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씨의 '길없는 길'이란 소설을 읽으신 적 있으신지요? 근대 불교 중흥조로 알려진 경허(鏡虛) 스님의 이야기인데, 전 아쉽게도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어요. 재미를 추구하는 저같이 얄팍한 독자에겐 쉽지 않은 소설이더군요. 그래도 소득은 있었어요. 경허라는 이름자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이 제가 사는 지역에 주석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오지로 통하는 이 지역에 -- 물론 지금은 아니지요 ^ ^ -- 그런 훌륭한 선승이 계셨다는 것을 알고 제가 사는 지역에 자부심도 갖게 되었구요.
지난 시간에 만공 스님 얘기를 한다고 했는데, 만공 스님은 바로 경허 스님의 제자에요. 오늘은 만공 스님이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계셨던 한 암자의 현판을 보도록 하죠. 바로 看月庵(간월암)이에요. 看은 볼간, 月은 달월, 庵은 암자암이죠. 이 현판의 글씨는 만공 스님께서 직접 쓰신거에요. 지난 시간에 본 부석사의 글씨와 유사한 필력을 볼 수 있죠? 看月은 '달을 보다'란 뜻이에요. 좀 더 풀이하면 '달을 보고 깨우치다'란 의미에요. 여말선초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던 중 달을 보고 득도한데서 유래한 이름이죠. 이런 점에서 간월암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려면 달밤에 와야 할 것 같아요 ^ ^ 만공스님은 퇴락한 看月庵을 그의 제자인 혜암 스님을 시켜 정비했다고 해요. 아마 그 기념으로 현판을 쓰신 것 같아요.
看月庵 밑에 있는 현판은 念弓門(염궁문)이라고 읽어요. 행서체로 쓴 것이죠. 이 글씨는 만공 스님의 스승인 경허 선사가 쓴 거에요. 念은 생각념, 弓은 활궁, 門은 문문이죠. 의미 해독이 잘 안돼 인터넷을 찾아 보니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더군요.
“생각의 화살을 쏘는 문”이란 뜻의 염궁문은 번뇌 망상을 화살에 실어 날려 보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래 지닌 청정한 마음 자리를 찾아 일대사를 이루려는 납자들의 정진을 독려한 말이다. (인용 출처: 불교신문 2392호)
현판의 의미로 보면 -- 念弓과 看月 -- 이 암자는 깨달음의 열망이 자글거리는 장소라는 느낌이 훅~ 전해져요.
자, 이제 한자를 자세히 알아 볼까요? 지난 번에 다룬 月과 門은 빼도록 하죠 ^ ^
看은 手(손수)와 目(눈목)을 결합한 자에요. 눈 위에 손을 얹고 멀리 바라본다란 의미지요. 看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看守(간수) 看護師(간호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庵은 广(집엄)과 奄(가릴엄)의 합자에요. 풀로 지붕을 덮은[奄] 작은 집[广]이란 의미지요. 奄은 음도 담당하는데 음가가 약간 바뀌었지요. 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庵子(암자)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念은 今(이제금)과 心(마음심)의 합자에요. 지나간 과거도 말고 불확실한 미래도 말고 현재[今]에 집중하여 사고하라[心]는 의미의 글자지요. 今은 음도 담당하는데, 소리값이 많이 바뀌었죠. 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想念(상념), 默念(묵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弓은 활줄을 풀어 놓은 상태의 활을 그린 거에요. 弓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名弓(명궁), 洋弓(양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정리할 겸 문제를 한 번 풀어 보실까요?
1. 다음에 해당하는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볼간, 암자암, 생각념, 활궁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 )子, ( )護師, 默( ), 洋( )
3. 다음을 행서체로 손바닥에 써 보시오.
念弓門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경허- 만공 - 혜암 스님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어 잠깐 소개해요. 심심할 때 읽어 보시죠 ^ ^ 인용 출처 : 불교신문 3047호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스님은 전국 각 사찰을 다니며 선원을 잇따라 개원해 눈 푸른 납자들의 안목을 열었다. 스님의 제자로는 혜월(慧月)스님, 수월(水月)스님, 만공(滿空)스님, 한암(漢岩)스님 등이 있다. 경허스님은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불교의 쇠퇴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무애자재한 법력으로 선풍을 일으켜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 스님은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스님은 스승인 경허스님의 선지를 계승해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만공스님은 덕숭산에 금선대를 짓고 수년 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지도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선학원을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을 역임하고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선우공제회운동도 펼쳤다. 만공스님의 일제에 대한 저항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미나미 조선총독이 “데라우치 전 총독이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말하자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승려를 본받아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며 총독부 종교정책의 정곡을 찌른 호령을 했다고 전한다.
덕숭총림 초대 방장 혜암현문(慧庵玄門, 1884∼1985)스님은 1929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을 받은 뒤에도 무섭도록 철저한 정진을 했던 선지식이다. 1943년 만공스님과 간월도로 가는 배 위에서 나눈 법담은 유명하다. 그 자리에서 만공스님은 혜암스님에게 “저 산이 가는가? 이 배가 가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혜암스님은 “산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이 “그러면 무엇이 가는가”라고 묻자 손수건을 말없이 들어 보였다. 이에 만공은 ”자네 살림살이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며 인가해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