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 철학의 문을 여는 열쇠
체이스 렌 지음, 서상복 옮김 / 연암서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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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찬 내용, 깔끔한 구성, 균형잡힌 서술을 통해 읽는 재미와 지적인 소득 양자를 가져다주는 탁월한 개론서이지만, 주제 자체의 난이도와 곧이곧대로의 직역 문제로 인해 적당량의 선지식을 갖추고 있거나 아니면 강한 흥미를 지닌 독자층에게만 추천될 법한 학술서이기도 하다 책 전체를 통틀어 20세기 분석철학 전통에서 논의되어온 진리론들을 살펴보는데, 초입에 앞으로 다룰 문제의 성격과 구체적인 논의방식을 분명히 밝히고, 연후에 정합론 및 실용론 대응론 수축론 다원론 등을 앞서 설정된 논의 틀에 따라 해설 및 평가하는바, 통일적이고 명료한 구조가 우선 돋보인다 각 입론들을 가능한 한 비형식적 언어로 평이하고 간명하게 제시하되, 해설적 논증적 평가적 서술방식들을 적당한 호흡으로 배분함으로써 읽는 몰입도와 전달력을 제고하고, 다소 공인된 혹은 저자 나름의 문제 및 해결책을 제언하는 등 균형잡힌 시각도 시종 잃지 않는다 이렇게 얇은 책을 이렇듯 기교적이고 다채로우면서 학술적 교육적으로도 알뜰하게 저술해낼 수 있다니, 저자가 교육자로서 무척 탁월한 인물일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진리론만을 배타적으로 다루는 한국어 단행본으로는 거의 유잉하다는 희소성 및 2차대전 후 20세기 후반부에 대두된 비교적 동시대의 관점들을 아우른다는 최신성을 갖췄다는 점도 부차적인 장점이다 디자인도 미니멀하면서 적당히 이쁘게 잘 뽑혔다

다만 주제 자체가 특수하고 전문적이어서 진입장벽이 높은데다 논리철학 인식론 형이상학 언어철학 등 이론철학 분야와 논의가 거듭 연관되다보니, 철학과 학부생 2, 3학년 정도의 숙달 수준을 갖춘 게 아닌 바에야 일반적인 독자층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적잖이 망설여진다 내용이 어려워도 스타일이 탁월하니 강한 흥미만으로 끈질기게 븥든다면야 혹여 얻어내는 바가 있겠으나, 이 경우엔 번역이 발목을 잡을 듯하다 뭔소린지 못알아먹겠는 불성실하고 엉망인 직역은 결코 아니고, 반대로 원문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이 역력한 성실하고 정직한 스타일의 직역인데, 그러한 충실함이 외려 역효과로 이어진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좀 더 타협해서 어순이나 어휘를 과감히 바꾸었다면 훨씬 매끄럽게 읽히겠다 싶은 문장들이 많았고, 그 문장들을 배경지식 없이 읽는다면 그런 차이를 눈치채기가 어렵겠지 싶었다

그러니 구매소장 여부는 빌려서라도 일별해본 뒤 본인의 여건에 비추어 스스로 판단해야 할 사안이겠다 개인적으로는 막연하게 언어적으로만 알던 대응론과 수축론의 입론 및 문제점을 좀 더 논증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진리의 가치 내지 평가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었으며, 명칭만 들어놨던 진리-결정자 이론 및 명칭도 모르던 진리 다원론 진영을 새로이 알게 되어 여러 모로 소득이 큰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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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중대 막사에서 훈련장으로 가는 길엔 설구화가 피어있었다

작년 이맘 즈음 훈련기간 중의 어느 날엔 하루 하달된 전술훈련을 마치고 중대원들과 막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 꽃뭉치들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봄날 넘어가는 서녘 황혼이 꽃뭉치 건너편 연못에 윤슬로 부시었다

ㅡ1학년 시절 동양철학의 첫걸음 과제로 동네 어느 가정집 담장 안에 피었던 설구화인지 불두화인지도 모르는 꽃을 찍어 제출했었다

그 때 찍기가 이맘 때 즈음이었는지, 요사이 아침 등교길마다 보는 그 집 담장에 핀 꽃의 이름은, 아직도 설구화인지 불두화인지 모르겠다

그때도 알아내지 못했고 지금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그 꽃의 이름은 어느 가능세계에서든 필연적으로 그 이름으로 불릴텐데ㅡ

ㅡ그 해 벚꽃잎을 세던 일을 멈추어야 했으나 이제 와서 멈춘들 피차에 새로운 얼굴이란 피지 않을 터이니, 결국 내가 할 일은 모든 것을 다시 선언하는 일이다

그러면 여기 내가 호흡하는 세계에서 당신의 이름이 설구화인지 불두화인지 것도 아니면 다른 꽃인지 알아내려는 일을 이젠 포기해야겠다

당신의 호흡이 나의 허벅지에 펼쳐놓은 그 악보를 연주하는 일의 지난함을, 나는 깨닫는 게 아니라 선언하고자 한다

ㅡ나는 다른 이의 눈동자를 불러본 적이 없다

아직도 내 허벅지에 피어있는 음들의 이름을, 내가 부를 수 있었던 적도 없다

ㅡ내일 아침에도 나는 내가 보는 꽃이 설구화인지 불두화인지 모를 것이고, 이 셰계에서 올해 피었다 진 모든 벚꽃잎이 몇 장인지 여전히 모를 것이다

- ‘19. x.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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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자는 초월함으로써 지양되지만, 우리는 이 유한자의 피안에서 다시 동일한 유한자를 만난다 이것은 단초를 이루었던 그것에 도달한, 그 자체가 동결되는 완전한 운동이다 유한자가 다시 생산된다 동일한 것이 그에 따라 자신과 일치해 버렸고, 자기의 피안에서 자기만을 재발견한 것이다˝

- 니콜라이 하르트만, 독일 관년론 철학

헤겔이 현대인에게 넘겨준 감정은, 신이 떠나버린 세계에서의 신적인 고독이 전부이다(˝나는 존재한다˝고 발화한 신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신이 자신을 비춰보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실존이 그 바닷물을 다 마셔버린바 썩고 메말라진 그 세계이다 에덴을 운행하던 그가 아담의 갈비뼈를 눈물로 취했다면, 심지어 그 갈비뼈에서 갈라난 우린 정작 그의 지혜를 한줄기 베어문 그 죄많은 울음을 누구한테 건네줘야 할까 철학적 역사가 참말 이럴진대 니체가 현대인에게 남겨준 감정은, 신의 말씀을 거꾸로 비춰주는 광자의 거울을 깨어 자기 살을 그어보는 경험주의자의 처참한 용기가 전부이다(˝신은 죽었다˝고 발화한 피조물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신도 나도 너도 그 많은 바닷물을 마셔버린 혐의가 없는데도, 그 많은 설사똥과 토사물은 대체 누가 싸질러댔을까

악마의 음부가 자신의 내장과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그것이 울어야 한다 그 울음을 모르기에 이렇게 허다한 논증들이다 울지 않는 종교인은 뭔갈 살해하고, 우는 경험주의자는 돈을 참 잘 번다 둘 다를 제 변두리에 놓고 금 그어둔 미친놈들은 철학책 읽다 혼자 뒤진다 신의 뜻도 아니고 바다의 뜻도 아닌 우리네 도시 별빛이 자주 사무쳐서 나는 역사도 부모도 없이 축축하게 썩어가는 가을밤, 아주 못된 놈일 뿐인데 말만 많이 배운 것이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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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은 혼자있을 줄 모를 때 불행해진다 신은 불행하지 않다 따라서 신은 사람이 아니거나 혼자있을 줄 모르지 않다 정의상 신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은 혼자있을 줄 아는가 모르는가? 논증은 타당한데 결론의 선언지 중 전자는 이미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후자의 진리치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신은 고독을 느끼는가?

2.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신의 정의상 속성은 몇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그의 속성은 매우 많을 거다 그에 대해 최대한을 긍정해준 이는 스피노자이다 그 최대한을 준거삼아 우리의 무지를 경계지어준 이는 비트겐슈타인이다

3. ‘형이상학적 악‘이라는 개념은 들어보고 배워본 바 있는데 ‘형이상학적 불행‘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1에서 두 번째 전제는, 구문론적으로(어쩌면 의미론적으로도) 아무 문제 없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부적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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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납은 확증도 개념에 대한 실질적 설명을 의미론적으로 제시하였다 확증도 개념은, 임의의 대상언어 문장 h와 e를 논항으로 취하여, 그 한 쌍의 문장으로부터 0과 1 사이의 값이 사상되는 2항 메타언어적 함수인 c(h, e)로서 도입되는바, 가설 h가 근거 e에 토대했을 때 갖는 확증도의 산출값은 ‘c(h, e)=r‘로 표기된다 귀납논리적 문장 자체와, 구체적인 앎의 상황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일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문장 h가 실제로 적법한 가설을 서술하고 문장 e가 참인 경험적 지식을 표현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귀납논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대한 적용의 문제에 속한다˝

- v. 스테그뮐러, 현대 경험주의와 분석철학

예전에는 ˝논리는 논리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인간 실격˝의 한 구절을 혐오했었다 카르납 같이 똑똑하고 냉철한 사람도 그런 내포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마당에, 연금복권 한 번 안맞았다고 풀죽은 멍청이가 함부로 혐오하기에는 참 큰 말이었다 로또번호의 확증도를 어떠한 귀납적 함수체계를 이용해 사상시키는지는 몰라도, 뛔잉 하고 울리는 당첨번호 계산기 어플 알림을 보고는 노오란 각종 세금 지로서나 내가 과속해서 날아온 과태료 고지서 등지에 당첨번호를 메모했다가 복권방에 들고가 고개 멀리 눈 찡그리며 번호를 마킹해서 복권을 사는 엄마의 옆얼굴은, 답해질 수 있는 모든 문제가 과학적으로 대답되더라도 삶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거라 말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가구도 몇 안 되는 방에서 살았던 그가 생각한 삶의 문제란 것은, 당첨금으로 존나 큰 냉장고랑 김치냉장고 한 두 대 사서 반찬걱정 쉰김치 걱정 없이 살자는 엄마가 생각한 삶의 문제보다 과연 컸을까 작았을까 궁금하다 노르웨이 통나무집에서도 켐브리지에 복귀해서도 콩요리 통조림만 먹고 살아도 별 문제될 게 없다 생각한 비트처럼, 엄마가 볶아놓고 데쳐놓고 무쳐놓은 매일 같은 밑반찬만 먹어도 하냥 질릴 일 없다 생각하는 나의 삶의 문제는 또 어떠할까 궁금하다 세상에 나만 남고 아무도 없어지는 L-공간 집합이 주어지면 ˝세상 모든 맛있는 음식의 맛은 신이 보내신 엄마들의 수 만큼이나 많다˝는 보편 양화문은 L-거짓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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