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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있어
<딱터 李>의 肖像畵로 밑씻개를 하라 외
쳤다 하여
그렇게 자랑일 순 없다.
어찌 그 치사한 휴지가 우리들의 성한
육체에까지 범하는 것을 참고 견디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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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은 음양의 대대(待對)논리를 바탕으로 한 철학서이죠. 대대란 직역하면 상대를 기다려 대한다란 뜻인데, 의역하면 상대가 있을 때 당사자가 온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의미예요. 음은 양이, 양은 음이 있을 때 온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주역』의 정신이에요. 흔히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을 하는데, 얼핏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말 이지만, 주역의 대대 논리를 갖다 대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이에요. 한 극은 또 다른 극과 함께 있을 때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는 법이기에 둘은 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다르게 바꿔 표현한다면 극과 극은 둘이면서 하나라고나 할까요?
인용 시는 흔히 한국 현대시사에서 목가시인 혹은 전원시인으로 불리는 신석정 선생의 「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의 한 부분이에요. ‘4.19 혁명’ 즈음하여 지은 시로 보여요. 이승만의 초상화로 밑씻개를 하는 것조차 참을 수 없다는 추상같은 일갈은 이 분이 과연 목가시인 혹은 전원시인이 맞나 싶을 정도의 강한 어조예요.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주역의 대대논리를 빈다면, 목가시인(전원시인)이었기에 이런 추상같은 어조의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순수했기에 불의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나 할까요?
사진은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라고 읽어요. ‘뜻이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있다’란 뜻이에요. 신석정 선생이 즐겨 썼던 문구로, 그의 정신적 지향점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이 문구엔 위에서 언급한 선생의 양면성이 담겨 있어요. 목가(전원) 지향적이면서도 지사적인 견결함을 함께 보지(保持)한 문구거든요. 왜 선생이 저 같이 추상같은 시를 지을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문구라고 볼 수 있어요. 사진은 전북 부안의 ‘석정문학관’에서 찍었는데, 선생은 의외로 현실 참여적인 시를 많이 지었더군요. 우리에게 알려진 목가(전원)시인이란 인식은 선생의 면모를 왜곡되게 전달한 문학사가 들의 잘못이 크지 않나 싶어요.
志와 流 두 자만 자세히 살펴볼까요?
志는 之(갈 지)와 心(마음 심)의 합자예요. 마음이 가는 바, 곧 뜻이란 의미예요. 뜻 지. 志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意志(의지), 志士(지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流는 氵(물 수)와 旒(깃발 류) 약자의 합자예요. 깃발이 펄럭이듯 물이 흘러간다는 의미예요. 흐를 류. 流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流行(유행), 流言蜚語(유언비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제게는 오래 전 800원을 주고 산 신석정 선생이 번역한 문고판 『당시선집』이 있어요. 선생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에게 당시를 배웠는데, 한시에 대한 소양이 있어서 그런지 번역이 상당히 유려해요. 이런 유려한 번역을은 앞으로는 찾아보기 어려울 듯싶어요. 선생처럼 한시 혹은 한학에 대한 소양과 현대시작 능력을 겸비해야 그런 번역이 가능한데, 지금은 현대시작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은 가능하지만 한시 혹은 한학에 대한 소양을 키우기는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니까요. 아쉬운 일이에요. 선생의 번역시 한 편을 소개해요.
봄도 막 가는 三月 그믐인데
계절은 저만 가고 나만 남긴다
그러면 그대여 이 하룻밤을
뜬 채 새면서 이야기 다하리
새벽 종 그윽히 들리기 전엔
우리는 그대로 봄에 사는 몸이여
三月正當三十日 삼월정당삼십일
風光別我苦吟身 풍광별아고음신
共君今夜不須睡 공군금야불수수
未到曉鐘猶是春 미도효종유시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