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http://gotn.tistory.com/390>

 

 

 

  

 

"각자 좋아하는 시를 한 수씩 읊어보면 어떨까?"

 

  

 

 

 

 

교수님이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씀하셨어요. 인근의 산성으로 야외 수업을 빙자한 나들이를 갔을 때 였지요. 그러나 학생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서로 눈짓만 교환할 뿐 아무도 시를 읊지 않았어요(어쩌면 못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암송하는 시가 없어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교수님은 다소 멋적으셨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씀 하셨어요. "아무래도 좀 그렇지? 미리 준비 좀 하라고 일렀으면."

 

 

 

 

30년 전 추억의 한 장면이에요. 당시 교수님의 청(), 솔직히, 너무 어색한 청이었어요모이면 그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잡담 일색인 학생들에게 시를 한 수씩 읊어 보라니.

  

 

 

 

당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옛 풍류 - 경치 좋은 곳을 찾으면 시를 짓거나 읊는 - 를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아울러 현재(당시)의 유희 문화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갖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구요. 당시는 교수님의 청이 너무 생뚱맞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왠지 속 깊은 청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치 좋은 곳에 가면 으레 만나게 되는 건물이 있죠. 누정(樓亭). 그리고 누정에 빠짐없이 붙어있는 것이 있죠. 시문(詩文). 누정에 올라 그저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사만 연발하다 내려오는 건 왠지 좀 아쉬워요. 그곳의 시문 현판을 읽으며 옛 사람과 교감을 나눌 때 보다 의미있는 방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요즘은 한문에 낯선 이들을 위해 한글 번역문도 곁들여 놓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관계 기관의 훌륭한 배려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보고 이렇게 느꼈는데 옛 사람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나 대조하며 경관과 인심(人心)의 변화를 살피는 깊이있는 방문이 될테니까요.

 

 

 

 

사진은 춘천에 있는 소양정(昭陽亭) 시문 현판이에요.

 

 

 

 

 

昭陽亭   소양정

 

松巖 梁大樸   송암   양대박

 

 

遠客惜芳草    원객석방초   나그네 꽃 핀 봄날이 아쉬워
昭陽江上行    소양강상행   소양강가에 나아가네.
高亭臨古渡    고정임고도   높은 정자는 옛 나루를 내려보고
喬木夾飛甍    교목협비맹   교목은 치솟아 처마를 끼고 있어라.   
列峀天邊淡    열수천변담   둘러친 산들은 하늘가에 담박하고
晴波檻外明    청파함외명   안개 걷힌 파도는 난간 너머로 분명하다.
風流堪畫處    풍류감화처   풍류는 그림처럼 빼어나고
漁艇帶烟橫    어정대연횡   고깃배 안개 속을 가로지른다.

 

紹軒   鄭道進      소헌   정도진      소헌 정도진 쓰다

 

  

<번역 출처:http://archive.ccmunhwa.or.kr/archive/item.php?it_id=1482820476&caidc=b1606010>

 

 

소양정을 찾게 된 계기와 소양정의 모습 그리고 소양정에서 바라본 풍경과 소회를 그리고 있어요. 누정의 위치가 대개 배산임수(背山臨水)인 것을 감안하면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풍경이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아요. 하여 이 시에서 눈여겨 볼 것은 첫 구의 '(, 아쉬워 하다)'이 아닐까 싶어요

 

 

 

 

 

떠도는 이가 느끼는 봄은 정착한 이가 느끼는 봄과 차이가 있죠. 정착한 이는 희망이나 소생의 느낌을 갖겠지만 떠도는 이는 비애나 좌절의 느낌을 가질 거예요. 시인은 나그네예요. 떠도는 이죠. 예외없이 비애나 좌절의 느낌을 가졌을 거예요. 그 심사를 ''으로 표현했어요. 시인은 그런 울울한 심사를 달래보려 소양정을 찾았어요. 그런데 이후의 내용에서 그런 울울한 심사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어요.

 

 

 

 

그러나 소양정과 주변의 풍경 묘사를 보면 시인의 심사가 어떻게 됐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곧추 선 나무, 둘러친 산, 안개걷힌 파도는 객관 풍경으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내면풍경으로도 읽힐 수 있어요. 이로 미뤄보면 시인의 울울한 심사가 '해소'됐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요.

 

 

 

 

누군가 답답한 마음으로 소양정을 찾았다 그 심사를 털어 버렸을 때 이 시를 읽는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어요: "허허, 내가 느꼈으나 말하지 못한 것을 잘도 표현하셨네 그려!"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날 일)(부를 소)의 합자예요. 햇살이 밝다는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부르는 것이 소리가 대상에 도달하는 것이듯, 햇살이 밝다는 것은 햇살이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이름이란 의미로요. 밝을 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昭代(소대, 태평한 세상), 昭詳(소상, 분명하고 자세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변형, 물 수)(잴 도)의 합자예요. 물의 깊고 얕은 정도를 헤아려 건넌다란 의미예요. 건널 도.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渡河(도하), 讓渡(양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구부러질 요)(높을 고)의 줄임 글자가 합쳐진 거예요. 높아서 끝 부분이 구부려졌다는 의미예요. 높을 교.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喬木世臣(교목세신, 여러 대를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 喬竦(교송, 높이 솟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큰 대)(사람 인) 2개가 합쳐진 거에요. 는 본래 양팔과 양 다리를 벌린 상태를 그린 거예요. 사람이란 의미였지요. 은 한 사람을 양쪽에서 끼고 부축하여 도와준다는 의미예요. 낄 협.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夾攻(협공), 夾雜物(협잡물, 섞인 물건, 순수하지 않은 물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기와 와)(꿈 몽) 약자가 합쳐진 거예요. 수키와 혹은 대마루(용마루)란 뜻이에요. 건물 바깥쪽을 강조하면 용마루를 덮고있는 '기와'란 뜻으로, 건물 안쪽을 강조하면 기와를 올려놓은 '용마루'란 뜻으로 사용해요. 여기 (덮을 몽)의 의미로 사용됐어요. 수키와(용마루)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甍宇(맹우, 기와집), 甍棟(맹동, 용마루에 얹은 수키와와 마룻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뫼 산)(단지 유)의 합자예요. 주변이 높고 가운데가 움푹한 단지처럼 산의 중앙에 생긴 동굴이란 의미예요. 산굴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岫居(수거, 산의 동굴에서 삶), 岫雲(수운, 산의 암굴에서 일어나는 구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나무 목)(살필 감)의 합자예요. 짐승 등을 가둬놓는 우리라는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가둬놓고 감시하는 장치가 우리란 의미로요. 난간은 우리란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난간 함.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檻獄(함옥, 감옥), 檻欄(함란, 난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흙 토)(심할 심)의 합자예요. 평지에서 돌출한 부위, 둔턱이란 의미예요견디다란 뜻으로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돌출되어 느끼는 불편을 감수한다는 의미로요견딜 감.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堪耐(감내), 勘當(감당)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배 주)(의 약자, 지저깨비(나무조각) )의 합자예요. 소형 배란 의미예요. 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나무 조각처럼 작은 배란 의미로요. 거룻배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救命艇(구명정), 艇子(정자, 뱃사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우리 나라에서 누정 문화의 기원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요. 본래 궁의 부속 건물로 출발했지만 이후 사축(私築, 개인 건축)으로 발달했다는 군요. 소양정은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요. 매우 유서깊은 정자예요(물론 위치와 명칭 및 건축 형태는 변화가 있었지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춘천문화원에서 이 유서 깊은 정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문 현판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보도가 있더군요(번역문도 곁들여 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곳을 찾는 분들이 경치 감상과 더불어 시문 감상도 꼭 했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여담 둘. 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 넓은 들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 나는 이 땅의 시인을 사랑합니다 / 외로우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꽃처럼 / 빛과 향기 조금도 거짓 없길래 / 나는 그들이 읊는 시를 사랑합니다(이하윤, 들국화). 30년전 그 나들이 장소에서 제가 읊고 싶었던 시예요. 그런데 왜 읊지 않았냐구요? 글쎄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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