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연과학의 철학적 기초 ㅣ 중원문화 아카데미 신서 36
한스 라이헨바흐 지음, 김회빈 옮김 / 중원문화 / 2023년 5월
평점 :
20세기 초중반을 풍미한 논리경험주의의 기본적인 철학적 관점을 적당한 수준과 난이도로 개관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 서언은 물론이요 역자 후기만을 읽어보아도 책의 전반적인 성격 및 저자가 표방하고 있는 근본 관점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사변으로서의 철학이란 철학적 문제들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논리적 도구들이 마련되지 않았던 구시대의 유물이라 주장하고 싶다. …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오늘날의 여러 과학에서 발견하였다. … 언젠가는 철학이 다른 과학만큼 설득력 있고 강력한 과학이 될 것…" (머리말); "이 책은 과학의 전제조건이나 방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철학 분야인 과학철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저자는 새로운 철학이 20세기에 꽃핀 과학의 성과들을 근거로 하여 전통철학의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결과 얻은 해답들을 제시하고자 이 책을 썼다. … 따라서 이 책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을 위한 전문서라기보다는 학문다운 철학을 시작하려는 사람을 위한 입분서의 성격을 띤 것이다." (옮긴이의 말)
이렇듯 제목에서 짐작되는바 통상적인 과학철학 저서라기보다는 지식론적 논의를 축으로 한 철학일반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차라리 영어원제를 직역하여 "과학주의적 철학의 발흥" 정도로 번역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보았다.) 1부에서는 저자가 '사변철학' 내지 '이성주의철학'이라 칭하는 전통철학을 비판하면서 그 문제와 한계점을 밝히고, 2부에서는 현대 자연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곁들이면서 이를 사고의 토대로 삼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그러니 전통철학사 전반에 대한 지식과 현대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 양자를 교양 수준으로나마 숙지하고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겠으나, 분량이 많지 않으니 끈기 있게 찬찬히 읽을 자신이 있다면 역자의 평가처럼 초심자가 철학일반에 대한 입문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논리경험주의 풍의 철학적 관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달갑지 않게 여겨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으레 '철학' 하면 심오하고 사변적이고 거대한 이론체계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는 실태를 감안할진대, 이런 관점을 음미해봄으로써 사고의 균형을 갖추는 것도 한 번쯤 해봄 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읽고 보니 라이혠바흐의 명료한 문장력과 강인한 철학적 기풍에 매료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특히 그가 천착했던 분야인 확률론을 귀납문제에 적용하는 시도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여겨졌다. 읽는 소득도 많고 느낀 재미도 많은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