을 인정하되 아날로그의 낭만을 간직하고 싶어하지만(적어도 나는 그렇다) 완전한(?) 디지털 세대로 태어난 어린 친구들은 e-book의 효용성을 100% 만끽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세월에 따라 퇴색하는 종이책일지라도 종이책에 내재하는 가치는 퇴색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한번씩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되새겨지는 정겨운 기억의 토막들을 전자책의 0과 1 데이터 사이에 어떻게 묻어둔단 말인가.
누런 종잇장의 까슬한 감촉과 팍팍한 내음을 맡으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술처럼 튀어나오는 나의 지난 나날들. 버겁다 귀찮다 투덜대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무거운 책무더기들을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나보다.
사실 그중의 어떤 책들은 여러번 읽어 테두리에 까맣게 손때가 탔지만 간혹 언제 샀는지도 모를뿐더러 단 한번도 책장을 넘겨보지 않은 새책들도 버젓이 책장 사이에서 눈에 띄곤 한다. 주체할 수 없는 ‘책탐’으로 일단 사서 모았지만 운 나쁘게도 몇 년 동안이나 간택되지 못하고 버려져 있던 책들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 책들의 표지도 펼쳐질 날이 있을 것이다. 친구란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이라고 했던가. 책친구만큼 좋은 친구도 별로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