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大道)가 사라지자 인의(仁義)가 나타났고, 지혜가 나오자 큰 거짓이 나타났다. 육친(六親)이 불화하자 효자(孝慈)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昏亂)함에 충신이 생겨났다[大道廢 有仁義 慧智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노자는 역설로 가득한 책이다. 위 구절도 그렇다. 우리가 아는 선한 가치들의 이면(裏面)을 보여 우리가 아는 선한 가치들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동아시아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유가가 양의 역할을 했다면, 도가는 음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치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보완적일 때 승화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사진의 한자는 '인증(認證)'이라고 읽는다. 인정하고 증명해준다는 뜻이다. 사고 발생 시 보험처리가 되는 제품이니 안심하고 들라는 의미로 붙였을 것이다. 소비자가 생산자를 신뢰하고 생산자가 소비자를 신뢰한다면 이런 인증 표시는 불필요할 것이다. 인증이라는 표식은, 역설적이게도,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신뢰는 곧 불신의 이면인 셈이다.

 

2000년도 훨씬 전에 노자는 이미 세속적 가치의 상대성을 간파했고, 그러한 세속적 가치로 인해 세상은 점점 더 혼탁해진다고 설파했다. 그의 간절한 바램은 그러한 상황이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었겠지만 세상은 그런 혼탁을 넘어 상호간 불신을 상품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노자가 저 표식을 본다면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닫지 못할 것 같다.

 

보험은 불안과 불신자신과 타인을 막론하고 -을 매개로 만들어진 상품이다. 돈이 주인인 세상이니 탓할 일도 무시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당연하다고만 받아들일 일도 아닌 것 같다. 보험이 없어도 괜찮은 세상, 그것이 진정 괜찮은 세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말씀 언)(참을 인)의 합자이다. 본래는 (칼날 인) 만으로 결합된 형태였다. 칼날에 베일까 조심하듯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삼가며 조심한다는 의미이다.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인정하다는 이런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인정이란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란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인정할 인.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是認(시인), 認可(인가) 등을 들 수 있겠다.

 

(말씀 언)(오를 등)의 합자이다. 실상을 올려(추가하여) 말한다는 의미이다.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증명하다는 이런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증명할 증.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證言(증언), 證人(증인) 등을 들 수 있겠다.

 

즐겨 시청하는 유투브 채널 닥터 U와 함께의 진행자 유태우 박사가 보험을 일체 들지 않았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정말일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많은 이들이 시청하는 채널에서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무보험에 대해 그것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더불어 이분이야 말로 노자를 강의할 자격이 있는 분이란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왠지 이분은 노자를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을 분일 것 같다. 채널에서 그런 흔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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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松之末].

성스러운 임금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에서 꿈틀대는 것과 같습니다[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세종 임금과 나눈 대화의 일절이다. 신동이란 소문이 자자해 세종이 불러다 시험 삼아 던진 말에 멋지게 응수했다. 세종은 후일 그를 중용(重用)하겠다고 약조했고, 이후 김시습의 별칭은 김오세(金五歲)가 됐다고 전한다.

 

일찍 문재(文才)를 드러낸 신동들의 이야기는 적지 않다. 사진의 시도 이런 신동중의 한 사람인 송대(宋代) 왕수(汪洙)가 지은 시중 한 대목이다(사진은 중국 음식점에서 찍었다).

 

詩酒琴棋客 시주금기객    나그네에겐 시와 술과 거문고와 바둑

風花雪月天 풍화설월천    하늘엔 바람과 꽃과 눈과 달

有名閑富貴 유명한부귀    명예가 있으니 부귀에 신경 쓸 일 없고

無事散神仙 무사산신선    일이 없으니 신선이 따로 없구나

 

왕수가 어릴 적 지은 시를 모은 시집으로 전해지는 신동시(神童詩)에 나오는 내용인데, 대구가 절묘하고 내용 또한 깊이가 있다. 왕수는 9세부터 시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시습을 따라 부른다면 왕구세(汪九歲)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왕수도 그의 문재를 현령에게 시험받았다. 공자의 사당이 퇴락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는데, 어린아이가 지었다기에는 믿기 어려워 불러다 시험을 한 것이다. 왜 이런 시를 지었냐고 물으니 현령께서도 사당을 보신다면 저와 똑같은 생각이 드시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단다. 기특한 대답인지라 칭찬을 하면서 다시 희롱성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왕수의 적삼이 몸에 맞지 않게 짧은 것을 보며 신동인데 어이하여 적삼은 그리도 짧은고. 나는 여직껏 짧은 적삼 입은 신동을 보지 못했노라.” 한 것이다. 왕수는 응구첩대(應口輒對)로 이런 시를 읊었다.

 

神童衫子短 신동삼자단    신동의 적삼 짧지만

袖大惹春風 수대야춘풍    소매는 드넓어 봄바람 일으키네

未去朝天子 미거조천자    천자를 뵙기 전

先來謁相公 선래알상공    상공[재상] 먼저 뵙는구나

 

현령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전한다. 화답의 내용이 절묘하거니와 질문한 현령을 재상에 비유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확실히 문재가 있었던 이이다.

 

부모라면 한 번 쯤 자신의 자녀가 신동이 아닐까 혹은 신동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헛된 기대란 것을 깨닫는다. 젊은 날 부모였을 때는 그것이 아쉬웠지만, 나이 먹은 부모가 되니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신동을 신동답게 키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 날 부모였을 적엔 내 주제도 모른 채 과도한 기대를 자녀에게 투영했던 것이다. 문득 왕수의 부모는 왕수를 어떻게 대했는지 궁금해진다.

 

, , 이 낯설다. 자세히 살펴보자.

 

(옷 의)(그릴 삼)의 합자이다. 옷이란 뜻이다. 적삼(윗도리에 입는 작고 짧은 옷)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옷에는 직조(織造)한 자국이 있기 마련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옷 삼. 적삼 삼.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長衫(장삼), 圓衫(원삼) 등을 들 수 있겠다.

 

(마음 심)(같을 약)의 합자이다. 어지럽다란 뜻이다. 으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한다. 지금은 주로 이끌다란 뜻으로 사용한다. 이끌 야.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惹起(야기), 惹鬧(야료) 등을 들 수 있겠다.

 

(말씀 언)(의 약자, 목마를 갈)의 합자이다. 아뢰다란 뜻이다. 으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아뢸 적에는 목마를 때 물을 찾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아뢸 알. 찾을 알.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謁見(알현), 拜謁(배알) 등을 들 수 있겠다.

 

신동시(神童詩)에는 도연명의 시도 들어있어 전편(全篇)이 왕수의 시는 아닌 것으로 본다. 왕수의 이름을 가탁한 초학자용 시집이란 것이 중론이다. 독서를 권장하고 자연을 즐기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왕수의 조숙한 문재를 드러낸 풍자시는 다음과 같다.

 

顔回夜夜觀星像 안회야야관성상    안회는 밤마다 별을 보고

夫子朝朝雨打頭 부자조조우타두    부자[공자]는 아침마다 비를 맞네

多少公卿從此出 다소공경종차출    높은 분들 모두가 이분들 문하거니

何人肯把俸錢修 하인긍파봉전수    어떤 이가 봉급타서 매만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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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비애감을 느껴!”

 

동료 교사 한 사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점수 확인을 하는데, 서답형 채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학생이 인상을 써가며 대들 듯이 채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만성화된 현상이건만 동료 교사는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 것 같았다. 비슷한 나이라서 그럴까, 나도 동조했다. “맞아! 정내미가 뚝뚝 떨어지지.”

 

채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 제기하는 태도이다. 채점이 잘못된 듯한 상황이 되면 순간 학생이 아닌 불만 가득한 고객으로 돌변한다.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 톤을 높인다.

 

학생만 탓할 현실이 아니란 걸 모르지 않는다. 내신으로 진학을 하니 성적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불만 가득한 고객이라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는 법이다. 더구나 고객 이전에 배우는 처지에 있는 학생 아닌가.

 

그러나 공염불이다. 교육 현장은 점점 더 이전투구의 시장판이 돼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애감이 느껴지고 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학생들은 뭘 배우고 교사들은 뭘 가르치는 걸까?

 

사진의 한자는, 탕화쿵푸(汤火功夫)라고 표기돼있는데, 앞부분[汤火]은 우리 발음으로 표기했고, 뒷부분[功夫]는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했다. 우리 발음으로만 표기한다면탕화공부라고 해야 하고, 중국어 발음으로만 표기한다면 탕후어쿵푸라고 해야 한다. ‘탕후어는 낯설고 쿵푸는 익숙하기에 반반 섞어서 표기한 듯하다. ‘뜨거운 물과 불로 공들여 만들어 낸 요리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쿵푸(功夫)’라는 단어이다. 학생들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듣는공부(工夫)’라는 단어의 중국어 발음도 이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국어에서는 발음이 동일하면 뜻도 상통해서 쓰기에 공부는 곧 쿵푸라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쿵푸는 단순히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암기하는 지식의 습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익히는 몸의 단련을 의미한다. 아울러 쿵푸를 익힐 적에는 혼자 수련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스승에게서 지도를 받는다. 스승은 몸의 단련을 완성한 사람이기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

 

이는 곧 공부와도 상통한다. 공부란 본디 성정(性情)을 조절하고 인격을 쌓는 몸의 단련을 의미한다. 지식의 습득이란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공부 역시 혼자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스승에게서 지도를 받는다. 스승은 성정을 조절하고 인격을 쌓은 사람이기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

 

목하(目下) 교육 현장이 시장판처럼 된 것은 공부의 본질을 망각하거나 곡해한 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의 습득과 평가는 공부의 본질이 아니고 수단일 뿐인데, 지금은 수단이 본질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그러니 교육 현장이 시장판처럼 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공부한다고 하지만 공부하지 않고 있고, 교사들은 공부시킨다고 하지만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침소봉대한 지나친 평가일까?

 

이 낯설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자.

 

의 간체자이다. (의 변형, 물 수)(볕 양)의 합자이다. 햇볕을 쬐면 뜨겁듯이 그처럼 온도가 높은 물이란 의미이다. 끓인 물 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溫湯(온탕), 沐浴湯(목욕탕) 등을 들 수 있겠다.

 

(장인 공, 본래 자[]를 그린 것으로 규준이나 법도의 의미를 내포)(힘 력)의 합자로, 국가가 요구하는 일정한 규준과 법도에 맞게 세운 업적이란 의미이다. 공 공.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功績(공적), 成功(성공) 등을 들 수 있겠다.

 

인성교육진흥법이란 것이 제정되어 학교 현장에서 의무적으로 인성 교육을 하게 되어 있다. 취지는 이해되나 교과와 인성 교육을 유리(遊離)시키고 별도로 인성 교육을 하라는 것은 옥상옥(屋上屋)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법의 제정없이 일상의 교과 활동에서 자연스럽게 인성 교육이 강화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점점 시장화되는 교육 현장에서 과연 그런 교육이 가능할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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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살던 동네 이름은 '과디'였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후일 이 말이 원래 '구아대(舊衙臺)' 라는 걸 알았다. 옛 관청 터라는 의미였다. 살던 곳의 지명 의미를 아는 순간 우리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동네 이름의 의미도 이해가 됐다. 그 동네는 '옥거리'라고 불렀는데, '옥'은 바로 '감옥'의 의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리지 않았다.

 

지명은 그 지역을 상징하는 표기이기에 의미가 담겨있다. '과디'는 아무래도 길지(吉地)의 의미가 짙고, '옥거리'는 아무래도 흉지(凶地)의 의미가 짙다. 그런데 한글 전용 매진후 지명에 스민 의미가 다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불필요한 차별이 사라졌으니 좋은 것도 같고, 의미가 사라진 채 단순 표기로만 사용되니 뭔가 허전하여 나쁜 것도 같기 때문이다.

 

사진의 한자는 '장(獐)'이라고 읽는다. '노루'란 뜻이다. 서산시의 외곽에 위치한 동네 이름이다(장동이라고 부른다). 서산에 거주하니 '장동'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장동'의 의미는 이 간판을 보고서야 알았다. 웃어야 할지, 허탈하다고해야 할지 살짝 헛갈렸다. 한자 지명이 대개 그렇듯 이곳도 원래는 한글 지명이었다가 한자 지명으로 바뀐 것 아닐까 싶다. 원래 이름은 '노룻골'이 아니었을까? 장동보다는 차라리 노룻골이 더 정겹고 의미도 있어보인다. 노루가 살던 곳이라니, 한가하고 외진 곳이란 의미가 아니겠는가. 장동은 한자로 표가하지 않는한(혹은 병기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저 어느 지역을 알리는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가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사진에 나와 있다시피, 이 로고를 사용하는 업체는 철물을 파는 곳인데 주인이 이 곳 토박이거나 이 곳에 애정이 많은 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이름 의미를 한자로 분명히 명시했다는 것은 마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읽을 수 있는 이들이 흔치 않을텐데도 말이다. 침소봉대한 생각일까?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獐은 견(犭, 개 견)과 章(문채 장)의 합자이다. 노루라는 뜻이다. 犭으로 뜻을 표했다. 章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외양이 사슴처럼 아름답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노루 장. 麞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麞은 鹿(사슴 록)과 章의 합자이다. 사슴과 유사한 외양을 지닌 아름다운 동물이란 의미이다. 보다 의미가 분명하다.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獐牙(장아, 노루의 어금니. 벼의 별칭), 獐香草(장향초, 마늘) 등을 들 수 있겠다.

 

한글 전용이 대세를 이루면서 마을 이름이 단순 표기로 전락되어 생긴 우스운 마을 이름들을 소개한다. 외지인들이야 그저 웃고 말겠지만 그곳에 사는 분들은 분통이 터질 것 같다(오래된 자료이다. 지금은 변경됐을수도 있다. 감안해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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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가곡으로 더 잘 알려진 이은상(1903-1982)의 봄처녀이다. 새봄의 미감을 싱그러운 모습의 아가씨로 환치하여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확실히 봄은 그런 면모가 있다. 그런데 싱그러운 아가씨가 간직한 아름다움은 멀리서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이지 가까이 바라보며 손에 닿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봄에는 그런 면모도 있다. 그것을 막연한 아름다움이라 이름 붙여 본다.

 

사진의 시는 이제현(李齊賢, 1288-1367)용야심춘(龍野尋春, 용야에서 봄을 찾다)이다.

 

偶到溪邊藉碧蕪(우도계변자벽무) 시냇가 이르러 봄풀 위에 앉았더니

春禽好事勸提壺(춘금호사권제호) 좋은 일 있다며 새들이 술 가져오라 하네

起來欲覓花開處(기래욕멱화개처) 일어나 꽃 핀 곳 찾으렸더니

度水幽香近却無(도수유향근각무) 물 건너온 그윽한 향 문득 사라지네

 

따스한 봄 날씨가 시인을 유혹했다. 집 밖을 나와 이리저리 거닐다 시냇가 풀밭 위에 앉았다. 그때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그런데 시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또 유혹의 소리로 들린다. “저를 따라오세요. 술 마시기 좋은 곳이 있어요. 꽃이 활짝 피었답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시인은 그곳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꽃을 찾을수록 꽃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시는 봄날의 따스함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묘한 아름다움을 그린 시이다. 앞서 말한 막연한 아름다움을 그린 시라고 할 수 있다. 딱딱한 정형시 속에 이토록 섬세한 미감을 담아냈다는 것이 놀랍다.

 


낯선 한자를 서너 자 자세히 살펴보자.

 

(걸을 착)(부터 자)(방위 방)의 합자이다. 자신이 있는데서[] 걸어가[] 어렵지 않게 이를 수 있는 곳[]이란 의미이다. 가 변.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川邊(천변), 周邊(주변) 등을 들 수 있겠다.

 

는 병의 모양을 그린 것이다. 윗부분은 뚜껑, 아랫부분은 몸체이다. 병 호.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投壺(투호), 壺中物(호중물, ) 등을 들 수 있겠다.

 

(손톱 조)(볼 견)의 합자이다.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파본다[]는 뜻이다. 구할 멱.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覓索(멱색, 찾음), 覓得(멱득, 구해 얻음) 등을 들 수 있겠다.

 

의 속자이다. (무릎 꿇을 절)(골 곡)의 합자이다. 뼈마디 사이의 간극이란 뜻이다. 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두 산 사이의 간극이란 의미로 본뜻인 뼈마디 사이의 간극이란 의미를 보충한다. 틈 각. 본뜻보다 물리치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물리칠 각. 본 시에서는 도리어란 뜻으로 사용됐는데, 동음을 빌미로 뜻을 빌어 쓴 것이다. 도리어 각.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退却(퇴각), 却下(각하) 등을 들 수 있겠다.

 

봄날을 노래한 것 중엔 희망 섞인 것도 많지만 아쉬움을 토로한 것도 많다. 얼핏 떠오르는 것이 익숙한 대중가요  봄날은 간다이다. 봄날이 아쉬운 것은 봄날이 갖는 저 막연한 아름다움과 상관성이 깊은 것 같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막연한 아름다움'은 얼마나 아쉬운, 아니 허망한 것인가! 봄날이 주는 그 아쉬움과 허망함의 아름다움 때문에 봄날의 인간사도 그러한 것 아닌가 싶다


사진은 아내가 받아놓은 어떤 분의 명함 후면에 있는 것을 찍은 것이다. 낙관에 있는 내용은 오른쪽의 전서체를 행서체로 바꾸어 다시 쓰고 쓴 분의 호와 이름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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