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중국 소설을 이렇게 이질감 없이 읽은 것은 처음이다.
하지(필명. 본명 진쉐페이)의 장편소설 <기다림>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중국 소설 이미지를 단박에 씻어주었다.
이 책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근대 소설이다. 또 이 책의 내용은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표지>
이 책은 표지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끈다.
아이보리색 바탕에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댕기머리가 눈길을 잡아끈다.
470여페이지의 소설은 장정판으로 곱게 닫혀있다. 

<내용>
커버를 열면 아내 ‘수위’와 이혼하려고 발버둥치는 주인공 군의관 ‘쿵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의 줄거리는 허무할 정도로 단순하다.
아내 수위 그리고 딸 ‘화’를 시골에 놔둔 채 도시에 있는 군병원에서 근무하는 쿵린.
그는 같이 일하는 간호사 ‘우만나’와 눈이 맞았다.
간호사 우만나와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쿵린은 18년 동안 아내와의 이혼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혼을 위해 법원을 갈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은 쉽사리 진행되지 못한다.
 
18년 만엔 거의 강제로 이혼한 쿵린은 우만나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쌍둥이 아들을 낳아 행복을 맛보려는 순간, 우만나는 몹쓸 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러면서 쿵린과 우만나의 결혼 생활은 막장으로 치닫는다.
 
새해를 맞아 전처인 수위와 딸 화가 사는 집을 방문한 쿵린.
그는 술의 힘을 빌어 수위와 화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인 우만나가 죽으면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우만나와 화는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뜯어보기>
이 책의 결말은 아내와 딸의 끝없는 기다림에 초점을 맞춘다.
 
어떻게 보면 삼류소설 같은 줄거리이지만 인물들의 감정묘사는 일품이다.
또 줄거리 중간 생겨나는 에피소드는 독자의 긴장감을 옥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눈을 떼지 못한다.
 
“부드럽게 그녀의 손가락이 린의 손바닥을 훓었다. 마치 손바닥의 감정선과 지능선을 더듬는 것처럼. (중략) 잠시 두 손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곧 손을 돌려 서로 맞잡고는 오랫동안 상대의 손을 애무했다. 린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78p)
군의관 쿵린과 간호사 우만나의 감정을 표현한 부분이다. 경극을 보면서 서로 사랑의 맛을 느끼는 시점이다.
 
그러나 둘 사이 갈등도 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감정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린은 혼자 지내는 일에 익숙했으므로 만나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마음 편히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일 때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121p)
 
쿵린과 아내 수위와의 이혼을 추진하는 동안 사건이 터졌다.
쿵린과 사귀던 간호사 우만나가 ‘양겅’이라는 사내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다.
여기서 양겅이란 인물의 설명은 생략한다.
“만나는 양겅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몸과 다리에 묶여 침대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양겅은 왼속으로 그녀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끌어내렸다.”(278p)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쿵린은 우만나와 결혼한다.
우만나가 쿵린에게 이혼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결국 쿵린은 아내 수위와 이혼한다. 18년 만에…
“린은 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일이 이렇게 쉽게 마무리된 것이 어쩐지 이상하기만 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여러 해에 걸친 절망과 자포자기의 시간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삶의 첫 장이 펼쳐지다니.”(336p)
 
쿵린은 그렇게 바라던 우만나와의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쌍둥이 아들까지 얻었지만 쿵린의 결혼생활에 윤기가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우만나는 쿵린에게 집착이 심해졌다.
쿵린은 병자처럼 야위어갔다.
쿵린은 우만나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반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전처 수위에게 자신을 용서해 줄 것과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딸 화가 엄마(수위)의 말을 아빠(쿵린)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빠.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아빠를 기다릴 거예요.”(476p)
 
<사족>
결국 이혼한 쿵린은 전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소설의 굵은 뼈대이다.
이혼까지 하고 새로운 부인 우만나와 결혼했던 쿵린에게는 좋지 않은 일만 생겼다.
우만나가 결혼 직전 강간을 당했다거나, 우만나가 몹쓸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설정이 그렇다.
또 전처는 딸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쿵린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조강지처를 버리면 벌을 받는다는 식이다.

조강지처지만 쿵린은 전처 수위와 18년동안 별거했다.
사랑의 감정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삶을 접고 새로운 삶을 찾았지만 결국 파경을 맞는다는 것은 다분히 소설적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 내내 겨울철이 잦은 배경을 이룬다.
겨울은 갈등ㆍ불길ㆍ어두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쿵린이 전처 수위로 돌아가기로 한 때는 따뜻한 봄이다.
봄은 생기ㆍ새로움ㆍ갈등해소의 상징이다.
이런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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