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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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바리데기'는 전통설화 ‘바리공주’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시대는 현재이다. 북한 청진에서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난 바리. 아들을 원했던 부도에 의해 태어나자마자 숲 속에 버려진 바리를 풍산개 ‘흰둥이’가 다시 데려와 목숨을 건진다. 버린 아이라는 뜻의 바리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심하게 앓고 난 후 영혼(귀신), 동물, 벙어리 등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김일성 사망 후 북한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어려운 현실에 바리 삼촌이 남조선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면서 바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홀로 두만강을 건너 도착한 중국. 먹고 살기 위해 발 마사지 일을 배워 겨우 입에 풀칠하지만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팔려다닌다. 결국 영국 런던으로 팔려간 바리는 발 마사지 일로 여러 사람과 만나면서 삶과 죽음,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경험한다.
파키스탄 남자와 결혼해서 나이를 낳지만 돌이 겨운 지난 아이는 사고로 죽는다.
이 과정에서 미국 911 사건과 영국 폭탄테러 사건 등도 바리의 인생과 엮인다.
 
저자 황석영은 탈북소녀 바리를 통해 여러 가지 것을 이 책에 담았다. 책 중간마다 죽은 할머니와 풍산개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바리는 생과 사를 넘나들며 독자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또 바리는 무슬림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인종과 종교 문제를 일깨운다. 또 전쟁과 자유를 절실하게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머리에 생생하게 남는 장면이 있다. 아프간 전쟁이 터지자 시동생이 전쟁에 참가한다. 생사가 분명치 않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바리의 남편도 전쟁터로 향한다.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나 남편 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살아 돌아온다.
 
“내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알리는 그야말로 오랜 가뭄 끝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리듯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는 삼월 어느 날 리즈의 부모들에게 인도되었다. 알리는 며칠 전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작은 배낭을 메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나는 역에서 기다리다가 플랫폼으로 몰려나오는 인파 속에서 키가 큰 알리의 우뚝 솟아오른 머리를 보고도 달려가지 않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알리가 나를 못 보고 지나치는 순간에 나는 곁으로 가서 툭 치며 말을 건넸다.
“당신, 왔어요?”
그는 나를 보고는 주춤 섰다가 나를 끌어안았고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한참이나 그러고 서 있었다.“ (290p)
 
이 대목은 마치 영화 ‘애수(Waterloo Bridge, 1940)’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여주인공 비비안리가 전사한 줄로만 알았던 애인 로버트 테일러가 살아 돌아온 장면이다. 한 기차역에서 몸을 팔며 연명하던 비비안리의 눈에 옛 애인 로버트 테일러가 들어온 것이다.
 
이후 바리는 죽은 첫 째 아이에 이어 둘째 아이를 갖는다. 그런데 그 아이의 생사가 분명치 않다.
 
”그날, 알리와 나는 아침에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캠든으로 가던 중이었다. 워털루 다리를 건너 사우스햄프턴 거리를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가던 차들이 멈추었고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도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갔다. 러셀스퀘어 쪽에서 불길과 연기가 올랐다. 사람들의 뒤를 따라 쫓아가 보니 도로 한가운데서 버스가 폭파되었다. (중략)
 
내가 쓰러질 듯 알리에게 기대며 얼굴을 돌리자 그는 나에게 팔을 돌려 감싸고는 그곳을 떠났다. 경찰 차와 앰뷸런스의 경적 소리가 온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가야, 미안하다.”
나는 부른 배를 잡고 헐떡이며 걷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알리와 나는 길을 메운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차들 사이를 걸어가며 뒤늦게 울기 시작했다.“ (292p)
 
이 책의 끝 부분이다. 영국 런던 폭탄테러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바리의 모습이다. 임신 중인 바리가 복중 아이에게 ”아가야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아이가 폭발 소리에 죽은 것을 바리가 느낀 것인지, 아니면 아이는 이상 없지만 앞으로 닥칠 전쟁과 폭력 등 불운을 아이에게 물려줄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한 말인지…
 
황석영 장편소설 ‘바리데기’를 읽고 왜 네티즌들이 노벨문학상 후보 대표 1순위로 네티즌들이 그를 지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가 공지영도 “타국에서 우리 말과 신화를 가지고 분투한 작가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고 찬사를 보낸 바 있다.
 
북한 사투리, 현실과 맞물린 줄거리 등은 소설의 현실감을 살리는 소재로 적절했다. 바리가 범인과 다른 능력을 가졌다는 것도 ‘바리공주’라는 전통설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므로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 설화처럼 바리가 생명수를 찾아 지옥까지 간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독자의 시각에 따라서는 다소 생뚱맞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글쎄요. 이 작품에서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리는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요? 이는 독자들께 던지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무튼 이 책은 전통 설화를 현실과 잘 ‘접합’시긴 작품 같다. 잘 못하면 누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와 같은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이 책은 모자이크와 같아 보인다. 각기 다른 사건이 바리라는 탈북소녀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로 엮인다. 따로 따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뭉친 작품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보이는 모자이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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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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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베일 속에 가려진 알래스카.
적어도 나에게는 신비스런 땅이다.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데다 그 땅에 대한 이야기가 들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책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를 접하면 그 땅의 신비함을 현실감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 책을 접했다.

그러나 현실감은 커녕 그 신비감만 더했다.
일본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저서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는 알래스카의 베일을 걷어주지 않는다.
다만 오로라와 백야의 땅, 알래스카에 묻혀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마치 신화처럼 묘사했다.
그랬다.
이 책을 읽으면 마치 알래스카의 신화를 읽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책은 알래스카의 사람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연을 파괴하려는 사람들…
아무튼 자연속 인간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또 이 책을 읽는 재미, 아니 이 책의 특징은 사진이다.
저자가 사진작가인 만큼 사진이 무척 아름답다.
물론 알래스카의 모습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에 누구나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관광지가 아닌 알래스카를 뷰파인더에 담았다.
그 생생한 느낌이 전해질 정도이다.
 
그렇다고 책 내용이 무겁지만은 않다.
텐트 바깥쪽에서 움직이는 곰의 그림자를 보고
엉겁결에 발로 곰을 차자, 곰이 달아난 이야기를 읽노라면 실소가 퍼진다.
 
무엇보다 자연파괴가 심각한 요즘 자연의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알래스카가 개발되지 않길 바라게 되는 책이다.
저자도 이 책에 그런 느낌을 잘 전달했다.
 
"원주민들에게는 애초에 땅을 소유한다는 관념이 없었다. 땅을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렵생활 속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막연하고 경계선이 없는 세계이다. (중략) 그들은 땅을 사유재산으로 보는 데 익숙하지 않았고, 주위에 그어진 그물눈 같은 경계선에 커다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 뼘의 땅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우리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대목이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없는 창피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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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경성 - 근대 조선을 들썩인 투기 열풍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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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20년대 일본.
섬나라인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 땅에 대규모 항구가 필요했다.
그 중에서 일본 쓰루가에서 함경도를 잇는 항로가 단거리였고 중국 대륙으로 물자를 운반하기 좋았다.
일본은 1925년 함경도 청진, 웅기, 나주 세 곳의 후보자를 발표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가 될 이 세 후보지는 유치전으로 뜨거웠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청진. 이 도시는 당시 인구 4만명의 도시였다.
또 이미 도시기반시설 등이 갖춰져 있어 재개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등 이점이 많은 도시였다.
웅기는 강제 합병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항으로 개발된 항구였다.
항만시설이 청진에 비해 새것이라는 이점이 있었지만 청진과 마찬가지로 항만이 협소하고 물살이 세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게다가 청진에 비해 도시기반시설도 부족했다.
그러나 나주는 허허벌판이었다. 그럼에도 나주가 후보지로 결정된 것은 만철(만주철도)과 항만협회 기사들이 10여년 동안 함경북도 해안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천혜의 항구였다.
 
1925년 함경북도 청진 동일상회 경영자인 김기덕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10km를 달렸다.
나진을 시찰하기 위한 것이다.
나진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 두 곳을 사들였다.
나진이 청진과 웅기를 제치고 국제항구가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김기덕는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나주가 최종 결정되자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이는 김기덕을 조선 최고의 부자로 만들었다.
 
"수용 대상 부지 가격은 4달 동안 1000배 가까이 올랐고, 땅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 종단항 발표 이전 지주의 태반은 이미 수십 배, 수백 배의 이익을 보고 토지를 매도했고, 큰손들도 대부분 이익을 실현해 빠져나간 상태였다. 수십 배, 수백 배의 가격을 주고 뒤늦게 투기 대열에 뛰어든 잔챙이 투기꾼들만 매입 가격에 훨씬 못 미치는 가격으로 토지를 수용당할 위기에 처했다." (39p)
 
1900년대 초반과 중반 시기 조선을 주름잡았던 투기꾼들과 부자들 이야기가 책 <럭키경성>에 담겨있다.
이 책은 10명의 부자들의 이야기를 당시 언론 보도 등을 인용해 소개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 전봉관은 2005년 <황금광시대>와 2006년 <경성기담>이라는 책으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는 유독 1920~1930년대 조선시대의 이야기에 집착하고 있다.
<광금광시대>에서 그는 1930년대 우리나라의 골드러시를,
<경성기담>에서는 조선 초기 미스터리한 사건을 소개했다.
 
그가 최근 펴낸 <럭키경성>은 조선 초기 부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그 부자들이 돈을 모은 노하우를 공개하지는 않는다.
그도 이 부분을 명확히 했다.
 
"정작 부자들이 치부 비법이랄까 자산 운용 노하우 같은 것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돈'과 '인간'이 어우러져 빚어낸 포복절도할 촌극과 훈훈한 미담을 담담하게 기술할 따름이다.
혹여 하루아침에 일확천금할 비책이라도 들어 있을 줄 알고 이 책을 펼친 독자가 계시다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329p)
 
그러나 이 책이 무미건조하지만은 않다.
부자들 이야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세간의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생을 들여보고
그들의 노력을 엿보노라면 현재 자신의 형편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책에는 일반인과 동떨어진 억대 부자들만의 이야기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로 실패만 경험한 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93년 인생을 살면서 32번 사업을 벌여 32번 실패한 이종만이 바로 그이다.
그런 그가 자본가로는 유일하게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김일성 주석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칭송했기 때문이다.
이종만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이종만은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좇은 것이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
그에게 돈은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종만은 자본가 신분임에도 '노동자의 나라'를 표방한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꿈을 일찌감치 포기했다면, 이종만의 실패는 29번째에서 그쳤을는지도 모른다. 부자가 되기 전 마음과 되고 난 이후의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은 드물다. 부자가 되고 나면 가난한 시절 품었던 꿈을 잊어버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종만은 부자가 되기 전이나 후나 늘 한결같았다. 이종만의 실패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179p)
 
부자들의 이야기는 곧 당시의 시대상을 나타낸다.
당시 돈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또 돈을 둘러싼 의혹과 암투도 재미를 더한다.
조선 황실과 일본의 관계에서 돈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구미를 당기는 대목이다.
사실 현재의 제도와 환경으로 그 시대를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도 있다.
더듬거리는 영어실력으로도 주미대사가 된 이하영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심부름꾼, 요리사였던 그가 미국인 의사를 우연히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듯한 엉성한 영어실력이지만 당시는 조선에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시대였다.
 
근대 조선을 들썩인 투기 열풍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엿볼 수 있는 책 <럭키경성>은 한여름밤 무더위를 잊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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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 개정판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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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1쇄로 세상에 선을 보인 책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가 2007년 6월 6쇄 개정판을 냈다.
저자 한비야는 "당시 최고의 작가가 그린 그림인데 지금 보니 내용에 맞지 않게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 보였다. 부록 글씨도 너무 작고 본문 글씨도 좀더 시원하게 키우면 좋을 것 같고… "라며 개정판을 낸 배경을 설명했다.
내용도 7년이 지났으니 변경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여름 휴가로 어디가 좋을지, 힌트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한비야의 여행기는 한결같이 '불친절' 하다.
'숙박은 어디가 편안하고, 볼거리는 무엇이고, 음식은 어디가 잘하고… '
이런 '친절한' 여행소개는 아예 찾아 볼 수 없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저자도 '불친절'을 아예 공표했다.
 
"여기서 꼭 해둘 말이 있다. 새로 나온 이 책이 인터넷 검색엔진처럼 친절하고 자세한 최신 여행 정보로 가득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너무 친절한 여행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여행 정보 책을 가지고 다니면 편하긴 하지만 끝나고 나면 시키는 대로 따라한 것 같아 허전하기도 하고, 뭔가 아주 중요한 걸 놓쳤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여행의 묘미는 완벽한 지도 덕분에 매사가 계획대로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친 약도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는 동안 생기는 뜻밖의 만남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292p)
 
완벽한 지도보다 거친 약도로 여행해야 진짜 여행이라는 논리다.
이 책의 불친절에 기분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빨간 깃발 아래 줄줄이 이어가는 여행사 단체여행보다 좀 불편하지만 자유로운 배낭여행을 즐겁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포즈로 '갔었다'는 증거사진을 찍기 바쁘다.
조금만 눈을 딴 곳으로 돌리면 아주 다른 풍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데도 말이다.

1999년 3월2일부터 4월26일까지 저자가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국토종단여행을 한 것은 이전 6년간의 세계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인지 이 책 내용의 중간 중간에는 세계여행지의 내용도 섞여있다.
비유를 하거나 도움말을 하기 위해서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무엇보다 여행지에서 접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혼인 저자를 나무라며 결혼을 꼭하라는 이야기를 밤새도록 했다는 할머니부터
쓰레기를 여행지에 버리고 가는 40대 부부의 '싸가지 없는' 행동까지…
저자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글로 그렸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저자의 성품 때문인데, 이는 '한비야의 난초론'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인연의 싹은 하늘이 준비하지만 이 싹을 키워 튼튼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순전히 사람의 몫이다. 인연이란 그냥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자라는 야생초가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공과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한 포기의 난초인 것이다." (51p)
 
국토종단여행이라면 한 두 달 시간을 내야 할 것 같다.
시간도 시간이고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꼭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몇 달씩 벼르고 계획하지 않아도 어느 날 친구끼리 의기투합해서도 할 수 있는 것, 체력 좋은 이십대 젊은이가 아니라 육십대 할머니들도 할 수 있는 것. 나처럼 혼자 해도 좋고 두세 명이 해도 좋고 가족끼리 해도 좋은 것. 한 달 이상 한꺼번에 시간을 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사람은 두세 번에 나눠서도 할 수 있는 것. 1년을 잡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도보여행이다. 너무나 힘들어서 가끔씩 나무 밑에서 '구구단을 외자'며 기를 쓰고 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체력에 맞는 일정으로 재미삼아 즐기며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도보 국토종단이다." (118p)
 
당연한 말이지만 저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걷기만 했다.
아파도 탈것을 타지 않았다.
여행도중 차를 타고 서울에 다녀온 뒤에는 늘 걷기를 멈춘 곳부터 다시 시작했다.
저자는 책에서 걷기를 강조한다.
 
"<동의보감>에도 이렇게 써 있다. '약보(藥補)보다는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는 행보(行補)가 낫다', 즉 약이나 보양식으로 몸을 보하는 것보다 걷는 게 낫다고." (120p)
 
이 책은 단순히 국토 종단기가 아니다.
한 걸음씩 꿈을 향해 꾸준히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불친절한' 책이 좋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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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 내가 뉴스를, 뉴스가 나를 말하다
김주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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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으면서 반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책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를 읽는 동안 역시 반성했다.
"저자 김주하는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힘들게 열심히 업무를 해냈구나"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이 적잖이 부끄러워졌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 좋다.
그런 책은 더욱 힘을 내게 하는 에너지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극을 받아 나를 단련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도 그런 것이 있다.
 
이 책은 "아~ 그 뉴스! 그 뉴스가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었구나. 이런 취재과정이 있었구나"라고 느낄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매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취재과정+뉴스'이다. 예컨대 2005년 3월13일 방송된 <버려지는 애완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한 분장사의 수다가 단초였다.
 
"분장사로부터 애완견이 식용으로 팔리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분장사는 자신이 다니는 동물병원에서 들은 얘기라고 했는데 이 내용을 취재하겠다고 하니 데스크(담당 부장)는 개고기 문제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므로 신중히 다룰 것을 주문했다. 나도 외국인들이 우리의 개고기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었고 내 기사가 혹 또는 다른 공격의 빌미가 될까 걱정됐지만 애완견이 식용으로 팔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연락처를 받아들고는 바로 다음날, 일산에 있는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168p)
 
이런 취재과정 뒤에 당시 뉴스가 붙었다.
 
"앵커=요즘 버려지는 애완견들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이런 유기 견들의 일부가 식용으로 거래되고 있는 현장이 포착됐습니다. 현장출동, 김주하 기자입니다.
기자=경기도에 있는 한 개 경매장입니다. 애완용 강아지를 놓고 흥정이 한창입니다. 30만원까지 호가하는 시추, 말라뮤트 같은 고급 애완견들이 헐값에 거래되고 있습니다.(중략)" (172p)
 
남편까지 대동해 취재했던 공항 택시 불법요금 문제며, 목숨을 걸고 헬기에서 촬영까지 한 독도 문제 등 '김주하표 취재'가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9시 MBC 뉴스데스크에 등장하는 그를 다시 눈여겨보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매우 쉽게 썼다. 건성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글을 쉽게 썼다는 말이다.
독자가 어렵게 느끼지 않게, 수필을 읽듯 술술 읽을 수 있도록 설명했다.
 
그가 한 방송사의 앵커이고 널리 알려진 방송인이기도 하지만
쉽게 쓴 그의 글 때문이라도 그의 책은 잘 팔리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그의 책은 2쇄 1만부를 더 냈다고 한다.
7월 초 찍은 초판 2만5천부가 동난 것이다.
하기야 이 책은 판매 전부터 현직 앵커가 낸 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예약을 받는 등 화제를 낳았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아쉽다.
앵커를 떠난 후 이런 책을 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이가 좀 든 후에 이 책을 썼다면 좀 더 무게감 있는, 깊은 내면의 '김주하'가 묻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저자도 책의 프롤로그에서 비슷한 생각을 피력했다.
 
"처음 집필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절대로 마흔 이전에는 책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경험도 부족할 것이고 책은 단지 아는 것이 많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알려졌다는 것을 이용한 상술로 여겨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보여지기 위함이 아니라 보고 싶어지는 수간들이 늘어나고, '아는 것'의 양보다 '알고 싶은 것'의 양이 많아졌을 때 비로소 '집필'을 떠올리게 됐다.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일까 아직도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을 저지르고 보는 성격 덕에 한 권의 책이 나왔다." (5p)
 
자칫 '얼굴이 알려졌다는 것을 이용한 상술로 여겨지지는 않을까'라는 그의 우려에 동감한다.
책 출판 이후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도 진행했기에 더욱 그렇게 비칠 수 있다.
앵커를 그만둔 후, MBC를 떠난 후의 행보를 염두엔 둔 포석일 수 있다는 '극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책은 포장을 잘했다. 표지에 그의 클로즈업된 흑백 사진을 실었다.
너무 싸 보이지 않게, 어려보이지 않게, 인기에 연연하지 않은 듯 보이기 위해서는 컬러보다 흑백이 효과적이다.
 
또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 엄기영 MBC뉴스데스크 앵커, 이진숙 MBC보도국 특파원의 추천글을 뒤표지에 실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 추천글을 쓴 사람들 모두 인기인이라면 인기인들이다.
이만한 '포장'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책은 김주하의 삶과 생각의 일면을 보여주는 역할을 충분히 했다.
또 그의 인간적인, 사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독자의 목마름을 적시는 단비 같다.
 
한 아이의 엄마이면서 직장인으로 사는 김주하.
책까지 낸 것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의 '속'을 느낄 수 있는 다음 책을 고대한다.
고민, 인간,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김주하표 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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