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것은 편지꽂이 제일 위 구간에 아무렇게나 내던지듯이 꽂혀 있었네.”

  

포우의 도난당한 편지한 대목이에요. 편지를 훔친 D장관은 너무 평범하여 아무도 관심두지 않을 곳에 훔친 편지를 놓아두죠. 귀중한 것은 은밀한 곳에 감출 거라는 일반인의 인식을 뒤집은 거예요. 그의 예측대로 총감은 D장관 집의 은밀한 곳만 관심 깊게 수색하고 저 편지꽂이의 편지는 간과하고 말죠. 그러나 뒤팡의 눈은 피해갈 수 없었어요. 도난당한 편지는 추리소설의 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죠.

  

요즘의 한자 표기는도난당한 편지와 반대 모습을 보여줘요. ‘도난당한 편지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춘 경우라면, ‘한자 표기는 비범함 속에 평범함을 감춘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한자 문맹을 길러낸 우리 교육의 웃고픈 현실이에요. 경험 하나를 소개해요.

  

點心自體解決

  

일요일 아침 등산을 가기 전 아내에게 메모를 남겨 놓았어요. 그날따라 까닭 모르게 한자로 쓰고 싶었어요.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가 물었어요. “점심 차릴까?” “메모 써놨잖아! 먹고 왔어.” “뭐라고 썼는데?” “점심자체해결.” “그 뜻이었어? 아니, 그걸 꼭 그렇게 한자로 써야 돼?”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메모를) 뭐라고 읽은 거야?” “, 마음 심자가 있기에 답답한 마음 해소하러 간다는 걸로 생각했지. 어제 저녁에 답답하다고 했잖아!”

  

50줄에 들어선 아내조차 이러니 이하의 세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예요. 한자 문맹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끔 주변에서 황당한 작품을 만날 때가 있어요. 사진이 그 한 실례예요

  

玉立蕭蕭竹數竿 옥립소소죽수간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서있는 대나무 몇 그루

風枝露葉帶淸寒 풍지노엽대청한   바람과 이슬 맞은 가지와 잎새 맑고 서늘함을 띄었네

美花山房 牛甫 미화산방 우보       미화산방에서 우보(소 같은 사내) 그리고 쓰다

  

이건 대나무에 관한 시예요. 그런데, 이 화제 옆의 그림을 보세요. 대나무가 아닌 난초가 그려져 있어요. 이 작품은 한 음식점의 벽지에 인쇄된 것인데, 음식을 먹다 저 벽지의 시를 본 이들은 대부분 난초에 관한 시일 거라 생각할 거예요. 벽지를 제작하는 이들은 (본인들도 그렇지만) 한자를 모르는 이들이 다수이니 뭐를 그려 넣은들 상관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저 벽지를 제작했을 거예요(우보라는 이가 저 그림과 글씨를 함께 썼을 것 같지는 않아요. 벽지를 제작하는 곳에서 짜깁기 했을 것으로 보여요). 모두가 눈 뜬 장님이 돼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한자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그걸 배우고 가르치지 않아 장님이 되고 장님을 만든 것인지 모르겠어요(앞에서 비범함이란 말을 쓰긴 했지만 그건 그저 댓구를 맞추기 위해 쓴 것일 뿐이에요. 한자는 결코 비범하지 않아요).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알아볼까요?

  

(풀 초)(엄숙할 숙)의 합자예요. 쑥이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쑥 소. 쓸쓸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드문드문 나있는 쑥은 그 모습이 쓸쓸하단 의미로요. 쓸쓸할 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艾蕭(애소, ), 蕭瑟(소슬, 가을바람이 쓸쓸하게 부는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칠 복)(성길 루)의 합자예요. 빈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셈을 한다는 뜻이에요. 은 여기서 때리다란 뜻보다 셈을 할 때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하는 모습을 형용한 의미로 사용됐어요. 셀 수. 자주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이때는으로 읽어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數學(수학), 頻數(빈삭, 자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竿(대 죽)(방패 간)의 합자예요. 장대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나타내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에는 곧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거든요. 장대 간. 낚싯대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낚싯대 간. 위 시에서는 대나무를 세는 단위의 의미로 사용되었어요. 竿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竿頭(간두, 장대 끝), 釣竿(조간, 낚싯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풀 초)(잎 섭) 약자의 합자예요. 초목의 잎사귀란 뜻이에요. 잎사귀 엽.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落葉(낙엽), 葉書(엽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옷자락을 겹치게 묶고[llll] 묶고[] 양 끝을 가지런히 늘어뜨린[巾巾] 큰 띠를 그린 거예요. 띠 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革帶(혁대), 帶狀疱疹(대상포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가끔 아내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암호[한자 표기]를 사용하는 때가 있어요. 주로 말로 하기 민망한 경우에요. 어느 날 아내가 한의원에 가는데, 저도 단골로 가는 한의원이라 제 약도 지어오라고 부탁하며 최근의 몸 상태를 나타낸 문구를 적어주었어요. 囊濕及小便頻數. 다행히 아내는 암호의 내용을 캐묻지 않았어요. (임들께서도 캐묻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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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6-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찾아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본문중에 힌트가 있네요. 자주 삭.
아, 그래서 일부러 덧붙이신 일화인가요?

찔레꽃 2019-06-06 13:11   좋아요 0 | URL
약간은... ^ ^;;
 

 

무고하신지요? 그간 주물럭 거렸던 무거리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냈습니다. 지난 번에는 『길에서 주운 한자』란 제호를 달았는데, 이번에는 『길에서 만난 한자』라는 제호를 달았습니다. 전작(前作)이 한자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생각 중심이라 제호에 약간 변화를 주었습니다.

 

전작에서 서평을 부탁드렸던 벗님들의 격려와 충고가 이번 책을 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자 중심보다 생각 중심으로 책을 내게 된 것도 그 도움의 일단입니다(순오기 님의 충고). 이제는 더 이상 제 블로그를 찾지 않으시는(흑흑, 제게는 몹시 슬픈 일입니다) 한 벗님의 충고, 저자 자신보다 독자를 우선시하라는 충고도 이번 책에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격려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찬에 가까운 서평을 해주신 벗님의 서평이 이번 책을 내는데 큰 힘이 됐다는 것도 고백합니다(양철나무꾼 님의 격려).

 

충고든 격려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다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번 책에 대한 벗님들의 충고와 격려를 듣고 싶습니다. 주소와 성함을 남겨 주시면 책을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공으로 책을 받으면 부담스러워 서평쓰기 어렵다며 마다하시는 분도 많으신 것, 잘 압니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없다고 봅니다. 나쁜 면과 좋은 면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고, 이는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서평용 책을 요청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쁜 시간 쪼개어 서평을 해주시는 것, 그것 자체가 제게는 보내드린 책을 상회하는 큰 보답입니다.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내내 건승하시길 기원드리며

 

2019. 6. 2(일)

 

찔레꽃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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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있어

<딱터 >肖像畵로 밑씻개를 하라 외

쳤다 하여

그렇게 자랑일 순 없다.

어찌 그 치사한 휴지가 우리들의 성한

육체에까지 범하는 것을 참고 견디겠느냐!

   

주역은 음양의 대대(待對)논리를 바탕으로 한 철학서이죠. 대대란 직역하면 상대를 기다려 대한다란 뜻인데, 의역하면 상대가 있을 때 당사자가 온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의미예요. 음은 양이, 양은 음이 있을 때 온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주역의 정신이에요. 흔히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을 하는데, 얼핏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말 이지만, 주역의 대대 논리를 갖다 대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이에요. 한 극은 또 다른 극과 함께 있을 때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는 법이기에 둘은 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다르게 바꿔 표현한다면 극과 극은 둘이면서 하나라고나 할까요?

  

인용 시는 흔히 한국 현대시사에서 목가시인 혹은 전원시인으로 불리는 신석정 선생의 「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의 한 부분이에요. ‘4.19 혁명즈음하여 지은 시로 보여요. 이승만의 초상화로 밑씻개를 하는 것조차 참을 수 없다는 추상같은 일갈은 이 분이 과연 목가시인 혹은 전원시인이 맞나 싶을 정도의 강한 어조예요.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주역의 대대논리를 빈다면, 목가시인(전원시인)이었기에 이런 추상같은 어조의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순수했기에 불의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나 할까요?

  

사진은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라고 읽어요. ‘뜻이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있다란 뜻이에요. 신석정 선생이 즐겨 썼던 문구로, 그의 정신적 지향점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이 문구엔 위에서 언급한 선생의 양면성이 담겨 있어요. 목가(전원) 지향적이면서도 지사적인 견결함을 함께 보지(保持)한 문구거든요. 왜 선생이 저 같이 추상같은 시를 지을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문구라고 볼 수 있어요. 사진은 전북 부안의 석정문학관에서 찍었는데, 선생은 의외로 현실 참여적인 시를 많이 지었더군요. 우리에게 알려진 목가(전원)시인이란 인식은 선생의 면모를 왜곡되게 전달한 문학사가 들의 잘못이 크지 않나 싶어요.

  

두 자만 자세히 살펴볼까요?

  

(갈 지)(마음 심)의 합자예요. 마음이 가는 바, 곧 뜻이란 의미예요. 뜻 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意志(의지), 志士(지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물 수)(깃발 류) 약자의 합자예요. 깃발이 펄럭이듯 물이 흘러간다는 의미예요. 흐를 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流行(유행), 流言蜚語(유언비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제게는 오래 전 800원을 주고 산 신석정 선생이 번역한 문고판 당시선집이 있어요. 선생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에게 당시를 배웠는데, 한시에 대한 소양이 있어서 그런지 번역이 상당히 유려해요. 이런 유려한 번역을은 앞으로는 찾아보기 어려울 듯싶어요. 선생처럼 한시 혹은 한학에 대한 소양과 현대시작 능력을 겸비해야 그런 번역이 가능한데, 지금은 현대시작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은 가능하지만 한시 혹은 한학에 대한 소양을 키우기는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니까요. 아쉬운 일이에요. 선생의 번역시 한 편을 소개해요.

  

봄도 막 가는 三月 그믐인데

계절은 저만 가고 나만 남긴다

그러면 그대여 이 하룻밤을

뜬 채 새면서 이야기 다하리

새벽 종 그윽히 들리기 전엔

우리는 그대로 봄에 사는 몸이여

  

三月正當三十日 삼월정당삼십일

風光別我苦吟身 풍광별아고음신

共君今夜不須睡 공군금야불수수

未到曉鐘猶是春 미도효종유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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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Trump, We refuse your visiting of Korea! Korea is a very polite nation of east area traditionally(트럼프 대통령, 당신의 방한을 거부한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다).”

  

오늘 전국 유림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거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성추문에 휩싸인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대통령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동성동본 혼인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가진 이후 유림의 이런 대규모 집회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집회에 참석한 한 노() 유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양 되놈이라고 비난하던 것이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까지 우리가 서양 되놈을 환영해야 합니까! 트럼프, 그가 비록 한반도의 명운을 쥐고 있는 자라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야 합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인필자모이후인모지(人必自侮而後人侮之)’라고,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업신여긴 뒤에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법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지 않는 한 타인은 결코 우리를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래로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려왔습니다. 도덕을 숭상한 나라입니다. 조선조 500년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구현하지 못한 철인(哲人)정치 국가였습니다. 이런 우리가 언제부터 도덕을 내버리고 이익만 추구하는 나라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도덕을 숭상하고 지켜온 나라입니다. 트럼프는 성추문 스캔들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자를 우리가 굳이 환영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문대통령께선 우리의 이런 의지를 그자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론도 좀 더 우리의 행동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열변을 통한 노 유림은 목청껏 트럼트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상 △△△ ㅇㅇㅇ 였습니다.


사진은 천동인수군자국 불인굴인인자굴(天東仁壽君子國 不忍屈人人自屈)’이라고 읽어요. ‘하늘 동쪽 어질고 장수하는 군자국 / 굴복시키지 않아도 타인이 제 먼저 굴복하네란 뜻이에요.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독음(獨吟, 홀로 읊다)이란 시의 한 구절이에요.

  

독음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서정적 정서와 달리 서사적 사건을 읊은 시로, 공민왕 때 있었던 홍건적의 난을 두고 지은 일련의 시중 한 편이에요. 이 편련에 나타난 것은 고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에요. 홍건적이 물러난 것은 무력에 의한 퇴치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감읍하여 물러난 것이라데서 이른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자부심이 흥건히 배어 있어요.

  

문득 시구를 대하며 우리는 이 높던 자부심을 어디에 버렸나 싶어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봤어요. 만일 트럼프 방한 당시 실제 유림에서 이런 시위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다소 코믹스러운 면도 없잖아 있었겠지만 그 나름의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유림이라는 존재의 의미도 새롭게 각인시켰을 것 같고요. 허구한 날 충효교실이나 열고 동성동본 혼인 반대 타령만 하는 것 보다는 훨씬 더 신선해 보이잖아요? 사진은 충남대학교 도서관에서 찍었어요.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늙을 로)의 약자와 (밭두둑 주)의 약자의 합자예요. 기다란 밭두둑처럼 오래 살다 혹은 그렇게 오래 산 사람이란 의미예요. 장수할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壽命(수명), 長壽(장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꼬리 미)의 약자와 (날 출)의 합자예요. 꼬리가 없는 자벌레란 의미예요. 의 약자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은 나아가다[]란 의미가 있는데, 꼬리가 없는 자벌레는 굴신운동으로 앞으로 나간다는 의미로요. 자벌레 굴.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굽히다란 뜻은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굽힐 굴.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屈身(굴신), 屈曲(굴곡)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최근에 영국 왕실의 앤드류 왕자가 안동 하회 마을을 방문했어요. 신문 사진을 보니 갓 쓰고 도포 입은 노인이 그를 안내하는 장면이 있더군요. 만일 그 노인이 관광 안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을 하며 시위하는 모습이 언론에 전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어요. “전 세계에 악의 씨를 뿌린 제국주의 영국 왕가의 왕자 놈이 어찌 우리 유서 깊은 양반의 고장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한단 말인가! 썩 물러가라!” 실제 일어났다면 무척 흥미로운 기사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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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라는 것이 무슨 도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말하는 도이며, 앞서 말한 바의 도가나 불가의 도는 아니다. 요는 이를 순에게 전하였고, 순은 이를 우에게 전하였으며, 우는 이를 탕에게 전하였고, 탕은 이를 문왕과 무왕, 주공에게 전하였으며, 문왕과 무왕, 주공은 공자에게 전하였고, 공자는 맹가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맹가가 죽자 이것이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이며, 순자와 양웅은 잘 선택하기는 하였으나 정밀하지 못하였고, 말을 하였으나 상세하지 못하였다.”(임동석 역주, 고문진보(동서문화사: 2017), 1484)

  

한유의 원도(도의 근원을 탐색함)후반부예요. 성리학 도통 의식의 선하(先河)를 이루는 내용이자 한유의 도() 담지(擔持) 의식을 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죠. 불교가 극성을 이루었던 당대(唐代) 유가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구요. 송 대에 만개한 성리학, 이른바 신유학은 이런 한유와 그 일군의 사대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비록 송 대의 성리학자들은 한유와 그 일군의 사대부들을 순정(醇正)하지 못한 유학자라고 폄하하지만요.

  

고려 말에 수입된 성리학은 조선 중기에 들어와 이른바 사단칠정의 심성이기론으로 찬연한 꽃을 피우죠. 이 꽃을 피우는 과정에서 조선에서도 조선 성리학의 도통 계보가 마련되죠.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으로 이어지는 도통 계보가 바로 그것으로, 이 도통 계보는 불교를 대체한 새로운 통치이데올로기로 받아 들였던 성리학의 심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사진은 조선 성리학 도통 계보의 초장을 장식했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노방송[길가의 소나무]이란 시예요.

  

一老蒼髥任路塵 일로창염임로진    먼지 이는 길가 푸른 노송 하나 서있어

勞勞迎送往來賓 노로영송왕래빈    오가는 길손들 분주히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세한여여동심사    그대 같은 세한의 굳은 마음 가진 이

經過人中見幾人 경과인중견기인    길손 중에 몇이나 보았는가

  

김굉필은 조선 성리학의 도통 계보 초장을 장식하는 인물이지만 관념에 치우치지 않고 실천궁행을 강조했어요. 자신을 소학(小學)동자라 자칭하며 제자들에게 소학을 강조했죠. 소학은 사서(四書)나 육경(六經)과 달리 철저히 실천윤리를 강조한 책인데, 김굉필은 이 소학을 사서와 육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파악했어요

  

이 시는 이런 김굉필의 학문적 자세 일단을 보여주는 시예요.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실천의지와 노력을 길가의 소나무를 통해 표현했어요. ‘먼지 이는 길가오가는 길손은 세상 풍파와 지조 없는 이들을 상징하는 말이고, ‘분주히 맞고 보내는것이나 푸른 노송은 이런 풍파와 사람들을 대하는 힘든 모습과 그런 가운데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 유지하는 실천력을 보여주는 말이에요. 셋째 구와 넷째 구의 물음 형식을 취한 내용은 그런 실천력을 보인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어요. 사진은 달성의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 가는 길에 있는 다람재란 곳에 있는 시비예요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풀 초)(곳집 창)의 합자예요. 풀빛과 같이 푸른색이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푸를 창.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蒼空(창공), 蒼蒼(창창)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수염 수)의 약자와 (나아갈 염)의 합자예요. 구렛나루란 뜻이에요. 의 약자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구렛나루 염.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髥主簿(염주부, 양의 별칭), 美髥(미염, 멋있게 난 구렛나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鹿(사슴 록)(흙 토)의 합자예요. 사슴들이 떼를 지어 달려가면서 일으킨 흙먼지란 뜻이에요. 티끌 진.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塵土(진토), 塵埃(진애, 티끌과 먼지. 세상의 속된 것)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그윽할 유)의 약자와 (지킬 수) 약자의 합자예요. 무기를 갖고 으슥하고 위태로운 곳을 지킨다는 뜻이에요. 살필(위태로울) . 얼마()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으슥하고 위태로운 곳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의미로요. 얼마() .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幾察(기찰, 譏察과 통용. 행동을 넌지시 살핌) 幾月(기월, 몇 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자연철학으로 출발한 서양철학과 정치철학으로 출발한 동양철학(중국철학)은 사물을 다르게 인식한다고 해요. 서양 철학자에게 소나무는 그저 나무의 한 종류지만 동양 철학자에게 소나무는 인간의 윤리 의식을 대변하는 나무 이상의 존재예요. 이런 사물에 대한 인식 차이는 산림의 조성에도 큰 영향을 준 듯싶어요. 우리 주변에 유실수나 경제적인 수종(樹種)보다 소나무가 유독 많은 것은 이런 영향 탓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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