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따금 패악한 사람에게 쏟아내는 질타예요. 여기 하늘은 초월적 심판자, 즉 신을 가리키죠. 신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이 질타가 얼마나 의미있을지는 미지수예요. 하지만 이 말이 전혀 황당하게만 들리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에요. 왜 그럴까요? 그건 아마도 우리 내면에 깃든 신의 그림자를 자극하는 말이라서 그러지 않은가 싶어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지만 아직 그 신의 그림자가 우리 내면에 깃들어 있기에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말을 들으면 공명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싶은 거죠.
하늘[신]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자리 잡은 것은 언제부터 일까요? 중국 고대 은나라 때는 하늘에 해당하는 존재가 상제(上帝)였어요. 이 상제는 인간계의 모든 현상을 주재하는 존재였어요. 사람들은 이 존재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점을 쳤죠. 은나라의 유적지에서 나온 갑골문은 이 점사를 기록한 글씨이죠. 은 · 주 교체기에 상제는 '하늘[天]이란 존재로 바뀌어요. 아울러 인간계의 모든 현상을 주재하는 존재에서 유덕한 자에게는 행운을, 부덕한 자에게는 재앙을 내리는 선한 의지를 가진 인격신으로 이해되죠.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선 이런 경향이 강화됨과 동시에 정반대의 경향도 나타나요. 인격적 하늘을 배제한 자연의 이법으로 하늘을 보려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죠. 한대에도 이런 두 경향이 이어지고,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후자의 경향 - 하늘을 자연의 이법으로 보는 - 이 강해지죠.
수 · 당대에 이르면 하늘과 인간을 관통하는 이치에 관심을 두게 되고, 이는 송대로 이어져 천리(天理) 개념이 형성돼요. 송대 성리학의 종지가 '성즉리(性卽理)'인데 여기 성은 곧 하늘이에요. 따라서 성리학은 천리를 파악하고 거기에 따를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죠. 명대에 들어와선 순연한 이치라는 천리에 인간의 욕망이 더해져요. '천리인정(天理人情)'이 그것이죠. 생존욕을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긍정하는 사고는 청대에도 계승돼요. 근대에 들어와 하늘은 더이상 인간적 가치와 관계를 맺지 않는 단순히 적자생존 혹은 우승열패라는 무정(無情)한 이치로 받아들여져요. 천연(天演)이 그것이죠.
하늘은 자신이 주재자일 때도 선한 의지를 지닌 인격신일 때도 자연의 이법일 때도 순연한 이치일 때도 욕망을 긍정하는 이치일 때도 무정한 이치일 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어요. 하늘이 어떻다고 찧고 까불은 것은 사람들이죠. 그저 자신의 내면에 깃든 신의 그림자를 시대에 따라 달리 보고 달리 표현한 것 뿐이죠.
사진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한문으로 쓴 거예요. '개상제애세지 이독생자사지 사범신지자 면침륜이득영생 왈당신주야소기독 즉이여이가필득구의(蓋上帝愛世至 以獨生子賜之 使凡信之者 免沈淪而得永生 曰當信主耶蘇基督 則爾與爾家必得救矣)'라고 읽어요. "상제[하나님]가 세상을 사랑함이 지극하여 독생자(獨生子, 유일하게 낳은 자식)를 내려 그를 믿는 자로 하여금 고통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길이 행복한 생을 얻도록 하였다. 말하노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너와 네 집이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풀이해요.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죠.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이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라고 되어 있어요. 영어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한글 번역이 원문에 가깝게 번역됐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한문 번역이든 한글 번역이든 영어 성경이든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은 다 이상해요.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은 예수가 니고데모라는 이에게 한 말로 돼있는데 세 기술 모두 그 말의 주체가 예수라기 보다는 기자(記者)인 것처럼 돼있거든요. 모호하게 표현된 것이죠. 경전(經典)의 기술(記述)치고는 수준이 높지 않은 기술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경의 한문 번역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상제'예요. 하나님[God]을 번역한 말인데, 은나라 때의 하늘 개념을 가져와 번역한 것이 특이하죠. 일종의 격의(格義) 번역이라고 할 거예요. 격의는 외래 개념을 외래 개념 자체로 인식하기 전 기존의 전통 개념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불교 유입 초기 중국에서 '공(空)'을 도가의 '무(無)'로 이해한 것이 그 한 예이죠. 이런 격의 이해는 타 문화의 유입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죠.
그런데 재미난 것은 하나님[God]을 상제로 이해하여 번역한 것이 중국인에 의해 이뤄진게 아니라 서구인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이에요. 성경의 한문 번역은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졌거든요. 이렇게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기죠: "선교사들은 과연 상제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그리고 또 한가지 의문이 생기죠: "하나님을 상제로 번역한 성경을 대하며 당시 지식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선교사들이 상제의 의미를 중국인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거예요. 다만 주재자라는 점에서 일치점을 보이니 차용한 것 뿐이겠죠. 당시 지식인들은 성경을 그다지 높게 취급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성경이 번역될 당시 - 원대 이후 - 중국에서 상제는 이미 시효 지난 존재였기 때문이죠. 시효 지난 존재를 다룬 경전이 높게 취급되긴 어려웠을 거라고 보는 거죠(이상은 저의 억측이에요. 특히 후자. 자료를 찾아본 바 없거든요).
중국의 하늘 개념 변천사로 봤을 때 성경의 하늘[하나님]은 그리 진화하지 못한 하늘이에요. 그러나 진화하지 못한 하늘이라 하여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이들이 성경의 하늘을 믿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이들을 과연 우매하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효의 가치가 중시되지 않는 시대라고 하여 효를 행하는 이를 우습게 여길수 없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진화하지 못한 하늘이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하늘이 무섭지 않는냐!"는 말이 공명을 일으키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여전히 하늘[신]의 그림자가 드러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렇지 않고는 이 문화지체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사진의 낯선 한자를 몇 자 알아 볼까요?
蓋는 艹(풀 초)와 盍(덮을 합)의 합자예요. 풀을 엮어 덮는다는 의미예요. 덮을 개. '대개'라는 발어사(發語詞)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동음을 빌미로 차용된 거예요. 대개 개. 위 사진의 내용에서는 발어사의 의미로 사용됐죠. 蓋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覆蓋(복개), 蓋草(개초, 이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賜는는 貝(조개 패)와 易(바꿀 역)의 합자예요. 재화를 타인에게 준다는 의미예요. 貝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易은 음을 담당하면서(역→사)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재화를 타인에게 주면 그 재화의 소유 관계가 바뀌게 된다는 의미로요. 줄 사. 賜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下賜(하사), 厚賜(후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沈은 물에 잠겼다는 의미예요. 氵(물 수)로 의미를 표현했고 冘로 음을 나타냈어요. 잠길 침. 沈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浮沈 (부침), 擊沈(격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淪은 잔잔한 물결이란 의미예요. 氵(물 수)로 의미를 표현했고 侖으로 음을 나타냈어요. 잔물결 륜. '빠지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빠질 륜. 淪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淪缺(윤결, 쇠하여 없어짐), 淪埋(윤매, 파묻혀 없어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耶는 고을 이름이에요. 阝(邑의 변형, 고을 읍)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耳는 음을 담당해요(이→야). 고을이름 야. 어조사의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동음을 빌미로 차용된 거예요. 어조사 야. 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琅耶(낭야, 지역 이름. 琅邪로도 표기), 是耶非耶(시야비야, 옳을 가 그른 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蘇는 차조기(꿀풀과의 일년생 재배초)란 뜻이에요. 艹(풀 초)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차조기 소. '깨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동음을 빌비로 차용된 거예요. 깰 소. 蘇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紫蘇(자소, 차조기), 蘇生(소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救는 금지시키다란 의미예요. 攵(칠 복)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강제 수단을 사용하여 못하게 한다는 의미지요. 求(裘의 약자, 갖옷 구)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갖옷이 몸을 보호하듯이 상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못하게 하는 것이란 의미로요. 금할 구. '구원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구원할 구. 救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救援(구원), 救出(구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사진은 예산에 있는 한국서예비림박물관에서 찍었어요. 야외에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글씨들이 세워져 있더군요. 중국의 비림(碑林)을 모방해 조성했다는데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 그런지 성근 티가 역력했어요. 귀부인의 화장을 흉내 낸 촌 아낙네의 어설픈 화장 같다고나 할까요? 세월이 지나면 점점 더 나아지겠죠?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우리만의 개성있는 비림을 조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여담 둘.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이 글을 읽으면 좀 언짢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성경 구절에 대한 의문, 성경과 기독 신앙에 대한 저의 평가(?)는 글의 흐름상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뿐 이에요. 어떤 의도를 갖고 내린 평가가 아니란 점을 널리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울러 '하늘[신]'에 대한 이해 내용도 저의 사견이 아니라 중국 철학사에서 보편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임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요컨대, 이 글을 가지고 저에게 옳고 그름[是非]을 말씀하지 않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