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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 우리 시대 명장 11인의 뜨거운 인생
김서령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유명인 11명과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이다. 소설가 최인호, 소리꾼 장사익, 시골의사 박경철, 한국화가 박대성, 가나아트 회장 이호재, 리얼리즘 사진가 최민식, 목수 이정섭, 건축가 김석철, 광주요 대표 조태권, 현대음악 작곡가 강석희, 서예가 김양동이 그들이다. 모두 관심을 끌만한 인물들인데다 딱딱하지 않은 문체여서 술술 읽을 수 있다. 특히 저자와 개인적으로 나눈 사담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본래 야화가 더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소설가 최인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인호는 수호신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잘 달라던 자신의 차가 동호대교에서 불이 났고 마침 지나가던 차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차 운전자가 두레박을 꺼내 한강물을 퍼 올려 불을 껐다는 것이다. 차에 두레박을 싣고 있는 것이나 그 길이가 한강물까지 닿은 것이나 믿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니 수호신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이 책을 맛있게 포장하고 있다. 특히 가나아트 회장 이호재, 사진가 최민식, 광주요 대표 조태원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회장은 한국 예술 발전에 한 몫 한 인물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예술가가 돈에 신경 쓰지 않고 작품활동을 하도록 10~20년 동안 돈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계약서는 물론 아무 조건 없이 말이다. 그 결과는 20~30년이 지난 지금 나타나고 있다. 현재 눈길을 끄는 예술인 중 상당수가 수십 년 전 이회장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으며 예술에만 전념했던 사람들이다. 조대표의 예술가에 대한 지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또 서귀포에 있는 이중섭 미술관에 원화 한점 없는 것을 아쉬워한 그는 그동안 모아왔던 이중섭 유화 2점, 드로잉 1점, 은지화 2점, 엽서화 2점 등을 기증했다. 이와 같은 조대표의 예술사랑은 이 책에서 눈부시게 표현되어 있다.
사진가 최민식의 사진은 암울한 한국 현실을 담고 있다. 등이 갈가리 찢어져 살이 다 드러난 러닝셔츠, 이빨이 듬성듬성 빠진 채 밝게 웃는 지게꾼, 마른버짐 핀 아이에게 국수 가닥을 걷어 먹이는 젊은 엄마 등이 사진의 주인공이다.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 사진의 매력에 빠져 사진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한국 시대의 어두운 면에 앵글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군부시절에는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때문에 사진 인생 50년 중 35년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사진은 일본, 독일, 미국 사진 잡지에 실리면서 최민식이라는 이름이 알려졌다.
광주요의 조태원 대표는 한식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전념한 사람이다. 전 세계 IT산업보다 훨씬 큰 식품 산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조대표는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한국 음식장사는 전쟁을 거치면서 생계수단으로 전락했단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음식을 문화로 승화시킨 점과 비교할 때 한국은 정반대 행보를 걷고 있다는 것이다. 밥집도 저급한 직종으로 전락했다. 그러니 '원조'니 '최저가격'니 하면서 경쟁이 심해지면서 음식 품질은 추락했다고 한다. 일본 스시는 본래 고급음식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미국 뉴욕의 고급 스테이크보다 2배 이상 비쌀 정도의 최고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대표는 한식도 제대로 만들어 비싸게 팔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에 한식의 고급스러움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조대표의 우직한 한식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이 책에 수북하다. 11명의 유명인을 책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그 특징을 잘 잡아 칼럼리스트인 김서령 작가는 글을 맛깔스럽게 썼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 영웅 만들기'에 뛰어난 만큼 저자도 이 책에서 11명을 '명장'으로 표현해 사실상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거북할 정도로 미화(美化)되어 있기도 하다. 화장이 짙을수록 속살은 가려진다. 객관적으로 인물을 판단하려는 독자의 눈을 가릴 수 있는 부분이다. 또 한가지 짚어야할 점은 저자가 11명과 인터뷰한 때이다. 이 책의 글은 2005~2008년에 11명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2~5년 전의 인터뷰 내용이어서 신선하지 않다. 11명을 다시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냈어야 한다. 과거 인터뷰 내용을 묶어 책을 낸 정도라면 실망스럽다. 최고의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맛있는 구미 당기는 이야기를 잡아 올렸지만 팔딱거리지 않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