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modum40/221040472717 >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80년 후에는 내가 그이구나

 

한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를 함께보는 단구(短句)예요. 동시성의 통찰이라 평범한 듯 하면서도 비범해요. 지은이는 서산대사로 알려진 휴정(休靜, 1520-1604)이에요. 자신의 영정에 쓴 것으로, 85세에 입적했으니, 생애 말년에 쓴 것이에요.

 

휴정은 승병 지도자 - 임진왜란시 - 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선승이었다는 점에 있어요. 그가 지은『선가귀감(禪家龜鑑)』은 지금도 중요한 선 입문서로 취급되죠. 그가 선에 정통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한 사례라고 할 거예요. 휴정은 선승이긴 했지만 '교(敎)' 또한 중시했어요. 그는 선을 말 없음을 통해 말 없음에 이르는 길로 보았고, 교를 말 있음을 통해 말 없음에 이르는 길로 보았어요. 자신의 영정에서 동시성의 통찰을 보인 것 처럼 수행에서도 동시성을 추구한 것이죠. 이는 그가 남긴 시편에서도 확인돼요.

 

 

사진은 휴정의「독파능엄(讀罷楞嚴, 능엄경을 읽은 후)」이란 시예요(독파를 보통은 '讀破'로 표기하는데, 인터넷 자료에는 '讀罷'로 나오더군요. 인터넷 자료를 따랐어요).

 

 

風靜花猶落   풍정화유락     바람 고요해도 꽃 떨어지고

鳥鳴山更幽   조명산경유     새 울어도 산 고요해

天共白雲曉   천공백운효     하늘은 백운과 함께 밝아오고

水和明月流   수화명월류     물은 명월과 함께 흐르네 

 

* 사진의 번역과 약간 다르게 번역했어요.

 

 

『능엄경(楞嚴經)』은 불성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번뇌가 사라진 자리가 곧 불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번뇌 사르는 것을 주가르침으로 하는 경전이에요. 이를 바탕으로 시를 보면 내용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첫째 구에서, 바람이 고요하건만 꽃이 떨어진다고 했어요. 바람이 고요하지 않다면, 즉 바람이 몰아친다면 꽃이 떨어지는 것을 깊은 울림으로 받아 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바람부니 꽃이 떨어지는거야 당연하지!' 정도로 무심히 인식하겠지요. 그러나 꽃이 떨어질 상황이 아닌데, 즉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상태인데 꽃이 떨어진다면 깊은 울림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바람도 없는데 어떻게 꽃이 떨어지지?' 라며 유심히 인식하겠지요. 첫 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존재의 가치는 타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인식된다'는 점이에요. 둘째 구는 첫 구의 언급을, 소재를 바꾸어, 반복한 거예요.

 

셋째 구는 첫째 구와 둘째 구의 인식관으로 세상을 통찰한 모습이에요. 하늘과 백운은 함께 하기 불편한 존재예요. 하늘은 빛을 발산하려 하고 백운은 빛을 차단하려 하기 때문이죠. 이런 모순된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공간이 바로 세상이에요. 재미있는건(?)  이런 모순된 존재가 서로에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유미의하다는 점이에요. 하늘의 빛은 백운이 가리려 하기에 더 가치가 있고, 백운의 가림은 하늘이 빛이 드러나려 하기에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세상은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 모순은 공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을 지향한다는 것이 휴정이 인식한 세계관이에요. 앞서 언급한 동시성의 통찰과 같은 맥락이지요. 넷째 구는 셋째 구의 내용을, 소재만 바꾸어, 반복한 거예요.

 

위 시는 휴정이 『능엄경(楞嚴經)』을 읽고 난 뒤 지은 시예요.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을 주내용으로 하는 능엄경을 읽고 위와 같은 인식과 통찰의 모습을 보였다면, 그가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 상관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번뇌는 불성의 깨우침으로 가는 길이며, 불성의 깨우침은 번뇌로 부터 시작한다.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이런 인식을 했을 것으로 보여요.

 

낯선 한자를 두어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靜은 청(푸를 청)과 爭(다툴 쟁)의 합자예요. 분명하게 살펴본다는 의미예요. 선명한 색깔을 의미하는 靑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爭은 음을 담당하면서(쟁→정)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분명하게 살펴보려면 요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요. 靜은 보통 '고요하다'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는 靑보다 爭의 의미를 강조하여 사용한 거예요. 고요할 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肅(정숙), 寂寞(적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幽는 山(뫼 산)과 幺(작을 요) 두 개가 합쳐진 글자예요. 작은 것은 그 자체도 알아보기 힘든데, 깊은 산 중에 들어 있어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다는 의미예요. 정체가 모호하여 파악하기 힘들다는 의미의 '그윽하다'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그윽할 유.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靈(유령), 深山曲(심산유곡)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曉는 日(날 일)과 堯(높을 요)의 합자예요. 해가 뜨는 새벽이란 뜻이에요. 日로 뜻을 표현했어요. 堯는 음을 담당하면서(요→효)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새벽은 해가 높이 떠오르려는 시각이란 의미로요. 새벽 효. 曉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曉星(효성), 元曉(원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流는 氵(물 수)와 旒(깃발 류)의 줄임 글자가 합쳐진 거예요. 깃발이 펄럭이듯 물이 흘러간다는 의미지요. 旒의 줄임 글자는 음도 담당해요. 흐를 류. 流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流行(유행), 行雲流水(행운유수, 거리낌 없이 떠돎)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시에 보인 휴정의 동시성의 통찰이나 모순적인 존재의 공존 지향 세계관은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동양의 보편적인 가치관이라고 보는게 더 적확하죠. 오늘 날 세계에 기여할만 한 동양의 가치관을 꼽으라면 바로 이 동시성의 통찰과 모순적인 존재의 공존 지향 가치관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멀리까지 갈 것 없네요. 우리만 해도 당장 이런 가치관이 필요해 보이네요. 온갖 곳에 일방(一方) 생존의 상극(相克)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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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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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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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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