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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못 정한 책 - 사운드 디자이너 김벌래의 전투일지
김벌래 지음 / 순정아이북스(태경) / 2007년 8월
평점 :
최근 한옥에 대해 연구하면서 새삼 한옥의 장점을 많이 발견했다. 특히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아파트에 살면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모른다. 한옥에서는 ‘주룩 주룩 똑’ 빗소리도, 소복소복 쌓이는 눈 소리도 잘 들린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말이다. 자연의 모습과 소리를 듣고 자라는 아이들을 보기 위해 한옥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는 젊은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소리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중에서 김벌래가 대표적이다. 콜라 뚜껑을 따는 ‘뻥’ 소리를 만든 사람이 그이다. 또 이 소리 하나로 콜라회사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소리에 미쳐 평생 소리만 쫓은 김벌래의 인생을 담은 책이 <제목을 못 정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책 표지에 저자의 사진은 세로로 실린다. 단박에 저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어 좋다. 그런데 김벌래의 이 책에 저자의 사진은 가로로 되어 있다. 제대로 저자의 얼굴을 보려면 책을 옆으로 돌려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는 시선을 끈다. 또 '제목을 못 정한 책'이라는 책 제목도 마찬가지이다. 김벌래 답다.
김벌래…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벌레면 벌레지 ‘벌래’란다. 이 책에는 그 이유가 상세히 적혀있다. 실명 김평호인 김벌래의 이 책은 자서전에 가깝다. 저자의 어릴 적 일부터 최근 근황까지 소상히 적혀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소리’를 쫓는 한 인간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리에 일생을 바친 김벌래의 외침이다. 저자는 책의 부제로 ‘사운드 디자이너 김벌래의 전투일지’라고 까지 했다. 그렇다. 전투일지이다. 체신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학력이다. 그는 홍익대 교수이다. 고등학교 출신이 대학교 교수가 되기까지 그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학벌과의 전투이다. 저자는 책 내용 중 여러 차례에 걸쳐 학벌과의 전투를 거론했다. 예술을 하자는 데 학벌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그이다.
고등학교 출신인 그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1993년 대전EXPO, 2002년 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적 이벤트의 음향을 감독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리를 만들어 온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학벌이라는 난관을 스스로 타파해야 했다. 88올림픽 때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저자는 이때의 일화를 책 첫 장에 실었다. 당시 폐막식장에는 다듬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반인을 몰랐지만 당시 저자는 이 나라를 떠날 각오로 다듬이 소리를 폐막식에 사용했다. 서울대 음대교수 등 대부분의 음악 전문가들이 다듬이 소리는 폐막식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저자는 이 일이 잘못되면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민을 갈 각오까지 했다.
“드디어 <안녕>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유경환 감동의 ‘큐’ 사인을 받는 순간, 나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내려야 했다. 그래, 사고 한번 크게 치자. 소신대로 하는 거야. 그리고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 가족은 자유를 찾아 이민이라도 가버리면 될 게 아닌가. 그래,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자. 그 나라는 정부에서 전 학년 장학금을 다 대줄 테니 대학 다니래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대학을 안 간다고 들었다. 그러면 이 빌어먹을 놈의 학벌도 없을 테니, 얼마나 행복한 나라인가!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로운 지식인으로 대접받는 나라, 그 나라로 가자! 나는 이를 앙 다물고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고함 소리를 삼키며 속으로 외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나는 간다! 우리 식구는 사우디로 간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리고는 동시에, 새로 만든 A테이프가 아니라 B테이프에 준비된, 문제의 옛날 ‘다음이 소리’ 테이프의 스타트 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에라, 염병할 자식들아, 난 간다!” (책 내용 중에서)
소리에 대한 그만의 소신이 지금의 김벌래를 만들었다. ‘새박사’하면 윤무부 교수를 떠올리듯이 ‘소리박사’하면 김벌래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1970~1980년대 광고 음향의 90%는 그가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그는 숱한 광고에 다양한 소리를 선보였다.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V’ 음향도 가야금으로 만든 그의 작품이다.
그는 칠순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일생동안 소리를 쫓다 보니 귀가 혹사당했다. 보청기를 끼고 지금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김벌래. 그의 자서전 격인 책이 이 책이다. 자서전 하면 필요 이상으로 경건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쌍소리도 나온다. 그는 주로 ‘그것참’이라는 탄식을 이 책에 많이 썼다. 그만큼 쉽지 않은 그의 인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경쾌하다. 항상 ‘산나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그는 신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것참’이라는 말과 함께 ‘신나는’이라는 단어가 이 책에는 유난히 많다.
어떻게 보면 소리는 비주얼 시대에 주역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비주얼도 소리가 없으면 어떨까. 소리는 영원한 주연급 조연이다. 그 가운데 김벌래를 있다. 언젠가 그에 대한 평전(評傳)을 읽어보고 싶다.
“가끔은 조용히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참으로 많은 소리가 들려올 겁니다.
가끔은
스스로 소리를 내보자고요.
스스로 힘이 되는 주문 같은 것 좋잖아요.
저의 ‘신나게’처럼 말입니다.”
-김벌래의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