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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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첫장과 막장에 적어놓은 구매일자가 작년 팔월 말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고 충만되어 있던 시기였다. 처음 삼십 쪽 가량을 읽다 재미없어 포기했었다. 일 년이 훌쩍 지나고, 읽다 중단한 책들을 다시 정주행하던 중 이 책도 다시 펼쳐들었다. 재미가 없는 건 작년이나 매한가지였지만, 근래 마냥 우울하고 무의미하고 외롭게 여겨지는 시간들을 보내던 참이어서였는지, 느끼는 바가 있고 울림이 나는 구석이 있어 인상깊은 귀절마다 책장 모서리들 군데군데 접어가며 완독할 수가 있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한 말들을 그저 이야기 형태로 풀어냈다는 인상을 계속 받긴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는 것도 간혹은 해볼 만한 소일거리다. 서른셋 사르트르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도시 이곳저곳을 다니며 도서관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자신의 방에서 써내려갔을 이 이야기를, 서른셋의 나는 카페에 앉아 생크림 잔뜩 올린 카페모카를 마시며 본가 내 방에 틀어박혀 우유에 탄 믹스커피를 마시며 자취방 탁자에 팔꿈치를 걸치고는 편의점에서 두 병에 만 이천 원 하는 싸구려 와인을 홀짝이며, 읽어갔다. 구토감은 느껴지지 않고, 다만 아침 거른 오전 빈속에 먹은 커피 탓에 자꾸 설사를 했다. 내가 사르트르였으면 제목을 '구토'가 아니라 '설사'로 지었을 거라. 이러든저러든 적나라한 존재를 구토로 게워낼 수도 설사로 싸질러낼 수도 없겠을 것이니, 나는 그저 여행도 모험도 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열심히 뭘 적어대지도 않고 정치적인 일에는 일체 관심도 갖지 않고 여하한 형태의 공적 사회적인 참여활동일랑 크든 작든 일절 않고 가족이든 연인이든 벗이든 누구를 만나러 멀리 뭘 타고 돌아다니지도 않고 그 아무와도 몸이든 마음이든 섞지 않은 채, 카페에서 내방에서 어디 다른 데에서 책읽고 마시고 설사하고 책읽고 마시고 설사하다 때 되면 갈 것이다ㅡ그것도 실존의 한 방식일 수 있다는 게 다 읽고 난 결론이었다. 로캉탱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사르트르처럼 살고 싶지도 않다. 


 여하간 이런 책은 심신이 맑고 활기찰 적에는 읽어도 별 소득이 없다. 한없이 우울하고 지겹고 외롭고 괴롭고 차라리 미쳐져 있었으면 싶은데 막상 미쳐지기는 또 싫고, 그렇게 사는 일이 축축하고 찌뿌둥하고 시커멓게 구겨져 있을 적에나 읽어봐야, 재미는 없어도 빠져드는 데가 있다. 건강할 적엔 달고 취하고 맛있는 것들 아무렇게나 막 먹어도 되지만, 아플 땐 역하고 쓰더라도 좀 참고 약을 먹어줘야 한다. 그래도 살아있는 입은 무장 좋고 싶다고 크림 기깔나게 올린 커피 마시고 싸구려 냄새 퐁퐁 풍기는 와인 홀짝대며 읽어갔다. 구토는 안했는데, 다만 요사이 살아있는 일이 아침 걸러 텅 빈 뱃속마냥 허해 자꾸 설사를 질렀다. 사르트르가 내 체질이어서 설사를 자주 했다면 변기에 앉았을 적이라도 글을 써내려갔을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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