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어느 시인은 외로움을 삶의 숙명인 양 노래했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열망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싶어요. 외로움이 숙명이고 당연한 것이라면 굳이 그것을 노래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람은 역시 사람과 어울려 지낼 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존재이지 않나 싶어요.

 

당나라 천보(天寶, 현종) 연간에 변방 - 주로 서역 - 의 풍경과 생활 그리고 그곳에서 머무는 군인들의 애환을 주요 시제로 삼는 일군의 시인들이 나타나요. 이른바 변새시파(邊塞詩派)로 불리는 시인들이죠. 고적, 잠삼, 왕지환, 왕한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은 실제 변방에서 근무했던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변방의 풍물과 인정을 핍진하게 그렸어요. 특기할만 한 것은 변방의 풍물과 인정을 그렸지만 시의 정서가 살풍경하지 않고 낭만적 정서가 배어 있다는 점이에요. 천보 연간 이후로 당나라의 국세가 많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이들 시인이 활약하던 시기는 아직 성세에 있었기에 그런 정서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폐색의 시기였다면 그런 정서는 불가능했겠지요.

 

사진의 시는 변새시파의 일원인 잠삼(岑參,715-770)의 '양주사(諒州詞)'란 시예요. 변방 지역의 고적한 분위기를 그린 시로, 앞서 말한 것처럼, 변새시임에도 불구하고 살풍경하지 않고 낭만적인 정서가 배어 있어요.

 

邊城暮雨鴈飛低   변성모우안비저   변성 저물 녘 비내리는데 기러기 낮게 날고

蘆笋初生漸欲齊   노순초생점욕제   갈대 싹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웃자라 버렸네.

無數鈴聲遙過磧   무수영성요과적   방울 소리 울리며 사막 지난 비단 상인들

應駄白練到安西   응태백련도안서   지금 쯤은 안서에 도착했을 듯.

 

시의 화자는 병사인 듯 싶어요. 저녁 불침번 차례가 되어 창을 들고 성 위에 섰어요. 병사를 둘러싼 풍경엔 사람의 인기척이 하나도 없어요. 하늘엔 잿빛 물감만 가득하고 땅엔 웃자란 갈대 밖에 없어요. 움직이는 물체라곤 기러기 뿐인데 이마저도 날개를 늘어 뜨린 채 힘없이 낮게 날고 있어요. 고적한 심사를 달랠 길 없는데 무심한 하늘에선 어느새 추척추적 비가 내리고 있어요. 더없이 인정이 그리운 병사는 문득 성의 관문을 통과해 사막 길을 지나갔던 비단 상(商)들을 생각해요. 통과시 그들과 있었던 인정의 교류를 떠올리며 고적한 심사를 달래는 것이지요. 아무런 친분도 없지만 문득 그들의 안부가 궁금한 건 그들이 자신과 감정이 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병사는 허공을 향해 그리움의 소리를 질렀을 것만 같아요. 어어이~

 

낯선 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은 辶(걸을 착)과 自(부터 자)와 方(旁의 약자, 곁 방)의 합자예요. 자기가 있는 곳에서[自] 걸어서 갈 수 있는[辶] 근방[方]이란 뜻이에요. 의미를 확장하여 국경 지대란 의미로도 사용하죠. 가 변. 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周邊(주변), 邊境(변경)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人(사람 인)과 氐(근본 저)의 합자예요. 氐는 본래 나무 뿌리가 땅[一]으로 곧게 내려갔다란 뜻이에요. 그렇듯 사람이 몸을 아래로 구부려 낮추었다란 뜻이에요. 낮출(을) 저. 低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低價(저가), 低空(저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艹(풀 초)와 盧(밥그릇 로)의 합자예요. 갈대란 뜻이에요. 艹로 뜻을 표현했어요. 盧는 음을 담당해요. 갈대 로. 蘆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蘆岸(노안, 갈대가 우거진 물가의 언덕), 蘆花(노화, 갈꽃)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竹(대 죽)과 尹(맏 윤)의 합자예요. 대나무 순이란 뜻이에요. 竹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尹은 음을 담당해요(윤→순). 대순 순. 笋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竹笋(죽순), 笋籜(순탁, 죽순 껍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위 시에서는 대순의 의미가 아니라 갈대순의 의미로 사용됐어요.

 

은 본래 물이름이에요. 안휘성 이현에서 발원하여 남만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 물이에요. 물이름 점. 후에 '차차'란 의미로 주로 사용하게 됐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점수(漸水)가 서서히 흐른다는 의미로요. 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漸進(점진), 漸層(점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밭 두둑 위에 보리 이삭이 가지런히 핀 모양을 그린 거예요. 가지런할 제. 齊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齊家(제가), 齊整(제정, 정돈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金(쇠 금)과 令(아름다울 령)의 합자예요. 방울이란 뜻이에요. 金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令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방울소리는 듣기 좋다는 의미로요. 방울 령. 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鈴語(영어, 방울 소리), 鈴閤(영합, 장수가 있는 곳)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馬(말 마)와 太(클 태)의 합자예요. 짐을 싣는다는 뜻이에요. 馬로 뜻을 표현했어요. 太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짐을 싣는 짐승은 대개 덩치가 크다는 의미로요. 실을 태. 駄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駄背(태배, 등에 짐), 駄價(태가, 짐을 실어다 준 삯)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糸(실 사)와 柬(가릴 간)의 합자예요. 무명 모시 따위를 잿물에 삶아 물에 빨아 말린다는 의미예요. 糸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柬은 음을 담당하면서(간→련)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삶을 적에 제대로 삶아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로요. 누일 련. 위 시에서는 누인 비단이란 의미로 사용됐어요. 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練囊(연낭, 누인 명주로 만든 주머니), 練帛(연백, 누인 비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멀어서 다니기 쉽지 않다는 뜻이에요. 辶(걸을 착)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멀 요. 遙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遙遠(요원), 遙望(요망, 멀리서 바라 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石(돌 석)과 責(積의 약자, 쌓을 적)의 합자예요. 돌이 쌓여있는 곳, 즉 자갈밭이란 뜻이에요. 자갈밭 적. '모래 벌판'이란 뜻으로도 사용해요. 이 경우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지요. 모래벌판 적. 磧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沙磧(사적, 사막), 石磧(석적, 자갈밭)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사진은 촛불 집회 1주년 기념차 서울에 갔다가 안국역에서 찍었어요. 역사 내 벽에 행인들을 위해 그림들이 전시돼 있더군요. (작가 분들껜 죄송하지만) 전시된 기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그림들이 추레해 보였어요. 그래서 그럴까요? 지나가는 대부분의 행인들이 거의 눈길을 주지 않더군요. 해당 기관에서 다시 한 번 관심있게 살펴보고 정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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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2017-11-09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늦가을에, 작품도 좋고 풀이도 좋습니다.

찔레꽃 2017-11-09 16:04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은근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셨네요. 역시 고수이십니다.
 

                                                           

 <사진 출처: <시사IN> 창간 10주년 기념 특별호(527). 부분 발췌>

 

 

이명박 정부하 국정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취소 청원을 기획했었다죠? 축하하고 또 축하해도 모자랄 경사를 두고 어찌 그런 일을 꾸몄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도 소련 정부하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을 저지당한 일이 있죠. 하지만 수상(솔제니친) 이후 소련 정부가 수상 취소 청원을 기도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노벨상 수상 취소 청원 기도는 아마 노벨상과 관련한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어요.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에요.

 

자랑스러워해야 할 인물이 폄훼된 사례중에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선생이 있죠. 해외에서 20세기 5대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만큼 훌륭한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상찬은 커녕 오랫동안 불온인사로 취급당했죠. 친북 성향을 띈 해외 반체제 인사라는 게 그 죄명(?)이었죠. 동백림 사건으로 무고한 시달림을 받았던 그였기에 반공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남한 정부를 비판한 것은 어찌보면 그로선 당연한 행위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친북 성향도 이런 연장선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남한 정부와 달리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고 포용하려 했던 북한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아니 가질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선생이 친북적인 경향을 띄었다곤 하지만 그가 결코 북한을 추종했던 것은 아니라고 보여요. 해외 범민련 의장직을 사퇴한 것이 그 한 증거이죠. 북한이 범민련을 이용한다라는 게 그의 사퇴 명분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선생은 남 ·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양 체제가 아직도 대립하고 있는 한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내려지기 어려울 듯 싶어요. 통일이 된 이후에나 그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은 이 불행한 예술가의 묘비명이에요. 그의 이름과 함께 그가 생전에 사랑했음직한 말이 함께 새겨져 있어요. 처염상정(處染常淨). 오염된 곳에 처해도 항상 맑다. 연꽃을 말할 때 사용하는 말이죠. 연꽃은, 주지하는 것처럼, 불가에서 초월, 청정등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하는 꽃이죠. 묘비명은 그 사람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 묘비명은 한 불행했던 예술가의 묘비명이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돼요.

 

홍은미씨는 윤이상 선생의 음악 세계를 융합과 조화로 보면서 이런 말을 해요: "120곡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전부 서양의 현대음악 어법으로 씌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나고 자라면서 체험한 한국의 소리가 거의 대부분 작품에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미학적 사상성에 있어서도 동아시아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면서 일례로 윤이상의 출세작 중의 하나인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에 대해 당대 음악인들의 감탄을 두 가지로 설명해요: "하나는 철저히 12음 기법으로 씌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12음 기법을 쓰는 작곡가들의 작품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악보에 난무하는 수많은 음표들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단아함, 즉 정중동의 신비감이다." (인용 출처:http://www.yunfoundation.org/. 일부 내용 요약 인용)

 

요컨대 그의 음악은 이질적인 것의 화해(和諧)가 핵심이라는 것 같아요. 이런 각도에서 그의 묘비명 '처염상청'은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꽃이 아름다운 것은 진흙과 같은 더러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진흙과 같은 더러운 것이 대비되지 않는다면 연꽃의 아름다움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연꽃과 진흙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대비적 관계라기보다는 상보적 관계로 볼 수 있다. 진흙이 상대적으로 연꽃보다 하위에 놓인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연꽃에 비해 드러나보이지 않을 뿐이다. 진흙이라는 영양분이 없으면 연꽃도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진흙의 가치는 결코 연꽃에 비해 뒤지는 것이 아니다. 동양 음악은 서양 음악과 대비될 때 그 특성이 드러나며, 서양 음악 또한 동양 음악과 대비될 때 그 특성이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동양 음악과 서양 음악은 서로 대척점에 놓인 것이 아니라 서로 도와주는 관계에 놓인다고 볼 수 있고, 양자의 화해는 궁극적으로 '음악'이라는 예술을 한층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준다. 바로 이런 음악을 추구한 것이 나(윤이상)의 음악이다."

 

그러나 처염상정을, 일반적 의미(초월, 청정)로 해석하여, 그의 생을 대변하는 말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세상 그 어떤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인생이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실제 그에게는 그런 면모가 있어요. 남북한의 상이한 이데올로기[세속]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과 통일[이상]을 우선시했던 것이 그렇지요. 어떻게 보든 처염상정은 그에게 잘 어울리는 묘비명이란 생각이 들어요.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는 虍(범 호)와 夂(뒤져올 치)와 几(의자 궤)의 합자예요. 뒤에서 힘겹게 좇아와 앞 사람에게 미치듯이 의자에 양 관절이 도달해(?) 머무른다란 의미예요. 머무를 처. 虍는 음을 담당해요(). ‘이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머무르는 곳'이란 의미로요곳 처. 處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處地(처지), 何處(하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木(나무 목)과 氵(물 수)와 九(아홉 구)의 합자예요. 염색 원료[]의 액체[ 氵]를 가지고 여러 번[] 물들인다는 뜻이에요. 물들일 염. 染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染色(염색), 傳染(전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巾(수건 건)과 尙(숭상할 상)의 합자예요. 깃발이란 의미예요. 깃발의 형태가 수건과 흡사하여 巾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尙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常은 천자와 제후들이 사용하던 깃발로 존귀하게 취급되던 깃발이란 의미로요. 깃발 상. '항상'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常은 항상 존귀하게 취급된다는 의미로요. 항상 상. 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恒常(항상), 常備(상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氵 (물 수)와 爭(다툴 쟁)의 합자예요.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에요. 氵로 뜻을 나타냈어요. 爭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깨끗하게 하려면 더러운 것과 다투게 된다란 의미로요. 깨끗할 정. 淨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淨化(정화), 淸淨(청정)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상담 프로그램에서 삶에 대한 각성을 이끌기 위해 미리 쓰는 유서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죠. 옛 분들도 그런 전통이 있었던 듯 해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그것이죠. 생전에 자신의 묘지명을 미리 쓰는 것이죠. 자신의 삶이 후세에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각성을 다짐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죠. 다산 선생도 이런 묘비명을 썼고 퇴계 선생도 이런 묘비명을 썼다고 해요. 죽음은 삶의 이면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미리 쓰는 유서나 자찬묘비명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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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따금 패악한 사람에게 쏟아내는 질타예요. 여기 하늘은 초월적 심판자, 즉 신을 가리키죠. 신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이 질타가 얼마나 의미있을지는 미지수예요. 하지만 이 말이 전혀 황당하게만 들리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에요. 왜 그럴까요? 그건 아마도 우리 내면에 깃든 신의 그림자를 자극하는 말이라서 그러지 않은가 싶어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지만 아직 그 신의 그림자가 우리 내면에 깃들어 있기에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말을 들으면 공명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싶은 거죠.

 

 하늘[신]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자리 잡은 것은 언제부터 일까요? 중국 고대 은나라 때는 하늘에 해당하는 존재가 상제(上帝)였어요. 이 상제는 인간계의 모든 현상을 주재하는 존재였어요. 사람들은 이 존재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점을 쳤죠. 은나라의 유적지에서 나온 갑골문은 이 점사를 기록한 글씨이죠. 은 · 주 교체기에 상제는 '하늘[天]이란 존재로 바뀌어요. 아울러 인간계의 모든 현상을 주재하는 존재에서 유덕한 자에게는 행운을, 부덕한 자에게는 재앙을 내리는 선한 의지를 가진 인격신으로 이해되죠.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선 이런 경향이 강화됨과 동시에 정반대의 경향도 나타나요. 인격적 하늘을 배제한 자연의 이법으로 하늘을 보려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죠. 한대에도 이런 두 경향이 이어지고,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후자의 경향 - 하늘을 자연의 이법으로 보는 - 이 강해지죠.

 

수 · 당대에 이르면 하늘과 인간을 관통하는 이치에 관심을 두게 되고, 이는 송대로 이어져 천리(天理) 개념이 형성돼요. 송대 성리학의 종지가 '성즉리(性卽理)'인데 여기 성은 곧 하늘이에요. 따라서 성리학은 천리를 파악하고 거기에 따를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죠. 명대에 들어와선 순연한 이치라는 천리에 인간의 욕망이 더해져요. '천리인정(天理人情)'이 그것이죠. 생존욕을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긍정하는 사고는 청대에도 계승돼요. 근대에 들어와 하늘은 더이상 인간적 가치와 관계를 맺지 않는 단순히 적자생존 혹은 우승열패라는 무정(無情)한 이치로 받아들여져요. 천연(天演)이 그것이죠.

 

하늘은 자신이 주재자일 때도 선한 의지를 지닌 인격신일 때도 자연의 이법일 때도 순연한 이치일 때도 욕망을 긍정하는 이치일 때도 무정한 이치일 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어요. 하늘이 어떻다고 찧고 까불은 것은 사람들이죠. 그저 자신의 내면에 깃든 신의 그림자를 시대에 따라 달리 보고 달리 표현한 것 뿐이죠.

 

사진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한문으로 쓴 거예요. '개상제애세지 이독생자사지 사범신지자 면침륜이득영생 왈당신주야소기독 즉이여이가필득구의(蓋上帝愛世至 以獨生子賜之 使凡信之者 免沈淪而得永生 曰當信主耶蘇基督 則爾與爾家必得救矣)'라고 읽어요. "상제[하나님]가 세상을 사랑함이 지극하여 독생자(獨生子, 유일하게 낳은 자식)를 내려 그를 믿는 자로 하여금 고통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길이 행복한 생을 얻도록 하였다. 말하노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너와 네 집이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풀이해요.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죠.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이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라고 되어 있어요. 영어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한글 번역이 원문에 가깝게 번역됐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한문 번역이든 한글 번역이든 영어 성경이든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은 다 이상해요.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은 예수가 니고데모라는 이에게 한 말로 돼있는데 세 기술 모두 그 말의 주체가 예수라기 보다는 기자(記者)인 것처럼 돼있거든요. 모호하게 표현된 것이죠. 경전(經典)의 기술(記述)치고는 수준이 높지 않은 기술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경의 한문 번역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상제'예요. 하나님[God]을 번역한 말인데, 은나라 때의 하늘 개념을 가져와 번역한 것이 특이하죠. 일종의 격의(格義) 번역이라고 할 거예요. 격의는 외래 개념을 외래 개념 자체로 인식하기 전 기존의 전통 개념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불교 유입 초기 중국에서 '공(空)'을 도가의 '무(無)'로 이해한 것이 그 한 예이죠. 이런 격의 이해는 타 문화의 유입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죠.

 

그런데 재미난 것은 하나님[God]을 상제로 이해하여 번역한 것이 중국인에 의해 이뤄진게 아니라 서구인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이에요. 성경의 한문 번역은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졌거든요. 이렇게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기죠: "선교사들은 과연 상제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그리고 또 한가지 의문이 생기죠: "하나님을 상제로 번역한 성경을 대하며 당시 지식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선교사들이 상제의 의미를 중국인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거예요. 다만 주재자라는 점에서 일치점을 보이니 차용한 것 뿐이겠죠. 당시 지식인들은 성경을 그다지 높게 취급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성경이 번역될 당시 - 원대 이후 - 중국에서 상제는 이미 시효 지난 존재였기 때문이죠. 시효 지난 존재를 다룬 경전이 높게 취급되긴 어려웠을 거라고 보는 거죠(이상은 저의 억측이에요. 특히 후자. 자료를 찾아본 바 없거든요).

 

중국의 하늘 개념 변천사로 봤을 때 성경의 하늘[하나님]은 그리 진화하지 못한 하늘이에요. 그러나 진화하지 못한 하늘이라 하여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이들이 성경의 하늘을 믿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이들을 과연 우매하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효의 가치가 중시되지 않는 시대라고 하여 효를 행하는 이를 우습게 여길수 없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진화하지 못한 하늘이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하늘이 무섭지 않는냐!"는 말이 공명을 일으키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여전히 하늘[신]의 그림자가 드러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렇지 않고는 이 문화지체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사진의 낯선 한자를 몇 자 알아 볼까요?

 

는 艹(풀 초)와 盍(덮을 합)의 합자예요. 풀을 엮어 덮는다는 의미예요. 덮을 개. '대개'라는 발어사(發語詞)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동음을 빌미로 차용된 거예요. 대개 개. 위 사진의 내용에서는 발어사의 의미로 사용됐죠. 蓋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覆蓋(복개), 蓋草(개초, 이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는 貝(조개 패)와 易(바꿀 역)의 합자예요. 재화를 타인에게 준다는 의미예요. 貝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易은 음을 담당하면서(역→사)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재화를 타인에게 주면 그 재화의 소유 관계가 바뀌게 된다는 의미로요. 줄 사. 賜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下賜(하사), 厚賜(후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물에 잠겼다는 의미예요.  氵(물 수)로 의미를 표현했고 冘로 음을 나타냈어요. 잠길 침. 沈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浮沈 (부침), 擊沈(격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잔잔한 물결이란 의미예요.  氵(물 수)로 의미를 표현했고 侖으로 음을 나타냈어요. 잔물결 륜. '빠지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빠질 륜. 淪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淪缺(윤결, 쇠하여 없어짐), 淪埋(윤매, 파묻혀 없어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고을 이름이에요. 阝(邑의 변형, 고을 읍)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耳는 음을 담당해요(이→야). 고을이름 야. 어조사의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동음을 빌미로 차용된 거예요. 어조사 야. 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琅耶(낭야, 지역 이름. 琅邪로도 표기), 是耶非耶(시야비야, 옳을 가 그른 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차조기(꿀풀과의 일년생 재배초)란 뜻이에요.  艹(풀 초)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차조기 소. '깨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동음을 빌비로 차용된 거예요. 깰 소. 蘇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紫蘇(자소, 차조기), 蘇生(소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금지시키다란 의미예요. 攵(칠 복)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강제 수단을 사용하여 못하게 한다는 의미지요. 求(裘의 약자, 갖옷 구)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갖옷이 몸을 보호하듯이 상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못하게 하는 것이란 의미로요. 금할 구. '구원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구원할 구. 救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救援(구원), 救出(구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사진은 예산에 있는 한국서예비림박물관에서 찍었어요. 야외에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글씨들이 세워져 있더군요. 중국의 비림(碑林)을 모방해 조성했다는데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 그런지 성근 티가 역력했어요. 귀부인의 화장을 흉내 낸 촌 아낙네의 어설픈 화장 같다고나 할까요? 세월이 지나면 점점 더 나아지겠죠?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우리만의 개성있는 비림을 조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여담 둘.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이 글을 읽으면 좀 언짢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성경 구절에 대한 의문, 성경과 기독 신앙에 대한 저의 평가(?)는 글의 흐름상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뿐 이에요. 어떤 의도를 갖고 내린 평가가 아니란 점을 널리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울러 '하늘[신]'에 대한 이해 내용도 저의 사견이 아니라 중국 철학사에서 보편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임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요컨대, 이 글을 가지고 저에게 옳고 그름[是非]을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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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潭.

 

 주변의 - 제가 사는 지역의 - 사찰이나 음식점에서 심심찮게 보는 낙관이에요. 담(潭)은 읽을 수 있겠는데, ○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하더군요. '원'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긴 한데 확신할 수가 없더군요. 아이들이라면 장난삼아 '원(圓, 둥글 원)'자를 동그라미로  표기할 수도 있겠지만 성인 서예가라면 이렇게 할리 만무하니 필시 다른 의미를 동그라미로 표기했을 걸로 생각들어 선뜻 '원'으로 읽을 수 없었던 거예요. "에이, 고약한 서예가네. 왜 이렇게 읽기 불편하게 표기한거야. 글씨는 왜 또 이렇게 많이 까발리고." 욕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글씨는 의외로 맑고 군더더기가 없는 거예요. 생동감도 느껴지구요. "짜식, 글씨는 좀 쓰는 것 같네." 아니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지난 주말 지인과 예산에 있는 수덕사에 갔다가 '선(禪) 박물관'에 들렸어요. 그런데 이게 웬 일, 박물관 안에 이 아니꼬운 자의 글씨가 가득한 거예요. 이 아니꼬운 자는 수덕사 3대 방장을 지낸 원담(圓潭, 1926-2008) 스님이더군요. 예의 맑고 군더더기 없으며 기운 생동하는 글씨를 대하니 덩달아 마음도 정화되며 기운을 얻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은 '원'으로 읽는게 맞는 거였어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되는데 불필요한 생각을 일으켜 의심을 했던 셈이에요. '원(圓)'을 '○'으로 표기한 것은 선승다운 해학적 표기이자 저같이 의심많은 중생들에게 꺠우침을 주는 법문같은 표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님, 고맙습니다."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스님의 글씨가 주변에 흔한 것은 제가 사는 지역이 예산에 가까운 탓도 있고, 글씨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별 망설임없이 써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더군요. 일종의 자비와 포교 수단으로요. 많이 까발린게 아니고 널리 베풀었던 셈이에요. "스님, 훌륭하십니다." 상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사진은 원담 스님의 글씨예요(인용 출처: http://www.ggbn.co.kr/news/articlePrint.html?idxno=9241). 2005년 하안거 해제법어라는 군요. 앞서 말한대로 군더더기가 없고 맑으며 기운이 생동하는 느낌이 들어요. '대지산하시아가 갱어하처멱향토(大地山河是我家 更於何處覓鄕土)'라고 읽어요. "온 대지와 산하가 내 집인데 달리 어디서 고향을 찾는가!"라는 뜻이에요. 자타불이이(自他不二) ·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표현한 말인 듯 싶어요. 이 경지는 곧 깨달음의 경지겠지요. 진보와 보수, 남과 북, 부자와 빈자, 영남과 호남, 기성 세대와 신 세대 등 온갖 갈등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가르침으로도 손색이 없을 듯 싶어요.

 

낯선 두어 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은 攴(칠 복)과 丙(밝을 병)의 합자예요. 고치다란 의미예요. 고칠 적에는 강한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攴으로 의미를 삼았어요. 丙은 음을 담당하면서(병→경)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고치는 것은 밝고 좋은 결과를 지향한다는 의미로요. 고칠 경. '다시'라는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고치는 것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란 의미로요. 다시 갱. 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甲午更張(갑오경장), 更新(갱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爪(손톱 조)와 見(볼 견)의 합자예요. 정체를 드러내기[見] 위해 파본다[爪]란 의미예요. 의미를 정리하여 '구하다'로 사용해요. 구할 멱. 覓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覓索(멱색, 찾음), 覓得(멱득, 구해 얻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나라 안의 특정 구역이란 의미예요. 고을의 의미를 갖는 좌 우의 글자가 뜻을 담당하고(幺와 阝는 모두 邑(고을 읍)의 변형이에요), 가운데 글자는 음을 담당해요. 고향이란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고향 향. 鄕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歸鄕(귀향), 故鄕(고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이란 말이 있죠. 요즘은 대부분의 문서가 워드로 작성되기에 손글씨 보기가 쉽지 않죠. 이제는 서여기인이란 말은 시효가 다한 말이 아닌가 싶어요. 신어서판(身言書判)이란 말도 그렇구요. 그런데 역으로 시효가 다했기에 손글씨는 더 값어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마치 시효 지난 도자기가 값나가는 골동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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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이병욱 2017-10-18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득도한 스님 말씀, 좋았습니다.
 

 

 

"나무는 사람과 같아요."

 

팔레스타인에 사는 살마는 레몬 농장을 운영하는 과부예요.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레몬 농장은 살마의 삶 그 자체예요. 생계 유지는 물론, 홀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레몬 나무는 부모이자 남편이고 자식이며 벗이기 때문이죠. 이런 살마의 레몬 농장에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이웃으로 오면서 문제가 발생해요. 살마의 레몬 농장이 국방장관 집과 경계 지점에 있기 때문에, 보안상의 이유로, 이스라엘 정보부에서 농장의 나무를 베어버리려 했기 때문이죠. 보상금을 준다고는 하지만 살마에게 레몬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어요. 살마는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변호사를 찾아 레몬 나무를 지키기 위해 법정 투쟁을 시작해요.

 

'레몬 트리'란 영화 내용 일부예요. 사진의 한자를 보노라니 문득 이 영화가 생각나더군요. 위 한자는 해(海)라고 읽고(다 아시죠? ^ ^), 아래 한자는 영(柠)이라고 읽어요. 해는 바다란 뜻이고, 영은 레몬이란 뜻이에요. 레몬을 한자어로 '영몽(檸檬)'이라고 쓰는데 '영'하나로 사용하기도 해요. 檸(영)은 번체자이고, 柠(영)운 간체자예요. 두 한자를 접하니 사해(死海)와 레몬이 생각나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그린 '레몬 트리'란 영화로 확장되더군요. 레몬 트리는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영화인데, 저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레몬 나무 소송으로 빗대어 그린 영화로 봤어요.

 

1948년 뜬금없이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팔레스타인에 세워지면서 중동의 갈등은 시작됐죠. 물론 여기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탈취했던 영국의 지지와 유태인들의 시온주의 그리고 1940년 대 초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대량 이주한 유태인들의 정착이 큰 배경으로 작용했죠. 결정적인 것은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분리 결정이었고, 여기에는 미국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했죠. 영국이나 미국이 이스라엘 건국의 후견인 노릇을 한 것은 이들 나라가 2차 대전시 유태인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죠.

 

오랜 세월 살아온 자신의 터전을 졸지에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죠. 그러나 이스라엘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중동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은 패전했고, 이스라엘은 외려 영토를 더 확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죠. 이제 아랍인 특히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그들과 공존을 모색하고 있어요. 분할된 팔레스타인 지역에 그들의 국가를 정식으로 수립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죠. 문제는 이스라엘의 태도예요. 경계 지역에 분리 장벽을 세우고 철저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과 소통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이죠. 국제연합이 결정한 이스라엘 점령 지역(가자 지구, 웨스트뱅크, 골란고원)의 반환도 50년 째 거부하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죠.

 

평화롭던 살마의 레몬농장에 이스라엘 국방 장관이 이사오고 갈등이 생기는 상황은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갈등이 발생한 상황과 흡사해요. 살마가 법정 투쟁을 벌이는 것은 중동의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과 벌인 중동전쟁과 흡사하고요. 살마는 법정 투쟁을 통해 이런 판결을 받아요: "경계 지역에 장벽을 세우고 레몬 농장의 나무도 일부 벨 것." 이는 이스라엘과 공존하려는 팔레스타인들의 바램을 저버리고 700Km에 달하는 분리 장벽을 세우고 적대 관계를 지속하려는 이스라엘의 현 모습과 흡사해요.

 

바다는 수용의 미덕을 상징하고 레몬은 변화와 개혁의 미덕을 상징하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 두 덕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관계인 것 같아요. 물론 이 덕목이 이스라엘에게 더 필요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죠.

 

만 좀 자세히 알아 볼까요? 柠은 레몬이란 뜻이에요. 木(나무 목)으로 뜻을 표현했고, 宁(편안할 녕)으로 음을 표현했어요. 영몽 영. '레몬 영'이라고 읽기도 해요. 柠이 들어간 예는 柠檬(영몽, 레몬) 외에는 들만한 예가 없네요.

 

여담. 사진은 프랑스에 가 있는 딸 아이가 찍어 보냈어요. 치약갑이라고 하더군요. 왼쪽의 영문은 회사명이고, 오른쪽의 영문은 천연 추출물이란 의미예요. 아시아 마트에서 샀다고 하던데, 아시아인들을 겨냥해서 한자 표기를 추가한 듯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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