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http://gotn.tistory.com/390>

 

 

 

  

 

"각자 좋아하는 시를 한 수씩 읊어보면 어떨까?"

 

  

 

 

 

 

교수님이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씀하셨어요. 인근의 산성으로 야외 수업을 빙자한 나들이를 갔을 때 였지요. 그러나 학생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서로 눈짓만 교환할 뿐 아무도 시를 읊지 않았어요(어쩌면 못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암송하는 시가 없어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교수님은 다소 멋적으셨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씀 하셨어요. "아무래도 좀 그렇지? 미리 준비 좀 하라고 일렀으면."

 

 

 

 

30년 전 추억의 한 장면이에요. 당시 교수님의 청(), 솔직히, 너무 어색한 청이었어요모이면 그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잡담 일색인 학생들에게 시를 한 수씩 읊어 보라니.

  

 

 

 

당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옛 풍류 - 경치 좋은 곳을 찾으면 시를 짓거나 읊는 - 를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아울러 현재(당시)의 유희 문화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갖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구요. 당시는 교수님의 청이 너무 생뚱맞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왠지 속 깊은 청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치 좋은 곳에 가면 으레 만나게 되는 건물이 있죠. 누정(樓亭). 그리고 누정에 빠짐없이 붙어있는 것이 있죠. 시문(詩文). 누정에 올라 그저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사만 연발하다 내려오는 건 왠지 좀 아쉬워요. 그곳의 시문 현판을 읽으며 옛 사람과 교감을 나눌 때 보다 의미있는 방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요즘은 한문에 낯선 이들을 위해 한글 번역문도 곁들여 놓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관계 기관의 훌륭한 배려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보고 이렇게 느꼈는데 옛 사람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나 대조하며 경관과 인심(人心)의 변화를 살피는 깊이있는 방문이 될테니까요.

 

 

 

 

사진은 춘천에 있는 소양정(昭陽亭) 시문 현판이에요.

 

 

 

 

 

昭陽亭   소양정

 

松巖 梁大樸   송암   양대박

 

 

遠客惜芳草    원객석방초   나그네 꽃 핀 봄날이 아쉬워
昭陽江上行    소양강상행   소양강가에 나아가네.
高亭臨古渡    고정임고도   높은 정자는 옛 나루를 내려보고
喬木夾飛甍    교목협비맹   교목은 치솟아 처마를 끼고 있어라.   
列峀天邊淡    열수천변담   둘러친 산들은 하늘가에 담박하고
晴波檻外明    청파함외명   안개 걷힌 파도는 난간 너머로 분명하다.
風流堪畫處    풍류감화처   풍류는 그림처럼 빼어나고
漁艇帶烟橫    어정대연횡   고깃배 안개 속을 가로지른다.

 

紹軒   鄭道進      소헌   정도진      소헌 정도진 쓰다

 

  

<번역 출처:http://archive.ccmunhwa.or.kr/archive/item.php?it_id=1482820476&caidc=b1606010>

 

 

소양정을 찾게 된 계기와 소양정의 모습 그리고 소양정에서 바라본 풍경과 소회를 그리고 있어요. 누정의 위치가 대개 배산임수(背山臨水)인 것을 감안하면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풍경이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아요. 하여 이 시에서 눈여겨 볼 것은 첫 구의 '(, 아쉬워 하다)'이 아닐까 싶어요

 

 

 

 

 

떠도는 이가 느끼는 봄은 정착한 이가 느끼는 봄과 차이가 있죠. 정착한 이는 희망이나 소생의 느낌을 갖겠지만 떠도는 이는 비애나 좌절의 느낌을 가질 거예요. 시인은 나그네예요. 떠도는 이죠. 예외없이 비애나 좌절의 느낌을 가졌을 거예요. 그 심사를 ''으로 표현했어요. 시인은 그런 울울한 심사를 달래보려 소양정을 찾았어요. 그런데 이후의 내용에서 그런 울울한 심사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어요.

 

 

 

 

그러나 소양정과 주변의 풍경 묘사를 보면 시인의 심사가 어떻게 됐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곧추 선 나무, 둘러친 산, 안개걷힌 파도는 객관 풍경으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내면풍경으로도 읽힐 수 있어요. 이로 미뤄보면 시인의 울울한 심사가 '해소'됐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요.

 

 

 

 

누군가 답답한 마음으로 소양정을 찾았다 그 심사를 털어 버렸을 때 이 시를 읽는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어요: "허허, 내가 느꼈으나 말하지 못한 것을 잘도 표현하셨네 그려!"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날 일)(부를 소)의 합자예요. 햇살이 밝다는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부르는 것이 소리가 대상에 도달하는 것이듯, 햇살이 밝다는 것은 햇살이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이름이란 의미로요. 밝을 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昭代(소대, 태평한 세상), 昭詳(소상, 분명하고 자세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변형, 물 수)(잴 도)의 합자예요. 물의 깊고 얕은 정도를 헤아려 건넌다란 의미예요. 건널 도.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渡河(도하), 讓渡(양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구부러질 요)(높을 고)의 줄임 글자가 합쳐진 거예요. 높아서 끝 부분이 구부려졌다는 의미예요. 높을 교.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喬木世臣(교목세신, 여러 대를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 喬竦(교송, 높이 솟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큰 대)(사람 인) 2개가 합쳐진 거에요. 는 본래 양팔과 양 다리를 벌린 상태를 그린 거예요. 사람이란 의미였지요. 은 한 사람을 양쪽에서 끼고 부축하여 도와준다는 의미예요. 낄 협.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夾攻(협공), 夾雜物(협잡물, 섞인 물건, 순수하지 않은 물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기와 와)(꿈 몽) 약자가 합쳐진 거예요. 수키와 혹은 대마루(용마루)란 뜻이에요. 건물 바깥쪽을 강조하면 용마루를 덮고있는 '기와'란 뜻으로, 건물 안쪽을 강조하면 기와를 올려놓은 '용마루'란 뜻으로 사용해요. 여기 (덮을 몽)의 의미로 사용됐어요. 수키와(용마루)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甍宇(맹우, 기와집), 甍棟(맹동, 용마루에 얹은 수키와와 마룻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뫼 산)(단지 유)의 합자예요. 주변이 높고 가운데가 움푹한 단지처럼 산의 중앙에 생긴 동굴이란 의미예요. 산굴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岫居(수거, 산의 동굴에서 삶), 岫雲(수운, 산의 암굴에서 일어나는 구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나무 목)(살필 감)의 합자예요. 짐승 등을 가둬놓는 우리라는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가둬놓고 감시하는 장치가 우리란 의미로요. 난간은 우리란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난간 함.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檻獄(함옥, 감옥), 檻欄(함란, 난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흙 토)(심할 심)의 합자예요. 평지에서 돌출한 부위, 둔턱이란 의미예요견디다란 뜻으로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돌출되어 느끼는 불편을 감수한다는 의미로요견딜 감.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堪耐(감내), 勘當(감당)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배 주)(의 약자, 지저깨비(나무조각) )의 합자예요. 소형 배란 의미예요. 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나무 조각처럼 작은 배란 의미로요. 거룻배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救命艇(구명정), 艇子(정자, 뱃사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우리 나라에서 누정 문화의 기원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요. 본래 궁의 부속 건물로 출발했지만 이후 사축(私築, 개인 건축)으로 발달했다는 군요. 소양정은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요. 매우 유서깊은 정자예요(물론 위치와 명칭 및 건축 형태는 변화가 있었지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춘천문화원에서 이 유서 깊은 정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문 현판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보도가 있더군요(번역문도 곁들여 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곳을 찾는 분들이 경치 감상과 더불어 시문 감상도 꼭 했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여담 둘. 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 넓은 들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 나는 이 땅의 시인을 사랑합니다 / 외로우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꽃처럼 / 빛과 향기 조금도 거짓 없길래 / 나는 그들이 읊는 시를 사랑합니다(이하윤, 들국화). 30년전 그 나들이 장소에서 제가 읊고 싶었던 시예요. 그런데 왜 읊지 않았냐구요? 글쎄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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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modum40/221040472717 >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80년 후에는 내가 그이구나

 

한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를 함께보는 단구(短句)예요. 동시성의 통찰이라 평범한 듯 하면서도 비범해요. 지은이는 서산대사로 알려진 휴정(休靜, 1520-1604)이에요. 자신의 영정에 쓴 것으로, 85세에 입적했으니, 생애 말년에 쓴 것이에요.

 

휴정은 승병 지도자 - 임진왜란시 - 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선승이었다는 점에 있어요. 그가 지은『선가귀감(禪家龜鑑)』은 지금도 중요한 선 입문서로 취급되죠. 그가 선에 정통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한 사례라고 할 거예요. 휴정은 선승이긴 했지만 '교(敎)' 또한 중시했어요. 그는 선을 말 없음을 통해 말 없음에 이르는 길로 보았고, 교를 말 있음을 통해 말 없음에 이르는 길로 보았어요. 자신의 영정에서 동시성의 통찰을 보인 것 처럼 수행에서도 동시성을 추구한 것이죠. 이는 그가 남긴 시편에서도 확인돼요.

 

 

사진은 휴정의「독파능엄(讀罷楞嚴, 능엄경을 읽은 후)」이란 시예요(독파를 보통은 '讀破'로 표기하는데, 인터넷 자료에는 '讀罷'로 나오더군요. 인터넷 자료를 따랐어요).

 

 

風靜花猶落   풍정화유락     바람 고요해도 꽃 떨어지고

鳥鳴山更幽   조명산경유     새 울어도 산 고요해

天共白雲曉   천공백운효     하늘은 백운과 함께 밝아오고

水和明月流   수화명월류     물은 명월과 함께 흐르네 

 

* 사진의 번역과 약간 다르게 번역했어요.

 

 

『능엄경(楞嚴經)』은 불성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번뇌가 사라진 자리가 곧 불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번뇌 사르는 것을 주가르침으로 하는 경전이에요. 이를 바탕으로 시를 보면 내용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첫째 구에서, 바람이 고요하건만 꽃이 떨어진다고 했어요. 바람이 고요하지 않다면, 즉 바람이 몰아친다면 꽃이 떨어지는 것을 깊은 울림으로 받아 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바람부니 꽃이 떨어지는거야 당연하지!' 정도로 무심히 인식하겠지요. 그러나 꽃이 떨어질 상황이 아닌데, 즉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상태인데 꽃이 떨어진다면 깊은 울림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바람도 없는데 어떻게 꽃이 떨어지지?' 라며 유심히 인식하겠지요. 첫 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존재의 가치는 타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인식된다'는 점이에요. 둘째 구는 첫 구의 언급을, 소재를 바꾸어, 반복한 거예요.

 

셋째 구는 첫째 구와 둘째 구의 인식관으로 세상을 통찰한 모습이에요. 하늘과 백운은 함께 하기 불편한 존재예요. 하늘은 빛을 발산하려 하고 백운은 빛을 차단하려 하기 때문이죠. 이런 모순된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공간이 바로 세상이에요. 재미있는건(?)  이런 모순된 존재가 서로에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유미의하다는 점이에요. 하늘의 빛은 백운이 가리려 하기에 더 가치가 있고, 백운의 가림은 하늘이 빛이 드러나려 하기에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세상은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 모순은 공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을 지향한다는 것이 휴정이 인식한 세계관이에요. 앞서 언급한 동시성의 통찰과 같은 맥락이지요. 넷째 구는 셋째 구의 내용을, 소재만 바꾸어, 반복한 거예요.

 

위 시는 휴정이 『능엄경(楞嚴經)』을 읽고 난 뒤 지은 시예요.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을 주내용으로 하는 능엄경을 읽고 위와 같은 인식과 통찰의 모습을 보였다면, 그가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 상관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번뇌는 불성의 깨우침으로 가는 길이며, 불성의 깨우침은 번뇌로 부터 시작한다.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이런 인식을 했을 것으로 보여요.

 

낯선 한자를 두어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靜은 청(푸를 청)과 爭(다툴 쟁)의 합자예요. 분명하게 살펴본다는 의미예요. 선명한 색깔을 의미하는 靑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爭은 음을 담당하면서(쟁→정)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분명하게 살펴보려면 요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요. 靜은 보통 '고요하다'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는 靑보다 爭의 의미를 강조하여 사용한 거예요. 고요할 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肅(정숙), 寂寞(적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幽는 山(뫼 산)과 幺(작을 요) 두 개가 합쳐진 글자예요. 작은 것은 그 자체도 알아보기 힘든데, 깊은 산 중에 들어 있어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다는 의미예요. 정체가 모호하여 파악하기 힘들다는 의미의 '그윽하다'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그윽할 유.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靈(유령), 深山曲(심산유곡)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曉는 日(날 일)과 堯(높을 요)의 합자예요. 해가 뜨는 새벽이란 뜻이에요. 日로 뜻을 표현했어요. 堯는 음을 담당하면서(요→효)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새벽은 해가 높이 떠오르려는 시각이란 의미로요. 새벽 효. 曉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曉星(효성), 元曉(원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流는 氵(물 수)와 旒(깃발 류)의 줄임 글자가 합쳐진 거예요. 깃발이 펄럭이듯 물이 흘러간다는 의미지요. 旒의 줄임 글자는 음도 담당해요. 흐를 류. 流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流行(유행), 行雲流水(행운유수, 거리낌 없이 떠돎)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시에 보인 휴정의 동시성의 통찰이나 모순적인 존재의 공존 지향 세계관은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동양의 보편적인 가치관이라고 보는게 더 적확하죠. 오늘 날 세계에 기여할만 한 동양의 가치관을 꼽으라면 바로 이 동시성의 통찰과 모순적인 존재의 공존 지향 가치관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멀리까지 갈 것 없네요. 우리만 해도 당장 이런 가치관이 필요해 보이네요. 온갖 곳에 일방(一方) 생존의 상극(相克)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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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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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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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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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가지 바쁘실 줄 알지만 연락이 없어서…."

 

 없는 살림이지만 그래도 아이들 어렸을 때 흔적을 남기고 싶어 거금 100만원을 주고 캠코더를 구입했어요. 그런데 촬영 중 실수로 캠코더를 바닥에 떨어트렸어요. 이후 재생시 화질이 깨지는 거예요. 수리 센터에 수선을 부탁했는데 영 연락이 오질 않아요. 할 수 없이 수리 센타에 전화를 걸어 먼저 정중하게 말을 꺼냈어요. 연락을 주지 않는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한 것이죠.

 

 상대는 정중한 서두에 좀 당황한 것 같았어요. 보통은 다짜고짜 퉁명스런 말투로 짜증을 부리기 일쑤인데.

 

 "저희는 거금을 들여 샀는데, 제 때에 쓰지 못하면 사용의 의미가 없어서... 어려우셔도 이른 시일안에 수리를 좀 완료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상대는 더더욱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더니 답변을 했어요. "사실은 저희가 고쳐 보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다른 제품으로 교환을 하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본사에서는 교환을 잘 해주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그럴 때는 이런 식으로 적극 어필하세요."

 

수리  센터는 본사 산하일텐데 왜 반품 교환 요령까지 알려주는 걸까? 속으로, 의아했어요. 이후 수리 센터에서 먼저 본사에 잘 말했는지 본사에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고 제품은 교환됐어요. 벌써 십 몇년 전 일이네요.

 

그분과 통화할 당시 읽고 있던 책이 있었어요.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 핵심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라는 것인데 통화중에 그것을 활용했더니 생각잖은 좋은 결과를 얻은 거예요.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이 감정 노동에 시달린다고 하죠? 예전에는 서비스를 하는 분들이 외려 고객에게 상전 노릇을 했는데 지금은 역전된 느낌이에요. 예전도 좋지 않지만 지금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요. 상호간 예절있는 있는 말투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지 갑을 관계가 되어 횡포를 부리는 것은 눈쌀을 찌푸리게 해요.

 

사진은 '겸수익 만초손(謙受益 滿招損)'이라고 읽어요. '겸손은 이익을 받고, 오만은 손해를 부른다'는 뜻이에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한 구절이죠. 겸손과 오만중 어느 것이 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좋게 만드는 것인지는 이익과 손해를 거론하지 않아도 잘 알수 있지만 굳이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겸손과 오만을 말한 것은 피부에 와닿는 교훈을 주기 위해 그런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겸손'과 '위선'의 구분이에요(오만은 어차피 자신의 직정(直情)을 표현한 것이니까 거론한 필요가 없구요). 상대에 대한 분노가 지글지글한데 겉으로 야들야들하게 대한다면 그건 위선이 아닐까 싶어요. 이 경우 겸손은 '이익'의 관점에서 택한 '위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말(!)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말을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겸손'이죠. 카네기도 그런 점을 강조해요.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謙은 言(말씀 언)과 兼(겸할 겸)의 합자예요. 겸손하다란 뜻이에요. 言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겸손한 행동이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말씨'이기에 言을 사용했어요. 兼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내가 상대에게 겸손하게 대하면 상대도 내게 겸손하게 대한다는 의미로요. 겸손할 겸. 謙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謙遜(겸손), 謙讓(겸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損은 扌(手의 약자, 손 수)와 員(수효 원)의 합자예요. 덜어낸다는 뜻이에요. 扌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員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물건을 덜어내면 그 수효가 줄어든다는 의미로요. 덜 손. 損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損害(손해), 損失(손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그렇게 바꾼 캠코더는 이제 퇴물이 되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디카를 넘어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니 캠코더는 자연스럽게 손을 떠나더군요. 촬영해 놓은 테잎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고….

 

사진은 http://ushg.co.kr/board/bbs/board.php?bo_table=qna&wr_id=614  에서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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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출처: http://ushg.co.kr/board/bbs/board.php?bo_table=qna&wr_id=614

 

 

척벽비보 촌음시경(尺璧非寶 寸陰是競). 지름 한 자의 구슬, 결코 보배가 아니라네. 토끼 꽁지같은 시간, 이것이 진정 보배일세.

 

 

'천자문'의 한 구절이에요(의역 했어요). 초등학교 시절 이 구절을 읽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됐어요. 그 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나도 과연 어른이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 의미를 조금 이해할 듯 싶어요.

 

 

옛 글을 읽다보면 '시간을 소중히 하라'는 내용을 많이 만나요. 왜 시간을 소중히 하라고 했을까요? 기본적으로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조선조만 해도 평균 수명이 50을 넘기 힘들었다고 하니 그 이전 시대는 더 짧았겠지요. 이 짧은 삶에서 사회적 성취까지 이뤄야 하니 '시간을 소중히 하라'는 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평균 수명 70을 상회하는 지금은 시간을 함부로 대해도 될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다만 시간의 의미를 강조하는 연령대가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옛날에는 유소년기의 시간을 소중히 다뤄야 했지만 지금은 노년기의 시간을 소중히 다뤄야 하는.

 

 

소중히 다뤄야 할 노년기의 시간에 가장 유의미한 행위는 무엇일까요? 공부 아닐까 싶어요. 젊은 날의 공부는 생존을 위해 어쩔수 없이 해야하는 고역이었지만 노년의 공부는 생존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즐기며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공자는 "공부가 즐거워 세월가는 줄 몰랐다"고 고백한 적이 있어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노년의 즐거운 행위 중 공부가 으뜸일 수 있다는 주장은 그리 무리한 주장은 아니예요. ^ ^

 

 

사진은 '백천동도해 하시부서귀 소장불노력 노대도상비(百川東到海 何時復西歸 少壯不努力 老大徒傷悲)'라고 읽어요. '모든 물줄기 동으로 동으로 바다에 이르나니/ 어느 때 제자리로 온단 말가/ 젊은 날 노력하지 않으면/ 나이들어 후회감만 남으리'라는 뜻이에요(의역했어요). '다시 오지 않을 시간, 소중히 아껴 열심히 노력하라'는 의미지요. 젊은 이들에게 주는 교훈이겠죠? 이 글을 지금 상황에 맞춘다면 이렇게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백천집도해 하기유장귀 소장불식취 노대경흠상(百川集到海 何其悠長歸 少壯不識趣 老大竟欽賞). 모든 물줄기 모여 모여 바다에 이르나니/ 어찌도 그리 유장하게 귀착되는지/ 젊은 날엔 그 맛을 느끼지 못했나니/ 노년에사 그 맛을 느끼네. (운과 평측은 맞추지 못했네요 ㅠ ㅠ)

 

 

낯선 서너 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到는 至(이를 지)와 刂(刀의 변형, 칼 도)의 합자예요. 이르다란 뜻에요. 至로 뜻을 표현했어요. 刂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칼이 예리하여 조금만 접촉해도 그 흔적이 남을 수 있듯, 그같이 가고자 하는 곳에 틀림없이 이르렀다란 의미로요. 이를 도. 到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到着(도착), 到達(도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歸는 시집가다란 의미예요. 止(그칠 지)와 帚(婦의 약자, 아내 부)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여인이 시집가면 아내가 되기에 帚를, 또 시집을 가면 안정된 처소를 얻기에 이 뜻을 지닌 止로 '시집가다'란 의미를 표현했어요.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돌아가다(돌아오다)'란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돌아갈(올) 귀. 歸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歸鄕(귀향), 歸國(귀국)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壯은 士(선비 사)와 爿(조각 장)의 합자예요. 몸과 마음이 장대하다란 의미예요. 士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爿은 음을 담당해요. 장할 장. 壯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壯士(장사), 壯大(장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傷은 人(사람 인)과 昜(볕 양)의 합자예요. 남에게 받거나 남에게 입힌 상처란 의미예요. 人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昜은 음을 담당하면서(양→상)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양은 겉으로 드러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데, 상처는 겉으로 잘 드러나 보인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상처 상. 傷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傷痕(상흔), 外傷(외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悲는 心(마음 심)과 非(아닐 비)의 합자예요. 생각하던 것과 어긋나거나 이치에 맞지 않아 마음이 상했다는 의미예요. 슬플 비. 悲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悲慘(비참), 悲哀(비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노년기의 가장 보람있는 일이 공부라고 했지만, 젊은 날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분들에겐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거예요. 이렇게 보면 노년기의 가장 보람있는 일이 공부라는 주장은 분명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또 분명한 건 노년의 공부가 돈도 별반 들지 않고 의미있는 일이란 거예요. 젊은 날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분들이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본인도 노력을 해야 겠지만 뭔가 정책적으로도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평생 학습관 같은 곳에 강좌 개설하고 듣고 싶은 사람 듣게 하는 것만으로는 미흡하지 않은가 싶은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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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道學)과 절의(節義) 그리고 문장(文章) 삼박자를 고루 갖춘 분이 있었던가? 아쉽게도 어느 하나나 둘이 뛰어나면 나머지가 부족했다. 그러나 하늘이 이 나라에도 그러한 인물이 태어나도록 마음을 쓰셔 드디어 그 인물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이시다(國朝人物道學節義文章忒有品差 其兼有而不偏者無幾矣 天佑我東 鍾生河西金先生 則殆庶幾焉)."

 

 

우암 송시열이 지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선생의 신도비문 첫머리예요(의미 전달에 중점을 두고 의역했어요). 신도비에 과장이 들어가는것을 십분 감안한다 해도 "하늘이 이 나라에도 그러한 인물이 태어나도록 마음을 쓰셔" 운운은 대단한 상찬(賞讚)이 아닐 수 없어요. 전하기론 이 부분 때문에 김인후 선생의 명성이 더 치솟게 됐다고 해요.

 

 

김인후 선생은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어요. 스승과 제자 사이 나이 차이는 6살 밖에 되지 않았어요. 둘은 의기가 상통했고, 정치 혁신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인종이 등극 후 기묘사화로 숙청당한 조광조 등을 신원한 것은 그 한 예이죠.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종은 등극한지 9개월이 채 못되어 세상을 뜨고 말아요. 인종의 승하는 김인후에겐 더할 나위없는 큰 충격이었어요. 새로운 정치의 원동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죠. 당시 조정은 인종의 계모인 문정왕후와 그의 친동생(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었고 후계자로 지목된 명종은 나어린(12살) 군주였으니 새로운 정치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죠(실제 얼마 안있다 을사사화가 발생하죠). 이런 절망적 상황에 놓이자 선생은 벼슬을 내놓고 은둔을 택해요. 선생은 인종의 기일이면 매번 산속에 들어가 크게 통곡하고 내려왔다 해요. 인종의 조사(早死)에 대한 아쉬움과 불의(不義)의 시대에 대한 개탄 그리고 자신의 불우(不遇)한 처지를 슬퍼했던 거지요.

 

 

사진은 선생의 '致詩謝西齋(치시사서재, 시를 올리고 서제를 떠나다)'란 시예요.

 

 

散漫松間影   산만송간영    솔 숲 사이 그림자 어른 거리고

玲瓏氷下泉   영롱빙하천    얼음 아래 물 수정처럼 맑아라

尊傾調急管   준경조급관    술잔 기울이니 조급한 피리 소리 느슨해    

月側罷淸筵   월측파청연    달 이울어 맑은 모임 파해라

醉舞沿溪曲   취무연계곡    시냇물 굽이 따라 취하여 건들건들

狂歌遶樹邊   광가요수변    나무 주변 맴돌며 고성도 질러보네

歸來興不盡   귀래흥부진    돌아갈 참이건만 여흥이 식지 않아

嘯詠謝諸賢   소영사제현    콧노래 흥얼대며 인사를 드리네

 

 

고아(高雅)한 모임에 참석했다 떠나며 지은 시인듯 해요. 고아한 모임이라 그랬을까요? '취무(醉舞)'와 '광가(狂歌)'라는 말을 쓰고 있음에도 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풍모는 결코 이백류의 광달(狂達)한 풍모가 아니예요. 이는 취무와 광가에 어울리지 않는 '영롱(玲瓏)' '조(調)' '제현(諸賢)' 등의 시어 사용에서 빚어진 엇박자 때문이에요. 고의로 이런 엇박자를 낸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시인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빚어낸 결과로 보여요. 여기서 송시열이 언급한 도학과 절의라는 말을 상기하면 좋을 듯 싶어요.

 

도학를 탐구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중용의 삶을 지향한다는 거예요. 중용의 삶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과불급(過不及)이죠. 시에서 '취무'와 '광가'를 등장시키는 한편 '영롱'과 '조'와 '제현' 등을 등장시킨 것은 바로 과불급을 조절하는 도학자의 의식이 발동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요. 절의의 관점에서도 이 엇박자를 바라볼 수 있어요. 선생은 시대와의 불화로 은거를 택했어요. 자신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선생은 도사나 선사가 아니예요. 사(士)예요. 사의 은거는 결코 도사나 선사와 같을 수 없어요. 사의 은거는. 더구나 고명한 사의 은거는, 또 하나의 사회 참여 행위이지 도사나 선사처럼 세상을 버리는게 아니거든요. 그것은 불의의 시대를 고발하는 한 증표지요. 이 시가 초일(超逸)한 듯 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요.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은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㪔(나눌 산)의 합자예요. 잡다한 고기란 뜻이에요. 月로 뜻을 표현했어요. 㪔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여기저기서 토막난 것이 모인 잡다한 고기란 뜻으로요. 일반적으로 '흩어지다'란 뜻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흩어질 산. 散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解散(해산), 散亂(산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氵(水의 변형, 물 수)와 曼(길 만)의 합자예요. 물길이 광대하다란 의미예요. 氵로 뜻을 표현했어요. 曼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광대한 물길은 그 길이도 길다란 의미로요. 일반적으로 '질펀하다'란 뜻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질퍼할 만. 漫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漫畵(만화), 漫步(만보, 한가히 거니는 걸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王(玉의 변형, 구슬 옥)과 令(아름다울 령)의 합자예요. 옥소리란 의미예요. 王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令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듣기에 아름다운[좋은] 소리가 옥소리란 의미로요. 옥소리 령. 玲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玲玲(영령, 옥이 울리는 소리), 玲玎(영정, 옥석이 울리는 소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酋(술 유)와 寸(手의 변형, 손 수)의 합자예요. 공손히 받들어야 할[寸] 술잔[酋]이란 의미예요. 지금 술잔 이란 의미는 樽으로 표기하고, 尊은 주로 '높이다'란 의미로 사용해요. 위 시에서는 술잔이란 의미로 사용했어요. 술잔 준. 높일 존. 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尊敬(존경), 尊嚴(존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調는 言(말씀 언)과 周(두루 주)의 합자예요. 의사가 잘 소통되어 화목하다란 의미예요. 言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周는 음을 담당하면서(주→조)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화목하여 사이가 긴밀하다란 의미로요. 일반적으로 '고르다'란 뜻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고를 조. 調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調和(조화), 調節(조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罒(그물 망)과 能(능할 능)의 합자예요. 법망에 걸린 유능한 이를 관대하게 용서해 준다는 의미예요. 일반적으로 '파하다'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파할 파. 罷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罷業(파업), 罷免(파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竹(대 죽)과 延(길 연)의 합자예요. 긴 대자리란 의미예요. '대'를 빼고 '자리' 혹은 '잔치'란 뜻으로 많이 사용해요. 자리 연. 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壽筵(수연), 經筵(경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沿은 氵(水의 변형, 물 수)와 㕣(산속의 늪 연)의 합자예요. 물가를 따라 (내려) 간다는 의미예요. 물따라 갈 연. 沿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沿革(연혁), 沿岸(연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辶(걸을 착)과 堯(繞의 약자, 두를 요)의 합자예요. 에워싼다는 의미예요. 에워쌀 요. 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環遶(환요, 둥글게 에워 쌈), 圍遶(위요, 빙 둘러 앉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辶(걸을 착)과 自(부터 자)와 方(旁의 약자, 두루 방)의 합자예요. 자기가 있는 곳으로부터 걸어서 이를만한 곳, 즉 멀지 않은 주변 지역이란 의미예요. 가 변. 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周邊(주변), 邊塞(변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口(입 구)와 肅(엄숙할 숙)의 합자예요. 나즈막하게[肅] 입으로 가락있는 소리를 낸다는 의미예요. 휘파람 소. 嘯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虎嘯(호소, 범이 으르렁 거림. 영웅이 세력을 떨쳐 활약함을 비유), 嘯兇(소흉, 악한 무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言(말씀 언)과 者(놈 자)의 합자예요. 여러 대상[者]을 일컫는 말[言]이란 의미예요. 모두 제. 諸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諸君(제군), 諸般(제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시 한편을 가지고 침소봉대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선생의 삶에 맞춰 견강부회한 것 같은 생각도 들구요. 시를 감상할 때 선입견을 배제하는게 중요한데 왠지 그와 반대로 시를 감상한 것 같은 느낌이….

 

 

여담 둘. 사진은  https://blog.naver.com/ldv1004/221091240335 에서 인용했어요. 낙관 부분은 '녹김인후선생시일수 소석 송형일(錄金麟厚先生詩一首 素石 宋亨日, 김인후 선생의 시  한 수를 쓰다. 소석 송형일)이라고 읽어요. 추사휘호대회에서 높은 상을 받은 작품이더군요. 시의 정서와 글씨체가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한데 글씨에 너무 힘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요. 작품도 훔쳐(?) 쓰는 주제에 객적은 품평까지 해서 혹 작가분의 노여움을 사는 건 아닌지…. (작가님, 혹 이 글을 보신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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