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서기(東道西器).

  

전통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서구 문물을 대하며 '어떻게 전통적 가치를 지켜야 할 것인가' 라는 고민 끝에 내놓은 처방이죠. 그래, 문명의 이기(利器)는 서구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신은 우리 것을 고수하겠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 가치를 전통 지식인들 스스로가 망각한 주장이에요. 전통 지식인은 성속(聖俗)이 불이(不二)이고 생사(生死)가 불이(不二)라는 가치관에 익숙하죠. 그렇다면 문명의 이기와 그 속에 함유된 정신도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죠. 따라서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속에 함유된 정신도 함께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동도서기는 이를 분리시키자는 주장이니, 전통적 가치를 망각한 주장이에요. 서구 문명에 대한 저항 의식이 만들어낸 공허한 구호이죠.

  

습기가 많은 이즈음, 건조기를 사용하는 가정들이 많죠. 저희도 이따금 건조기를 사용하는데, 이점이 많아요. 눅눅한 불쾌감과 곰팡이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점이에요. 하지만 이런 이점을 누리는 만큼 반대급부도 있을 거예요. 전기를 더 써야 하고 그만큼 발전기도 더 가동시켜야 하고 이에 따른 환경오염도 증가 될 테고. 굳이 인연(因緣)이란 불교 덕목을 들먹이지 않아도 편리함의 부정적 대가는 분명히 뒤따르겠죠.

  

이런, 방향이 곁으로 샜네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니고, 건조기 사용과 관련된 우리의 마음이에요. 앞서 문명의 이기와 그 이기에 담긴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했어요.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고 했죠. 건조기는 물기라는 불편함을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따라서 이 이기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도 그와 같이 변할 수밖에 없어요. 불편을 감수하는 인내력이 저하되는 거죠. 사실 수많은 문명의 이기는 대부분 불편함을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죠.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순간 인내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어요.

  

문제는 인내력이 저하되면서 개인이 가진 정서나 사람간의 관계도 점점 삭막해져 간다는 점이에요. 나이가 많든 적든 과거와 현재 자신의 모습과 주변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 말을 실감할 거예요. 갈수록 문명의 이기 사용은 늘어날 것이고 개인이 가진 정서나 사람간의 관계도 이에 따라 더욱 건조해질 거예요

  

개인이 가진 정서나 사람간의 관계가 삭막해져 가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워요. 건조기를 돌려 쾌적감을 취한 대신 반대급부의 부정적 영향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꼭 나쁘다고만 평가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죠. 문명의 이기도 편하게 사용하고 물기 있는 정서도 유지하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 아닐까 싶어요.

  

사진은 극도건조(極度乾燥)라고 읽어요. 설명은 굳이 필요 없겠죠? 영국의 다국적 의류회사인 ‘Super dry’를 한역(漢譯)한 거예요. 일본에서 번역했더군요. 한국에도 진출한 적이 있는데 재미를 못 봐 철수했고, 일본에서는 성공했다고 해요. 한역된 상호를 보며 왠지 우리 시대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호 같아 견강부회한 생각을 풀어 봤어요.

  

한자의 뜻과 음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나무 목)(빠를 극)의 합자예요. 용마루란 의미예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다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용마루는 최정상부에 사용되는 목재거든요. 은 음을 담당해요. 용마루(다할)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窮極(궁극), 太極(태극)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변형, 손 수)(무리 서) 약자의 합자예요. 뭇 사람들을 통제하는 일정한 규준이란 의미예요. 뭇 사람이란 의미는 의 약자로, 규준이란 의미는 로 표현했어요. 과거에 손은 장단(長短)을 재는 기준이었기에 규준이란 의미로 사용됐어요. 법도(정도) .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法度(법도), 程度(정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어두운 곳에 햇살이 비치듯 생명이 없을 듯한 두껍고 딱딱한 땅에서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예요. 은 땅을 뚫고 힘겹게 올라오는 싹의 모습을, 나머지는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표현한 거예요. 하늘이란 뜻과 마르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새싹이 지향하는 곳이 하늘이라 하늘이란 뜻으로, 새싹이 햇빛에 바짝 말랐다는 뜻에서 마르다란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이죠. 하늘(마를)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乾坤(건곤), 乾魚物(건어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불 화)(떠들썩할 조) 약자의 합자예요. 말리다란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날것[]을 말릴 때는 떠드는 소리처럼 다양한 소리가 난다는 의미로요. 말릴(마를) .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焦燥(초조), 燥濕(조습, 마름과 습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라고 하죠. 나이가 들수록 물기가 빠져 나가 대부분 마른 체형을 보이죠. 문제는 마른 체형처럼 마음도 메말라간다는 거예요. 노년에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금전에 대한 욕심인데, 메마른 마음을 메꾸려는 보상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죠. 그런데 이는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에요. 몸에 물기가 없는데 마음에 물기가 고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수록 정서와 사람 관계가 건조해지는 것과 매한가지죠.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에 이를 조절할 수 있어요. 노년이 될수록 관대해지는 사람도 있잖아요? 나이 칠십에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법도에 들어맞았다고 하는 공자가 그 한 실례죠. 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죠. 이런 점에서 보면,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면서 인정도 물기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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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뚝뚝한 오빠가 중간에 택시를 세우고 울었다더니, 이제야 그 심정 이해가 돼."


형님은 막내 아들을 사고사로 잃었어요. 비통한 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형수님과 달리 형님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으셨어요.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슬픔을 곱씹고 계셨던 거예요. 조카의 사고사는 벌써 십수년 전 일인데, 새삼 형님의 슬픔을 알게 된 건 막내 누님과의 통화를 통해서였어요. 막내 누님도 최근 큰 아들이 사고로 손가락 두 개를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본인이 직접 그런 아픔을 겪고 나니 사고사로 막내 아들을 잃었던 오빠의 심정이 절절히 이해되더라며 저 말을 하셨어요. 어쩌면 형수님보다 형님의 마음이 더 아팠을지도 모르겠어요. 표현되는 슬픔보다 표현되지 않는 슬픔이 더 슬플 수 있으니까요.


사진의 시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서화가인 왕탁(王鐸, 1592-1652)의 춘석(春夕, 봄 저녁)이란 시예요. 시를 읽다보니, 특히 말미에서, 시인이 느꼈을 심정이 바로 형님께서 보였던 슬픔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어 잠시 이야기를 해봤어요. 시를 읽어 볼까요?


水流花謝兩無情  수류화사양무정    흐르는 물 지는 꽃 둘 다 무정하여라

送盡東風過楚城  송진동풍과초성    모두가 봄 바람 초성(楚城)을 넘는 것 전송하네

胡蝶夢中家萬里  호접몽중가만리    꿈 속에 나비 되어 고향에 가렸더니 머나먼 만리 길

子規枝上月三更  자규지상월삼경    자귀도 이 마음 아는지 한 밤내 우는구나

故園書動經年絶  고원서동경년절    이제는 고향 소식도 드문데

華髮春唯滿鏡生  화발춘유만경생    이 봄엔 백발만 머리 한가득

自是不歸歸便得  자시불귀귀변득    스스로 돌아가지 않을 뿐 뜻만 있으면 갈 수 있나니

五湖煙景有誰爭  오호연경유수쟁    안개 낀 오호(五湖) 경치 그 누가 알단 말가


허무하게 지나가는 봄을 지는 꽃과 그 꽃잎을 싣고 흘러가는 물을 향해 애꿎게 타박했어요. 왜 가는 봄을 붙잡지 않고 전송만 했냐고. 시인이 지나가는 봄을 애달파 하는 것은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신세이기 때문이에요. 고향은 낮이나 밤이나 자나 깨나 가고 싶은 곳. 그러나 그 고향은 꿈 속에서도 가기 힘든 머나먼 곳. 그저 그립기만 할 뿐이죠. 한 밤중 고향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일 때 들려오는 두견새 소리는 시인의 마음을 대변한 것만 같아 더 구슬프게 들려요. 고향 소식이라도 자주 접하면 쓸쓸한 마음이 덜하련만 이제는 고향 소식도 뜸해요. 이런 상황에서 맞이하는 저문 봄. 마음은 까맣게 타고 머리엔 흰 이슬만 가득해요.


이런 상황이면 시인의 눈엔 눈물이 마음엔 서글픔이 가득하련만, 시인은 뜻밖의 말을 하고 있어요. "스스로 돌아가지 않을 뿐 뜻만 있으면 갈 수 있나니." 그리고 자신의 고향 자랑으로 시를 매듭지었어요. "안개 낀 오호 경치 그 누가 알단 말가." 시의 마지막 두 구는 시인의 허장성세(虛張聲勢)예요. 애써 허세를 부리며 귀향의 간절함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형님이 자식 잃은 슬픔을 가슴 속에 묻고 겉으론 무심한 듯 보였던 것 처럼요. 그러나 형님이 남모르는 곳에서 울었듯, 시인 역시 저 말 끝에 자신도 모르게 되돌아 눈물을 흘렸을 거예요.


낯선 한자를 두 어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盡은 皿(그릇 명)과 燼(탄나머지 진) 약자의 합자예요. 타고나면 남는 것이 없듯이 그릇 속의 음식물이 남김없이 다 비워졌다란 의미예요. 다할 진. 盡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盡力(진력), 燒盡(소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蝶은 (벌레 충)과 枼(葉의 약자, 잎사귀 엽)의 합자예요. 나뭇잎처럼 얇은 날개를 가진 곤충이란 의미예요. 나비 접. 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蝶翎(접령, 나비의 날개), 蝶兒(접아, 나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絶은 糸(실 사)와 刀(칼 도)와 卩(節의 약자, 마디 절)의 합자예요. 칼을 가지고 실을 잘라 길고 짧음을 조절한다는 의미예요. 끊을 절. 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絶交(절교), 謝絶(사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歸는 止(그칠 지)와 帚(婦의 약자, 아내 부)와 臣(신하 신) 중첩자가 합쳐진 거예요. 시집가다란 의미예요. 시집을 가는 것은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자신이 살 곳을 찾아 머무는 것이기에 止와 帚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臣의 중첩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시집을 가면 남편과 시부모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복종하듯, 복종하며 지내야 한다는 의미로요. 돌아갈(시집갈) 귀. 歸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歸家(귀가), 回歸(회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煙은 火(불 화)와 堧(빈터 연)의 합자예요. 연기란 의미예요. 火로 뜻을 표현했어요. 堧은 음을 담당해요. 연기 연. 煙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吸煙(흡연), 煙幕(연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왕탁은 명조(明朝)의 신하였다가 정복국인 청조(淸朝)에 출사한 부끄러움 때문에 평생 이[齒]를 드러내고 웃지 않았다고 해요. 이런 강한 자기 단속이 이 시에서도, 특히 말미의 두 구에서, 느껴져요. 이 시의 창작 연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이 느낌으로 추정해보면, 청조에 출사한 이후가 아닐까 싶어요. 사진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았는데 출처를 잊었어요. 글씨는 왕탁이 직접 쓴 글씨가 아니고, 정봉집(程峯集) 이란 분이 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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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변한 걸 보니, 죽을 날이 멀지 않았구먼.”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두고 농으로 하는 말이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인데 변했다는 것은 변고가 있을 징조고 변고의 마지막은 죽음이니, 농이긴 하지만 일정 부분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확실히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죠.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 없다고 그런 일반적 인식을 깨트리는 사람도 있죠.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일제 강점기하 유명한 독립 선언이 두 개 있어요. 기미독립선언조선혁명선언. 기미독립선언이 비폭력 무저항 정신에 기초를 둔 선언이라면 조선혁명선언은 이와 대척점에 있는 선언이죠. 상기 인용문은 조선혁명선언의 일부예요. 폭력과 저항이 왜 독립을 위해 필요한지를 극명하게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조선혁명선언기미독립선언과 다른 점은 독립을 넘어 혁명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에요. 독립 이후까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독립 이후의 조선은 만민이 평등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어요. 비록 일제강점기 하라 해도 왕조 체제를 벗어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이런 혁명적인 발상을 한 사람은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예요. 그가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죠. 비록 그가 경술국치(1910) 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당시 중국을 휩쓸던 여러 신사조를 접했으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해도 말이죠. 그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일반 인식을 깬 초인(超人)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사진은 단재 신채호가 북경에서 발행한 잡지천고(天鼓)에 실은 시예요(사진은 단재 생가에서 찍었어요). 천고(天鼓)조선혁명선언(1923) 두 해 전에 한문으로 발간된 잡지로, 항일 투쟁에 있어 중국과의 연합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독자를 겨냥하여 한문으로 발간된 잡지예요. 오래 발간되지는 못했어요(7호로 종간). 

  

천고송     하늘 북을 노래하다

  

吾知鼓天鼓者 오지고천고자    나는 아네, 하늘 북 치는 사람

其能기능애이노의    능히 슬프게도 분노케도 하지

哀聲悲怒聲壯 애성비노성장    슬픈 소린 구슬프고 노한 소린 장엄하여

二千萬人起 환이천만인기    이천만 동포를 큰 소리로 일깨우지

然決死心 내의연결사심    의연히 나라위해 죽을 결심케 하고

光祖宗復疆土 광조종복강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네

取盡夷島血來 취진이도혈래    섬 오랑캐 피 깡그리 긁어모아

於我天鼓 기흔어아천고    우리 하늘 북에 바르려 하지

  

북경에는 모종신고(暮鐘晨鼓)라 하여 아침에는 북소리로 새벽을 깨우고 저녁에는 종소리로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이 있었어요. 단재는 오랫동안 북경에 머물렀기에 이 소리에 익숙했을 거예요. 하여 새벽을 깨우는 장엄한 북소리에서 이 시를 착상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단재는 조선 민중의 항일 의식을 일깨우는 고수가 되기를 자임하고 있어요. 잡지 천고(天鼓)는 그 고수가 때려 낸 북소리인 셈이죠.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마지막 두 구예요. 이 구는 의례적인 적개심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무장 투쟁 의지를 표현한 것이거든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두 해 후에 작성된 조선혁명선언이죠. 다소 견강부회한 생각이지만 이 시의 여섯 째 구에는 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말했던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이 은연중 깔려있다고 보여요. 이 시를 단순히 항일 의식을 고취한 시로 보는 건 단견이고, 그의 의식 발전의 최고점이 발화된 시라고 보는 것이 정견일 듯싶어요.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는 북을 치는 모습을 그린 거예요. 는 북의 장식물, 는 북, 는 북 받침대, 는 손에 북채를 든 모습을 그린 거예요. 북 고.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鼓動(고동), 鼓吹(고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입 구)(옷 의)의 합자예요. 슬피 운다는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마음 심)(종 노)의 합자예요. 화가 났다는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종은 늘 불만이 있기에 화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요. 성낼 노.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憤怒(분노), 怒發大發(노발대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입 구)(클 환)의 합자예요. 큰 소리로 부르다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부를 환.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喚起(환기), 喚呼(환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불땔 찬)의 약자와 (술 유)(나눌 분)의 합자예요. 조왕신에게 희생(犧牲)의 피와 술을 올리며 제를 지낸다는 의미예요. 혹은 흔종(釁鐘, 새로 주조한 종의 균열 부분을 희생의 피를 칠해 메꾸는 일) 의식을 치르며 제를 지낸다는 의미로도 봐요. 피칠할 흔.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釁鐘(흔종), 釁端(흔단, 틈이 생기는 실마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기념식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언급했다가 보수층의 뭇매를 맞았죠. 비록 항일 운동의 한 주역이요 국군의 모태가 되는 광복군의 지도자였지만 월북한 인물이었기에 현충원에서 거론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주 이유였어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동족상잔을 겪었기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지도자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히 박한 것이 우리 현실이죠. 이는 단재 신채호에게서도 마찬가지예요. 그가 복권된 것은 1990년이 넘어서예요. 그간은 그가 이승만을 적대시했던 인물이고 사회주의 성향을 띈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점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죠. 어쩌면 지금도 온전히 복권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이들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통일 이후를 기다려야 할 거예요. 그 날을 위해 단재는 지하에서 여전히 천고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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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런다고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요?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TV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유명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알아주는 이도 없습니다.

 

하지만 감동이 있습니다.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게 됩니다.

세상이 더 아름다워 집니다.

 

태국에서 제작한 한 공익 광고 동영상에 등장하는 문구예요(약간 손질). 문구의 "매일 이런다고"는 이런 내용이에요. 낙숫물에 메마른 화분을 옮겨놓고, 구걸하는 모녀에게 작은 적선을 베풀고, 배고픈 개에게 소량의 음식을 나눠주고, 무거운 수레를 끄는 아주머니를 돕고, 좌석을 양보하고, 홀로 사는 할머니에게 바나나 몇 쪽을 드리는 일. 작은 배려들이죠. 광고는 이 작은 배려가 주는 의미와 가치 - 문구 하단 내용 - 를 감동적인 화면에 담아 전달해요(백문불여일견, 한 번 보셔요).

 

배려는 사실 귀찮은 일이죠. 내 앞가림 하기도 빠듯한데 타인까지 신경써야 하는 것이니. 그런데 맹자는 이런 배려가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요.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은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지금 느닷없이 어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다 깜짝 놀라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의 부모와 교제하고자 해서도 아니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 해서도 아니고,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도 아니다. 그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하는 것 뿐이다. 하니 측은한 마음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라 할 수 없고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맹자는 경험적 사실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는 배려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배려를 하지 않는 이들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거예요. 과격한 주장이긴 하지만 일리있는 주장이죠(여기 배려로 해석한 맹자의 언급은 사단(四端)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사양지심(辭讓之心)이에요).

 

맹자가 배려의 실천적 근거를 사람의 본성에서 찾았다면, 태국의 광고는 그 실천이 주는 효용성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어요. 맹자가 만일 태국의 광고 동영상을 본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아요.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나의 주장을 부드러움으로 보완했군. 여하튼 나의 성선설은 그대들의 광고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군. 귀찮을 수 있는 일을 하는데 기쁨 나아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진의 한자는 '배려(配慮)'라고 읽어요. '생각을 배당하다. 이리저리 신경을 쓰다'라는 뜻이죠. 물질이 풍요해지고 살기도 편해졌는데 이상하게 배려는 예전보다 훨씬 못한 것 같아요. 사진의 한자를 보며 왜 배려를 해야 하고 그 의미는 뭘까를 생각하다 맹자와 태국의 공익성 광고가 떠올라 둘을 약간 견강부회식으로 엮어 봤네요. 사진은 한 음식점에서 찍었는데, 하많은 문구 중에 왜 저 문구를 사용했을까 궁금하더군요. 어쩌면 저와 같은 생각때문에 사용한 것은 아닐지? 아니면 갑질하는 손님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잠시 사색을 하게 만든 재미있는(?) 물수건이었어요.

 

한자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술 주)의 약자와 (벼리 기) 약자의 합자예요. 술 빛깔이란 의미예요. 의 약자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의 약자는 음()을 담당해요. 지금은 '술 빛깔'이란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고, '나누다' '' 등의 뜻으로 사용해요. 이 뜻은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술 빛깔에 따라 술의 품질을 나누다, 혹은 그렇듯 인품의 고하를 판단하여 맞이한 배우자란 의미로요. 나눌 배. 짝 배.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分配(분배), 配匹(배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생각 사)(범 호) 약자의 합자예요. 깊이 생각한다는 의미예요. 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호랑이의 정연한 무늬처럼 질서정연하게 깊이 사고한다는 의미로요. 생각 려.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思慮(사려), 念慮(염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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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인형을 만들고 있어요. 최근에는 작업 및 전시실 비슷한 공간까지 마련했어요. 마련 과정에 하나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시 한 수를 지었어요. 한시로 지을 수도 있지만, 실력이 부족해, 충분한 마음을 전달하기 어려워 그냥 우리 말로 지었어요. 막상 짓고 보니 이게 시인지 산문인지 구분이 안되네요. 그러거나 저러거나 작은 액자로 만들어 아내에게 줬더니, 생각외로, 좋아하네요. (평소 데면데면하게 대한 것에 대한 역반응인 것 같기도 하고….) 임들의 눈을 한 번 더럽혀 볼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는지요?

 

 

아내의 人形 작품에 붙여

 

                                            

어느 날부터 아내가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너절한 천과 저저분한 실 보풀

나는 희꺼운 눈으로

그녀가 만드는 인형을 쳐다보았다

한달 두달 석달

너절한 천과 저저분한 실 보풀들은

조금씩 사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어릴 적 친했던 코흘리개 친구들

말 한 번 걸지 못했던 단발머리 소녀

늘 이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줌마

한 밤중 목이 말라

잠깨어 부엌에 가려는데

거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몸 숨기고 실눈 뜨고 바라보았다

철수는 자전거를 타고

영이는 쑥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아줌마는 볕이 좋다며 풀 먹인 광목천을 널고 계셨다

다음 날 나는 아내의 인형들을 다시 보았다

약간은 웃는 듯 약간은 부끄러운 듯한 모습 이었다

부스스한 얼굴로 밥 지러 나오는 아내를 보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 혹시 전생에 바느질하던 선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나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싱거운 눈으로 그녀의 인형들을

바라보기로, 아니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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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이병욱 2019-06-0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제가 장편을 집필하느라 소원했습니다. (현재도 집필중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님의 시를 보고 제 생각을 감히 적습니다. 줄을 바꾸지 말고 그냥 쓰는 산문시 형태가 적합할
내용입나다. 시를 쓰고자 하는 시심은 충분한데 표현은 아직 산문 느낌입니다. 더 줄이고 이미지가 떠오르는
시적표현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번에 또 책을 내심에 축하 드립니다. 책을 보내주신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디. 제 주소는 비밀댓글로 남기겠습니다.

2019-06-0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9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3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3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