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시사IN> 창간 10주년 기념 특별호(527). 부분 발췌>

 

 

이명박 정부하 국정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취소 청원을 기획했었다죠? 축하하고 또 축하해도 모자랄 경사를 두고 어찌 그런 일을 꾸몄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도 소련 정부하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을 저지당한 일이 있죠. 하지만 수상(솔제니친) 이후 소련 정부가 수상 취소 청원을 기도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노벨상 수상 취소 청원 기도는 아마 노벨상과 관련한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어요.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에요.

 

자랑스러워해야 할 인물이 폄훼된 사례중에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선생이 있죠. 해외에서 20세기 5대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만큼 훌륭한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상찬은 커녕 오랫동안 불온인사로 취급당했죠. 친북 성향을 띈 해외 반체제 인사라는 게 그 죄명(?)이었죠. 동백림 사건으로 무고한 시달림을 받았던 그였기에 반공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남한 정부를 비판한 것은 어찌보면 그로선 당연한 행위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친북 성향도 이런 연장선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남한 정부와 달리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고 포용하려 했던 북한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아니 가질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선생이 친북적인 경향을 띄었다곤 하지만 그가 결코 북한을 추종했던 것은 아니라고 보여요. 해외 범민련 의장직을 사퇴한 것이 그 한 증거이죠. 북한이 범민련을 이용한다라는 게 그의 사퇴 명분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선생은 남 ·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양 체제가 아직도 대립하고 있는 한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내려지기 어려울 듯 싶어요. 통일이 된 이후에나 그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은 이 불행한 예술가의 묘비명이에요. 그의 이름과 함께 그가 생전에 사랑했음직한 말이 함께 새겨져 있어요. 처염상정(處染常淨). 오염된 곳에 처해도 항상 맑다. 연꽃을 말할 때 사용하는 말이죠. 연꽃은, 주지하는 것처럼, 불가에서 초월, 청정등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하는 꽃이죠. 묘비명은 그 사람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 묘비명은 한 불행했던 예술가의 묘비명이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돼요.

 

홍은미씨는 윤이상 선생의 음악 세계를 융합과 조화로 보면서 이런 말을 해요: "120곡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전부 서양의 현대음악 어법으로 씌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나고 자라면서 체험한 한국의 소리가 거의 대부분 작품에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미학적 사상성에 있어서도 동아시아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면서 일례로 윤이상의 출세작 중의 하나인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에 대해 당대 음악인들의 감탄을 두 가지로 설명해요: "하나는 철저히 12음 기법으로 씌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12음 기법을 쓰는 작곡가들의 작품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악보에 난무하는 수많은 음표들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단아함, 즉 정중동의 신비감이다." (인용 출처:http://www.yunfoundation.org/. 일부 내용 요약 인용)

 

요컨대 그의 음악은 이질적인 것의 화해(和諧)가 핵심이라는 것 같아요. 이런 각도에서 그의 묘비명 '처염상청'은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꽃이 아름다운 것은 진흙과 같은 더러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진흙과 같은 더러운 것이 대비되지 않는다면 연꽃의 아름다움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연꽃과 진흙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대비적 관계라기보다는 상보적 관계로 볼 수 있다. 진흙이 상대적으로 연꽃보다 하위에 놓인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연꽃에 비해 드러나보이지 않을 뿐이다. 진흙이라는 영양분이 없으면 연꽃도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진흙의 가치는 결코 연꽃에 비해 뒤지는 것이 아니다. 동양 음악은 서양 음악과 대비될 때 그 특성이 드러나며, 서양 음악 또한 동양 음악과 대비될 때 그 특성이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동양 음악과 서양 음악은 서로 대척점에 놓인 것이 아니라 서로 도와주는 관계에 놓인다고 볼 수 있고, 양자의 화해는 궁극적으로 '음악'이라는 예술을 한층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준다. 바로 이런 음악을 추구한 것이 나(윤이상)의 음악이다."

 

그러나 처염상정을, 일반적 의미(초월, 청정)로 해석하여, 그의 생을 대변하는 말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세상 그 어떤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인생이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실제 그에게는 그런 면모가 있어요. 남북한의 상이한 이데올로기[세속]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과 통일[이상]을 우선시했던 것이 그렇지요. 어떻게 보든 처염상정은 그에게 잘 어울리는 묘비명이란 생각이 들어요.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는 虍(범 호)와 夂(뒤져올 치)와 几(의자 궤)의 합자예요. 뒤에서 힘겹게 좇아와 앞 사람에게 미치듯이 의자에 양 관절이 도달해(?) 머무른다란 의미예요. 머무를 처. 虍는 음을 담당해요(). ‘이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머무르는 곳'이란 의미로요곳 처. 處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處地(처지), 何處(하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木(나무 목)과 氵(물 수)와 九(아홉 구)의 합자예요. 염색 원료[]의 액체[ 氵]를 가지고 여러 번[] 물들인다는 뜻이에요. 물들일 염. 染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染色(염색), 傳染(전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巾(수건 건)과 尙(숭상할 상)의 합자예요. 깃발이란 의미예요. 깃발의 형태가 수건과 흡사하여 巾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尙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常은 천자와 제후들이 사용하던 깃발로 존귀하게 취급되던 깃발이란 의미로요. 깃발 상. '항상'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常은 항상 존귀하게 취급된다는 의미로요. 항상 상. 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恒常(항상), 常備(상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氵 (물 수)와 爭(다툴 쟁)의 합자예요.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에요. 氵로 뜻을 나타냈어요. 爭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깨끗하게 하려면 더러운 것과 다투게 된다란 의미로요. 깨끗할 정. 淨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淨化(정화), 淸淨(청정)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상담 프로그램에서 삶에 대한 각성을 이끌기 위해 미리 쓰는 유서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죠. 옛 분들도 그런 전통이 있었던 듯 해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그것이죠. 생전에 자신의 묘지명을 미리 쓰는 것이죠. 자신의 삶이 후세에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각성을 다짐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죠. 다산 선생도 이런 묘비명을 썼고 퇴계 선생도 이런 묘비명을 썼다고 해요. 죽음은 삶의 이면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미리 쓰는 유서나 자찬묘비명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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