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재: 과학철학 입문
피터 고프리스미스 지음, 한상기 옮김 / 서광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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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수하게 내용 측면에서는 원서에 대한 평가와 차별되게 할 말이 없지만 조잡하고 성급해보이는 직역 및 오역들이 매끄러운 이해를 상당히 방해하기에, 이 책 고유의 특성을 전략적이고 능숙하게 활용할 계제가 아닌 바에야 통상적인 독자층에게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역본이다. 다뤄지는 주제 자체의 난이도를 차치하자면, 원서는 평이하고 깔끔한 문체로 쓰여서 글을 읽는 일 자체는 분명 괴롭지 않았다. 일부러 원서를 읽은 후 바로 이 역본을 읽어보았는데, 원문이 아무리 말끔하더라도 다른 언어로 조잡하게 직역될 경우 글의 질과 전달력이 상당히 저하될 수 있음을 몸소 확인한 독서가 되었을 뿐이다. 


2. 직역으로 인한 번잡함 뿐만 아니라 오역의 문제도 간혹 눈에 띄었다. 부러 의식적으로 세세히 비교해보며 읽은 게 아닌데도, 잘못된 번역이 맥락에 따라서는 현저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가령 다음을 보자:


   콰인이 유명한 은유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이론이 "법인체로서의 … 감각 경험의 법정에 직면한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74-5쪽)


콰인 철학을 알고 있다면 바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바로 원문을 확인해보았다:


  Quine said in a famous metaphor, that our theories "face the tribunal of sense-data … as a corporate body". (32쪽)


"as a corporate body"라는 구가 수식하는 표현은 "sense-data"가 아니라 "our theories"이다. 콰인식 전체론에 따르면 "감각경험의 법정"에 출두하여 판결받아야 하는 대상은 이론을 구성하는 개별 부분이나 명제가 아니라 "법인체로서의" 이론 전체이다. 굳이 콰인철학을 모르더라도, 위 번역문은 은유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게끔 번역되었다고 여겨진다. 어떤 "법인체"로서의 "법정"이라는 은유는 이상하다. 우리는 보통 법정을 '법인체'라 칭하지는 않는다.

 쿤에 관한 장에서도 눈에 띄는 오역이 있었다:


  과학자들에 의해 자연에 집어넣도록 강요된 "개념 상자들"  에 대한 쿤의 끈임없는 강조. (154쪽)


오래 전 쿤의 "구조"를 읽다 퍽 인상깊어서 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구절이기에, 사소하지만 잘못된 번역임을 바로 식별할 수 있었다. 원문은 이렇다:


  "Kuhn's constant emphasis on (中略) "the conceptual boxes" that nature gets forced into by scientists  (79쪽)


까치글방에서 나온 역본(김명자 譯, 1999, 초판. 내가 알기로는 이 역본도 번역이 좋지 않기로 악명이 높긴 하지만)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자연을 전문 교육에 의해서 제공된 개념의 상자들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격렬하고 헌신적인 시도 (26쪽, '서론: 역사의 역할')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짜여지고 상당히 고정된 상자 속으로 자연을 밀어넣은 시도 (50쪽, '3장, 정상과학의 성격')


"that nature gets forced into"가 "the conceptual boxes"를 수식하는데, 마지막 전치사 "into"에서 알 수 있듯이 "개념 상자"에 "자연"이 "집어넣"어지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굳이 1차문헌을 읽어본 게 아니더라도, 번역문은 은유로서도 무의미하게 번역된 것처럼 여겨진다. 과학자들이 "개념 상자들"을 "자연에 집어넣"는다는 은유는 기이하다. 보통은 '상자에 무언가를 집어넣는다'라고 말해지지 '상자를 무언가에 밀어넣는다'고 말해지진 않는다.


3. 입문자라면 전체론 논의나 쿤의 정상과학 개념에 관한 논의를 어떻게든 따라가다가도, 이런 기이한 문장들을 마주치면 주춤할 것이다. 그냥 은유적인 맥락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원문은 명료한데도) 책 전체가 이런 식으로 번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투로 직역 및 오역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념 상자들" 사례의 경우 한참 나중의 316쪽에서는 어째 "우리는 자연을 "상자들"에 "강제로 넣으려" 하지만, 자연은 저항한다."와 같이 제대로 번역되어 있다. 이로 미뤄보건대 초벌 번역만 한 뒤, 시간 탓인지 다른 이유 탓인지 세세한 검토나 교열을 거치지 못한 채로 급하게 출간된 듯하다. 허나 출판과정에 무슨 사정이 있었든 그것은 독자가 용인해줘야 할 사안이 아니다. 논문이든 단행본이든 여하한 산업전반이든, 학자와 전문가들이 여유 있는 호흡으로 책입감 있게 양질의 결과물들을 도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여하간 초두에 말했듯 번역 문제를 감내하고서라도 이 책 고유의 특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게 아닌 바에야, 여타 과학철학책을 읽거나 아니면 굳이 이 책이어야 한다면 과감하게 원서를 선택하길 권하고 싶다. 이 역본을 일별이나마 해보기로 결정했다면 구매하지 말고 빌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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