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못 정한 책 - 사운드 디자이너 김벌래의 전투일지
김벌래 지음 / 순정아이북스(태경)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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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옥에 대해 연구하면서 새삼 한옥의 장점을 많이 발견했다. 특히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아파트에 살면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모른다. 한옥에서는 ‘주룩 주룩 똑’ 빗소리도, 소복소복 쌓이는 눈 소리도 잘 들린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말이다. 자연의 모습과 소리를 듣고 자라는 아이들을 보기 위해 한옥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는 젊은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소리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중에서 김벌래가 대표적이다. 콜라 뚜껑을 따는 ‘뻥’ 소리를 만든 사람이 그이다. 또 이 소리 하나로 콜라회사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소리에 미쳐 평생 소리만 쫓은 김벌래의 인생을 담은 책이 <제목을 못 정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책 표지에 저자의 사진은 세로로 실린다. 단박에 저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어 좋다. 그런데 김벌래의 이 책에 저자의 사진은 가로로 되어 있다. 제대로 저자의 얼굴을 보려면 책을 옆으로 돌려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는 시선을 끈다. 또 '제목을 못 정한 책'이라는 책 제목도 마찬가지이다. 김벌래 답다.
 
 김벌래…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벌레면 벌레지 ‘벌래’란다. 이 책에는 그 이유가 상세히 적혀있다. 실명 김평호인 김벌래의 이 책은 자서전에 가깝다. 저자의 어릴 적 일부터 최근 근황까지 소상히 적혀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소리’를 쫓는 한 인간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리에 일생을 바친 김벌래의 외침이다. 저자는 책의 부제로 ‘사운드 디자이너 김벌래의 전투일지’라고 까지 했다. 그렇다. 전투일지이다. 체신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학력이다. 그는 홍익대 교수이다. 고등학교 출신이 대학교 교수가 되기까지 그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학벌과의 전투이다. 저자는 책 내용 중 여러 차례에 걸쳐 학벌과의 전투를 거론했다. 예술을 하자는 데 학벌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그이다.
 
 고등학교 출신인 그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1993년 대전EXPO, 2002년 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적 이벤트의 음향을 감독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리를 만들어 온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학벌이라는 난관을 스스로 타파해야 했다. 88올림픽 때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저자는 이때의 일화를 책 첫 장에 실었다. 당시 폐막식장에는 다듬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반인을 몰랐지만 당시 저자는 이 나라를 떠날 각오로 다듬이 소리를 폐막식에 사용했다. 서울대 음대교수 등 대부분의 음악 전문가들이 다듬이 소리는 폐막식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저자는 이 일이 잘못되면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민을 갈 각오까지 했다.
 
 “드디어 <안녕>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유경환 감동의 ‘큐’ 사인을 받는 순간, 나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내려야 했다. 그래, 사고 한번 크게 치자. 소신대로 하는 거야. 그리고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 가족은 자유를 찾아 이민이라도 가버리면 될 게 아닌가. 그래,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자. 그 나라는 정부에서 전 학년 장학금을 다 대줄 테니 대학 다니래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대학을 안 간다고 들었다. 그러면 이 빌어먹을 놈의 학벌도 없을 테니, 얼마나 행복한 나라인가!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로운 지식인으로 대접받는 나라, 그 나라로 가자! 나는 이를 앙 다물고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고함 소리를 삼키며 속으로 외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나는 간다! 우리 식구는 사우디로 간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리고는 동시에, 새로 만든 A테이프가 아니라 B테이프에 준비된, 문제의 옛날 ‘다음이 소리’ 테이프의 스타트 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에라, 염병할 자식들아, 난 간다!” (책 내용 중에서)
 
 소리에 대한 그만의 소신이 지금의 김벌래를 만들었다. ‘새박사’하면 윤무부 교수를 떠올리듯이 ‘소리박사’하면 김벌래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1970~1980년대 광고 음향의 90%는 그가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그는 숱한 광고에 다양한 소리를 선보였다.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V’ 음향도 가야금으로 만든 그의 작품이다.
 
 그는 칠순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일생동안 소리를 쫓다 보니 귀가 혹사당했다. 보청기를 끼고 지금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김벌래. 그의 자서전 격인 책이 이 책이다. 자서전 하면 필요 이상으로 경건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쌍소리도 나온다. 그는 주로 ‘그것참’이라는 탄식을 이 책에 많이 썼다. 그만큼 쉽지 않은 그의 인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경쾌하다. 항상 ‘산나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그는 신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것참’이라는 말과 함께 ‘신나는’이라는 단어가 이 책에는 유난히 많다.
 
 어떻게 보면 소리는 비주얼 시대에 주역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비주얼도 소리가 없으면 어떨까. 소리는 영원한 주연급 조연이다. 그 가운데 김벌래를 있다. 언젠가 그에 대한 평전(評傳)을 읽어보고 싶다.
 
 “가끔은 조용히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참으로 많은 소리가 들려올 겁니다.
 가끔은
 스스로 소리를 내보자고요.
 스스로 힘이 되는 주문 같은 것 좋잖아요.
 저의 ‘신나게’처럼 말입니다.”
  -김벌래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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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굴기 강대국의 조건 - 일본 - 21세기 강대국을 지향하는 한국인의 교양서
CCTV 다큐멘터리 대국굴기 제작진 엮음 / 안그라픽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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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문물을 배워갔다는 일본. 그래서 항상 전통과 문화 면에서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일본. 그래서 ‘왜놈’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비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일본이 어떻게 세계적 강대국이 되었을까.
 
 이 의문의 해답을 책 <강대국의 조건_일본편(원제, 대국굴기)>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CCTV가 3년 동안 제작해 만든 12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포르투갈ㆍ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편과 함께 만든 총 8권 중 한 권이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일본은 미국의 선박 4척의 접근으로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막부시대가 막을 내리고 1868년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렸다. 이때부터 일본은 서양 강대국을 시찰하면서 자국의 여러 체계를 서양과 같은 수준으로 갖추려고 노력했다. 교육과 헌법은 물론 산업 등 다양한 부분에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였다. 서양을 시찰하면서, 아시아가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자국 내에 팽배했다. 이때 일본의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한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 등 아시아 국가들을 자국의 세계 진출의 발판으로 여겼다.
 일본은 북으로는 조선, 중국, 러시아, 멀리는 영국 등으로 진출을 꾀했다. 또 남으로는 대만, 필리핀까지 진출했고 심지어 호주까지 위협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을 계기로 패망한다. 그러나 평화헌법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경제적 부를 챙긴다. 메이지 유신 100년 만에 일본은 미국과 구소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을 일본이나 우리나라가 펴냈다면 주관적인 관점이 녹아들 수 있다. 물론 일본과 불행한 과거를 경험한 중국이긴 하지만 제3국이 본 일본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정색하고 일본의 과거를 열거했다. 우리가 과거 학교에서 배워왔던 일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어떻게 자국을 위해 활동했는지 비교적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책의 각 단원 말미에는 일본의 유명 학자와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붙어있다. 다소 딱딱할 수 있는 책 내용을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또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구실도 한다. 
  이 책은 일본의 가까운 과거부터 현재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이 강대국이 된 배경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이 책의 표지에는 ‘21세기 강대국을 지향하는 한국인의 교양서’라는 글귀가 있다. 
 
 <인상 깊은 구절>
 8월10일 새벽, 일본 천황이 결단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스위스와 스웨덴에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소식을 미ㆍ영ㆍ중 3개국에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8월12일, 미국ㆍ영국ㆍ중국ㆍ소련 4개국이 “투항 순간부터 일본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권력은 동맹국 최고통수부의 명령에 따라야 하며, 이본 천황은 일본 정부와 제국 배본영(일본 천황 직무 최고통수부)이 투항 조약에 서명할 것을 보장하고, 일본의 육해공군 전체에 전투 중단과 무장 해제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4개국의 최종 회의에서 반전이 출현했다. 일본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가 천황의 ‘종전 조서’를 수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천황이 조서를 녹음한 후 10시간 동안 가장 보수적인 군국주의자들이 광분하여 황국을 포위한 뒤 군사정변을 일으켜 방송국을 점령하는 등 투항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8월15일 정오, 수많은 일본인들이 라디오에서 전해지는 낯설고도 기괴한 소리를 들었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의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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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풀빛 청소년 문학 5
도나 조 나폴리 지음, 김민석 옮김 / 풀빛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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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3살 나이에 어린 아이가 전쟁을 알면 얼마나 알까?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는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 있던 이탈리아 소년 로베르토의 눈에 비친 전쟁의 모습을 그린 책 <로베르토>는 이런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한 아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쓰인 이야기이다. 저자인 도나 조 나폴리는 역사적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자문과 방대한 자료 조사를 거쳐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극장에서 또래 친구들과 미국 영화를 보다가 독일군에게 끌려 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어느 날, 곤돌라 사공의 아들이자 평범한 이탈리아 소년인 로베르토는 친구들과 함께 미국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간다. 극장에서 총을 멘 독일군들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다. 이탈리아에서 독일, 폴란드, 다시 우크라이나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주인공 로베르토는 전쟁의 현장을 목격한다. 눈 앞에서 또래 아이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나,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죽은 군인이 입고 신고 있던 옷과 군화를 벗기는 것… 전쟁을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는 전쟁의 소용돌이 안에서 생존 방법을 터득해간다. 오로지 살기 위한 본능이다.
 
 친구 엔조의 죽음으로 전쟁에 염증을 느낀다. 탈출을 결심한 로베르토는 의외로 쉽게 탈출에 성공한다. 무조건 남서쪽으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에서도 아이는 여러 가지 전쟁 경험을 겪는다. 전쟁에는 인간성, 자비도 없다는 것이 로베르토의 머리에 각인된다. 결국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한편 로베르토는 포로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소녀에게 몰래 먹을 것을 전해준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자신도 먹을 것이 없지만 유대인 소녀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대신 작은 돌을 선물로 받는다. 이 책에서 로베르토는 이 돌을 계속 지니고 다닌다. 돌은 살아야겠다는 희망과 같은 것이다. 주머니 속에 돌을 만지작거리며 전쟁을 생각하고, 절망과 희망을 고민한다.
 
 이 책의 영어 제목도 <stones in water>이다. 이 책 말미에서 주인공 로베르토는 “아저씨, 나는 돌이 될 거예요.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전쟁을 경험해버린 13살 소년, 로베르토. 그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실화, 영화 등 작품은 수없이 많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어쩌면 쉽게 잊힐 수 있는 책이다. 긴장과 잔혹함이 덜하다. 어떻게 보면 밋밋하다. 어쩌면 너무 잔인한, 그리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들에 익숙해 져서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놀 나이에 싸늘한 시체를 뒤져야 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13살 아이에게는 가혹한 형벌과 같다. 이런 점을 지적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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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 이외수의 소통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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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필이다. 아니 능변이다.'
이외수의 에세이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를 읽고 작가에 대한 일부 독자들의 생각이다.


작가는 첫 장에서 “여자, 은하계를 통틀어 가장 난해한 생명체다”라고 썼다.
너무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여자 이야기를 하려는 투이다.
제목에도 ‘여자’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오니 더욱 그렇겠다 싶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서 “사랑은 결국 온 생애를 바쳐 아름다움의 반대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뿐이다”라고 썼다.
‘여자’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났다.
 
어떻게 보면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여자로 출발해서 사랑에 도착하기까지 수많은 사회 문제를 끄집어내는 ‘경유지’를 만든다.
예컨대 이렇다.
 
“소련의 정치가 흐루시초프의 말을 빌면, 정치가들은 강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다리를 놓은 다음에 국민들이 무용지물이라고 아우성을 치면 세금을 더 걷어서 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가들은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평안을 빙자해서 국민들의 고충을 배가시키는 사람들이다.”(220p)
 
“학교당국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라고 단정한다. 그래서 모든 학생이 성적의 노예가 되기를 종용한다. 심청이의 사랑도 춘향이의 사랑도 성적을 올리기 위한 교재에 불과하다. 박목월의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도 시험문제의 예문에 불과하고, 박재삼의 ‘마음도 한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도 시험문제의 예문에 불과하다. (생략)”(72p)
 
작가는 불과 2백여페이지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짚었다.
사회적 문제점을 ‘이외수표 시각’에서 ‘이회수식 표현’으로 풀어냈다.
표현에 거침이 없다. 그냥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나 나옴직한 단어를 과감하게 나열했다.
이런 식이다.
 
“성희롱이 증가하고 성폭력이 증가한다. 어떤 여자들은 팬티가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를 입고다니는 이유가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구상에 남자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그때도 여자들이 팬티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할까. 그때도 거금을 들여 얼굴을 성형하는 열성을 보일까.”(19p)
 
“사이비들은 가증스럽게도 자비라는 단어나 사랑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먹거리기는 하지만 정작 자비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인색하다. 그들은 대부분 ‘베풀기’를 가르치는 일보다 ‘바치기’를 가르치는 일에 주력한다. 그들의 절대자인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앵벌이 두목으로 전락시키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65p)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함부로 몸을 내던지는 혐한파 아가씨들. 논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적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지만 그녀들은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외국인들의 허리를 끌어안고 모텔 침대에 몸을 던지는 것일까.”(124p)
 
 “그러나 아무리 군사력과 경제력이 막강한 국가라 하더라도 예술의 가치를 모르면 후진국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아직 후진국이다.”(135p)
 
“대한민국은 예술과 가난이 자매결연을 체결한 나라 같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진짜 예술가들은 모두가 가난하다. 대한민국에서 시쓰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돈벌기를 포기했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오죽하면 자녀들이 예술을 지망하면 부모들이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말리겠는가.”(161p)
 
한 페이지에 반 정도만 글을 썼다.
종이의 거의 반은 여백이다.
이렇다.
 
“세상 전체가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126p)
 
이 짧은 한 문장이 한 페이지에 있는 글의 전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오히려 종이의 여백에 더 많은 생각을 넣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독자가 그 여백을 채우도록 할 요량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에세이에서는 향기가 난다.
두꺼운 종이로 만든 책갈피가 들어 있는데, 그 책갈피에서 꽃향기가 폴폴 난다.
책 읽는 동안 꽃향기를 맡을 수 있다.
 
실제로 책 페이지마다 어려 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책의 커버를 덮을 즈음 되면 그 꽃들의 이름을 친절하게 달아 두었다.
 
이 에세이는 여자에 대한 에세이가 아니다.
사랑에 대한 에세이다.
작가는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여자, 학교, 정치, 사회, 문학을 들쑤셨다.
모든 것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주장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더욱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책의 마지막 커버 안쪽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주의 본성은 사랑이다.
자연의 본성도 사랑이다.
그대의 본성도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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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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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을 이렇게 이질감 없이 읽은 것은 처음이다.
하지(필명. 본명 진쉐페이)의 장편소설 <기다림>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중국 소설 이미지를 단박에 씻어주었다.
이 책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근대 소설이다. 또 이 책의 내용은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표지>
이 책은 표지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끈다.
아이보리색 바탕에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댕기머리가 눈길을 잡아끈다.
470여페이지의 소설은 장정판으로 곱게 닫혀있다. 

<내용>
커버를 열면 아내 ‘수위’와 이혼하려고 발버둥치는 주인공 군의관 ‘쿵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의 줄거리는 허무할 정도로 단순하다.
아내 수위 그리고 딸 ‘화’를 시골에 놔둔 채 도시에 있는 군병원에서 근무하는 쿵린.
그는 같이 일하는 간호사 ‘우만나’와 눈이 맞았다.
간호사 우만나와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쿵린은 18년 동안 아내와의 이혼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혼을 위해 법원을 갈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은 쉽사리 진행되지 못한다.
 
18년 만엔 거의 강제로 이혼한 쿵린은 우만나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쌍둥이 아들을 낳아 행복을 맛보려는 순간, 우만나는 몹쓸 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러면서 쿵린과 우만나의 결혼 생활은 막장으로 치닫는다.
 
새해를 맞아 전처인 수위와 딸 화가 사는 집을 방문한 쿵린.
그는 술의 힘을 빌어 수위와 화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인 우만나가 죽으면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우만나와 화는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뜯어보기>
이 책의 결말은 아내와 딸의 끝없는 기다림에 초점을 맞춘다.
 
어떻게 보면 삼류소설 같은 줄거리이지만 인물들의 감정묘사는 일품이다.
또 줄거리 중간 생겨나는 에피소드는 독자의 긴장감을 옥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눈을 떼지 못한다.
 
“부드럽게 그녀의 손가락이 린의 손바닥을 훓었다. 마치 손바닥의 감정선과 지능선을 더듬는 것처럼. (중략) 잠시 두 손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곧 손을 돌려 서로 맞잡고는 오랫동안 상대의 손을 애무했다. 린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78p)
군의관 쿵린과 간호사 우만나의 감정을 표현한 부분이다. 경극을 보면서 서로 사랑의 맛을 느끼는 시점이다.
 
그러나 둘 사이 갈등도 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감정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린은 혼자 지내는 일에 익숙했으므로 만나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마음 편히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일 때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121p)
 
쿵린과 아내 수위와의 이혼을 추진하는 동안 사건이 터졌다.
쿵린과 사귀던 간호사 우만나가 ‘양겅’이라는 사내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다.
여기서 양겅이란 인물의 설명은 생략한다.
“만나는 양겅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몸과 다리에 묶여 침대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양겅은 왼속으로 그녀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끌어내렸다.”(278p)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쿵린은 우만나와 결혼한다.
우만나가 쿵린에게 이혼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결국 쿵린은 아내 수위와 이혼한다. 18년 만에…
“린은 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일이 이렇게 쉽게 마무리된 것이 어쩐지 이상하기만 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여러 해에 걸친 절망과 자포자기의 시간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삶의 첫 장이 펼쳐지다니.”(336p)
 
쿵린은 그렇게 바라던 우만나와의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쌍둥이 아들까지 얻었지만 쿵린의 결혼생활에 윤기가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우만나는 쿵린에게 집착이 심해졌다.
쿵린은 병자처럼 야위어갔다.
쿵린은 우만나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반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전처 수위에게 자신을 용서해 줄 것과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딸 화가 엄마(수위)의 말을 아빠(쿵린)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빠.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아빠를 기다릴 거예요.”(476p)
 
<사족>
결국 이혼한 쿵린은 전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소설의 굵은 뼈대이다.
이혼까지 하고 새로운 부인 우만나와 결혼했던 쿵린에게는 좋지 않은 일만 생겼다.
우만나가 결혼 직전 강간을 당했다거나, 우만나가 몹쓸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설정이 그렇다.
또 전처는 딸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쿵린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조강지처를 버리면 벌을 받는다는 식이다.

조강지처지만 쿵린은 전처 수위와 18년동안 별거했다.
사랑의 감정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삶을 접고 새로운 삶을 찾았지만 결국 파경을 맞는다는 것은 다분히 소설적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 내내 겨울철이 잦은 배경을 이룬다.
겨울은 갈등ㆍ불길ㆍ어두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쿵린이 전처 수위로 돌아가기로 한 때는 따뜻한 봄이다.
봄은 생기ㆍ새로움ㆍ갈등해소의 상징이다.
이런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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