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오래!”     


쓸쓸히 그네를 타고 있는데주호가 와서 말했다짐작은 했지만더럭 겁이 났다.  쭈뼛쭈뼛 담임 선생님께 가 서자마자 선생님이 일갈했다.   

  

그게 뭐야이 새끼야!”    

 

원인은 나의 쓸데없는 의욕이었다공개수업을 하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내고― 산수였다 ―해볼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는데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들었다선생님은 의외였는지 즉시 시켰다그럴 만도 했다평소 못하던 아이가 공개수업 때 한다고 나섰으니.  

   

그런데 칠판 앞에 서니생각처럼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화가 나 분필을 던지듯 !’ 내려놓고 자리에 돌아와 엎드려 버렸다생각지 않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담임 선생님과 참관자들 모두 놀랐을 것이다  

   

선생님은 한바탕 화풀이를 하고 돌려보냈다. 오뉴월 한낮인데도 돌아오는 복도는 어두워 보였고 냉기조차 감도는 느낌이었다.


문득문득 오래전― 그렇다, 오래전이다. 47년 전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니 ―당시 기억이 난다.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그 선생님이 나를 위로해주며 많이 힘들었지해보려고 했는데 안돼서선생님도 많이 안타깝더구나그래도 그렇게 행동하는 건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옳지 않은 것 같구나.”라고 해주셨다면아마 나는 그 선생님을 평생의 은사로 모시고어쩌면 산수도 열심히 공부했을지 모르겠다나는 학창 시절 내내 산수(수학)를(을) 못했다그 이유가 전적으로 그 당시 경험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한몫은 했다고 생각한다많은 학생들이 수학을 잘 못한다학생들의 능력 탓도 있겠지만, 나는 수학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의 질책도 한몫했다는 편견을 굳게 믿고 있다.

     

사진의 한자는 '온정'이라고 읽는다(주점 간판이고군산에서 찍었다). 온정은 냉정의 반대말이다내 경험은 냉정의 경험이었다그런데 냉정의 경험이 내게 준 것은 아쉬움과 불쾌감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온정의 경험은 어떨까상반된, 만족과 유쾌함이 아닐까?

     

온정과 냉정을 생각할 때면 이솝 우화의 나그네 옷 벗기기 시합을 했던 햇볕과 바람 이야기가 떠오른다이긴 것은주지하는 것처럼햇볕이었다온정은 햇볕과 같은 뜨거운 관심이고 수용이며, 이는 상대로 하여금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고 믿는다. 반면 냉정은 바람과 같은 차가운 관심이고 내침이며, 이는 상대로 하여금 위축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다. 

    

과연 저 '온정'의 주점은, 상호와 같이, 진정한 온정을 베풀고 있을까왠지 한 번 누추한 차림으로 찾아가 번거롭게 하면서, 상호와 같은 온정을 지녔는지짓궂은 시험을 해보고 싶다시험을 통과한다면 내게는 평생 단골집이 될 것 같다(짓궂다. 내가 생각해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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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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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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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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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5: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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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라인을 넘지 말라!”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대해 강력 경고하고 나서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한 말이다. 자국의 군사 행동에 왈가왈부할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미국의 왈가왈부를 러시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곧바로 레드라인은 없다고 받아쳤지만 지난번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도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번에도 뚜렷한 대응을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국가 간에도 레드라인이 존재하지만 개인 간에도 레드라인이 존재한다. 그럴듯한 옛말로 바꿔 표현하면 ‘역린(逆鱗)’이다. 용은 본시 순하다. 그런데 용의 턱 밑에는 역방향의 비늘 하나가 존재한다. 이를 건드리면 순한 용은 더없이 포악한 존재로 변한다. 역린은 신하가 되면 제왕(帝王)의 약점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평범한 개인 간에도 소용될 내용이다. 최후의 보루인 자존심 혹은 약점을 건드릴 경우,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나는 ‘솔직(率直)’이 두렵다. 솔직하면 상대의 역린을 건드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로 인한 상대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아내와 말다툼을 하면서도 아내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려 인내한 것은 내 심성이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내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한자는‘솔담(率談)’이라고 읽는다.‘솔(率)’은 솔직하다는 뜻이고, ‘담(談)’은 말이란 뜻이니, 솔담은 솔직한 이야기란 뜻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솔까’가 되겠다. 장사하는 이의 솔직한 이야기란 믿을 것이 못되기에― 장사하는 이의 ‘솔직한 이야기’란 말 자체가 장사하는 이들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 저 상호의 의미는 ‘우리는 남보다 덜 속입니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는다’는 말이 있다. 모르면서 속는 거야 당연하기에 논할 것이 없지만, 알면서도 속는 것에는 상대의 솔직하지 못함을 굳이 탓하지 않고 넘어가는 유연함(?)이 엿보인다. 그런데 이 유연함에는 상대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할 ‘나약함’도 한  스푼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나약함’이란 표현이 적절치 않다면 ‘측은함’은 어떨까?     


나는‘솔직’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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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왔어요!”     



조나라의 예고된 공격에 전전긍긍하다 묵가 집단에 성의 수비를 의뢰한 양성의 성주. 그러나 간절한 양성 성주의 기대와 달리 묵가 집단에선 혁리 한 사람만이 양성을 찾을 거라 통보한다. 조나라의 공격이 목전에 다가온 날 혁리는 양성을 찾는다.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양성의 코앞에 이른 조나라 군대를 보고 혁리는 잠시 하늘을 쳐다본 뒤 햇빛을 등지고 조나라 군대 대장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그 화살이 자신을 향하는 줄 모른 채 밝은 햇빛 속에 날아오는 화살을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는 조나라 장군. 화살이 예기치 않게 자신의 투구에 맞자 방심했던 조나라 장군은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진다. 순간 조나라 군대는 술렁거리고, 예기를 꺾인 조나라 장군은 잠시 퇴각을 명한다. 영화 「묵공」의 첫 장면이다.     



전쟁하는 나라들의 시대, 세상을 풍미했던 묵가의 사상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겸애주의(兼愛主義)’였다. 좀 더 쉬운 말로 바꾼다면 박애와 평화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성의 수비를 맡거나 전쟁 자체를 무산시키는 유세를 펼쳤다.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던 약소국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메시아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풍미했던 묵가는 전쟁하는 나라들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영화 「묵공」의 마지막은 혁리가 조나라 군대를 물리쳤지만 양성 성주의 배신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이후 전쟁고아들을 데리고 양성을 떠나는 장면인데, 묵가 집단의 소멸을 오버랩시키는 장면이다. 강대국들이야 묵가의 사상을 옹호할 이유가 없고 약소국들도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묵가 사상을 옹호하여, 전쟁의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더구나 무력으로 ―묵가의 사상은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묵가의 사상은 태생적으로 소멸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겸애주의란 너무도 이상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금이 흔적 없이 사라져도 대상에 스며들어 그 맛이 지속되듯, 묵가의 사상 또한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의미는 이후 다른 사상들에 스며들어 지속됐다고 본다. 일례로, 유가의 이상인 ‘평천하(平天下)’ ‘대동(大同)’을 겸애주의와 완전히 분리시켜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진의 한자는‘박애(博愛) 화평(和平)’이라고 읽는다. 묵가 ‘겸애주의’의 다른 버전일 터이다. 베트남에 갔다 화상(華商)들의 모임 장소인 ‘광조회관’에서 저 문구를 본 적이 있는데, 사진의 간판 역시 화상들의 모임 장소에 붙인 간판이 아닐까 싶다(사진은 군산에서 찍었다). 상인들이 내건 박애와 화평이란 아무래도 그 의미가 본래의 취지에 부합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무자비하게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한 허름한 간판에서 소금물처럼 스며든 묵가의 사상을 읽는다. 묵가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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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공북루의 시문 편액>




아버지는 항상 주말이면 출타를 하셨다. 어디 가시냐고 여쭤보면 때로는 제천, 때로는 조치원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말마다 출타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속을 끓이셨지만, 어린 나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며 받는 용돈이 좋아 은근히(?) 아버지의 출타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대는 지명에 그다지 믿음이 없으셨던 것 같다. 종종 발견되는 아버지의 가방 속 마권(馬券)을 그 근거로 삼으셨다. 마권은 서울서 살 수는 있는 거지 제천이나 조치원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천이나 조치원에 아주 안 가신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곳의 건재 약방 달력을 가져오신 적도 있고, 그곳 건재 약방에 글씨를 써 준 적도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두 분 다 고인이 되신 지금, 난 이따금 어머니의 생전 속 끓임에 관계없이 아버지가 가셨다고 말씀하신 제천이나 조치원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혹여 그곳에서 아버지의 빛바랜 글씨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을 읽으며 아버지의 속 뜰을 한번 되짚어 보고 싶다. 그리고 이런 질문도 드리고 싶다. ‘아버지, 왜 무슨 이유로 그렇게 어머니에게 무심하시고 가정을 등한시하셨던 것인지요?’ 아버지의 글씨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와 만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

 


사진은 공주 공산성 공북루(拱北樓)에 걸린 시문 편액이다.

 

  

鷄嶽秋雲傍馬頭 계악추운방마두    계룡산 가을 구름 말머리 곁에서 피어나는데

 

偶携旌節到雄州 우휴정절도웅주    정절(행차 앞의 깃발)따라 웅주[공주]에 이르렀네

 

南巡王氣今雙樹 남순왕기금쌍수    남순(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가 한양에서 공주에 온 일)했던 임금의 기

 

                                                   운은 쌍수(인조가 기대어 쉬었다는 두 그루 나무)에 어려있고

 

北望臣心此一樓 북망신심차일루    북망(임금이 계신 곳을 생각함)의 신심은 이 공북루에 어려있어라

 

逈枕漫漫長路走 형침만만장로주    아득히 달려온 먼 길을 바라보다

 

平臨滾滾大江流 평림곤곤대강류    누각 앞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

 

酒酣落筆酬前債 주감낙필수전채    취기 올라 붓을 들고 그대의 시에 화답하노니

 

奇絶男兒特地遊 기절남아특지유    멋진 사내가 특별한 곳에서 놀았도다

 

歲丙子仲秋 세병자중추    병자년 중추에

 

觀察使 洪受疇 관찰사 홍수주       관찰사 홍수주 읊다

 

  

홍수주(1642-1704)는 충청 관찰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충청 관찰사 감영이 공주에 있었으니, 이 시는 관찰사로 공주에 부임한 후 공북루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해 지은 시로 보인다. 공주로 오는 과정[1, 2], 공주에 도착해 느끼는 정서[3, 4], 공북루에서 바라본 풍경[5, 6], 그리고 시를 짓게 된 경위[7, 8]를 읊고 있다. 이 시의 핵심은 5, 6구의 공북루에서 바라본 풍경이다(누정이란 본시 풍경 감상에 주안을 둔 건물이기 때문). 강 건너 자신이 지나온 먼 길과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렸다.



<홍수주가 공북루에서 봐라 봤을 금강 전경(前景) >



그런데 사실 이 시는 그리 대단한 시가 아니다. 핵심이 되는 시구도, 위에서 칭찬하는 듯한 말을 했지만, 누정시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시구이다. 그렇다면 이 시문 현판은 무의미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건물[공북루]을 찾는 이들에게는 이 시문 현판의 존재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싶다. 300여 년 전 이 건물에서 지어진 시를 300여 년 뒤에 이곳을 방문한 이가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은 시의 가치 유무를 떠나 매우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예와 이제를 연결하는 타임머신격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문을 읽으며 당시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을 견줘보고 지은이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을 함께 헤아려 본다면 그 특별함은 더욱 특별해질 것이다. 이 시문 현판이 없다면 공북루는 그저 옛 모습을 지닌 건물에 불과할 터이다.

 

  

우리 문화유산엔 기록 문화유산이 많다. 서책류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에도 기록이 있다(현판이나 주련 또는 편액 등). 문제는 이 기록 유산들이 대부분 한자로 쓰여졌고 여기다 한자 교육을 경시하다 보니 이 유산들을 많은 이들이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의미 이해는 차치하고). 읽지 못하는 기록 문화유산은 없는 것과 진배없다. 미국은 나라의 역사가 짧아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들도 보존하려 애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반면 우리는 멀쩡한 문화유산도 읽지 못해 사장시키고 있는 형편이니, 이건 조금 아니 많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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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 하나 주세요!"


주말과 일요일 아침 겸 점심은 꼭 외식을 한다. 산에 갔다 오는 길에 아침 겸 점심을 사 먹고 집에 들어가는 것. 그런데 함밥이 아니고 혼밥이다. 아내와 동행을 하려면 아침 등산 시간이 늦어져― 뭘 그리 준비하는지 ―언제부턴가 혼자 등산을 하다 보니  혼밥이 됐다. 한동안은 집에 들어와 먹은 적도 있는데, 아내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혼밥 외식을 하게 됐다. 혼밥인지라 메뉴는 단순하다. 순대국밥 아니면 육개장인데, 최근엔 육개장을 즐겨 먹는다.  


사진은 즐겨 찾는 육개장집 상호를 찍은 것이다. 이화수(怡和秀). 조어(造語)인데, 정치 깡패 이름[임화수(林和秀)]과 유사한  재미있는 상호이다(첫 글자만 다를 뿐, 나머지 글자는 발음도 한자도 동일하다). 육개장은 아무래도 중년층이 즐겨 찾는 메뉴인만큼 정치 깡패 임화수를 아는 중년층을 겨냥하면서 작위적 의미를 부여해 만든 상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작위적 의미가 그럴듯하다. 기쁨과 즐거움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곳. '기쁘고 즐겁게 좋은 음식을 먹는 곳'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이름만으로 보면 이곳은 혼밥보다는 함밥에 어울리는 곳이다. 그런데 이름과 달리 이곳엔 나처럼 혼밥을 먹는 이들이 꽤 눈에 띈다. 밥을 먹으며 이따금 그들을 살짝 쳐다보는데, 얼굴에 그늘이 져있다. 저들도 나를 본다면 내가 본 그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보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혼밥은…. 


한자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자. 


怡는 忄(心의 변형, 마음 심)과 台(기쁠 이)의 합자이다. 기뻐하다란 의미이다. 忄으로 뜻을 표현했다. 台는 음과 뜻을 담당한다. 台는 怡의 원형이다. 본래 台로 사용하다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忄이 추가되었다. 기쁠 이. 怡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怡豫(이예, 기쁘게 놂), 怡怡(이이, 기뻐하는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다. 


和는 口(입 구)와 禾(벼 화)의 합자이다. 마음이 잘 맞아 상호 간에 말이 잘 통한다는 의미이다. 口로 뜻을 표현했다. 禾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벼이삭이 잘 익어 아래로 늘어진 모양을 그린 것이 禾인데, 여기에는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이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화합할 화. 和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和合(화합), 和睦(화목) 등을 들 수 있겠다. 


秀는 禾(벼 화)와 乃(仍의 약자, 당길 잉)의 합자이다. 벼에서 당겨 나온 것, 즉 이삭이란 의미이다. 이삭 수. '당겨 나왔다'란 본뜻에서 '빼어나다'란 의미가 연역되어 '빼어나다'란 의미로도 사용한다. 빼어날 수. 秀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俊秀(준수), 秀作(수작)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민락(與民樂)'이라는 전통음악이 있다. 사신의 연향이나 임금의 거동 때 행악(行樂)으로 사용되던 음악인데, '여민락'은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긴다란 의미이다. 이는『맹자』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무릇 즐거운 것은 (왕) 혼자 즐기는 것보다 (백성과) 함께 즐기는 것이 더 낫다란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일상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맹자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것이 이런 경험을 반영한 말 아니겠는가.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 중의 하나가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이 보다더 즐거우려면 아무래도 혼밥보다는 함밥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앞으로는 아내의 치장을 기다리는 인내심을 길러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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