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스토리콜렉터 46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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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여긴 전에 본 적이 있어!

누구나 한번쯤 낯선 곳에서 낯설지 않은 친근감이 들 때가 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코타로는 할머니와 함께 낯선 마을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상하게 처음 온 이 집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코타로는 전에 살던 지역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왜..그 이상한 직감이 섬뜩하게 다가올까.

 

 

이사 첫날 동네의 미치광이 노인에게 “꼬마야 다녀왔니?”라는 말까지 들은 소년의 마음은 얼마나 콩닥거렸을까. 괴로운 악몽을 다시 꾸게 된 코타로는 해가 진 후 괴어한 현상에 시달리고 숲에서 의문의 형체에게 쫒기기까지 한다. 어둠 속에서 미닫이문을 열고 나오는 노인의 팔, 시꺼먼 욕조 안에서 울리는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까지 끔찍한 공포가 소년을 쫓아다닌다.

 

 

동갑 여자아이 레나와 함께 이 괴상한 집의 비밀을 찾아 나서게 된 코타로! 그래서 알게 된 진실은 10년 전 집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해 사건과 그 이후에도 여전히 그 집안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란 것이었다. 평범한 소년이 감당하기엔 그 괴이한 현상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중학교에 입학할 정도의 어린 소년이니 말이다.

 

 

미쓰다 신조가 돌아왔다!

 

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로 두 번째 책 <화가(禍家)>가 나왔다. 사실 먼저 출간된 <흉가>가 <화가> 이후에 나왔다고 하니, 이 책이 집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인 셈이다. 사실 두 책은 기본 구조가 비슷하다. 어린 소년이 낯선 곳으로 이사하면서 겪는 사건들이 주요 테마이다.

 

<화가>에 등장하는 공포는 집이라는 가장 편안한 장소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가장 일본 영화의 공포물 같은 두려운 장치들을 설치해두고 독자들을 초대해놓은 것 같다. 책 속 집안으로 찾아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끝이 없는 공포가 쫓아온다.

 

뚜껑을 닫은 욕조 안은 새까맣다. 그 어둠 속에서 지금 뭔가가 기어 나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욕실은 밝다. 즉, 안에 있는 뭔가는 나올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코타로의 추측이 맞았는지, 간신히 손이 들어갈 정도로 들려 올라왔을 때 뚜껑이 딱 멈췄다. 그 이상은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열 수 없는 것이리라. 바로 그 순간, 그 비좁은 틈새로부터,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무시무시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7장 유령의 집, 138쪽

 

 

어린 소년이 겪는 괴이한 현상들과 실제 살인사건이 맞물려 돌아가다 보니 점점 소름이 돋는 공포가 섬뜩하게 쫓아오는 것 같다. 소년이 느끼는 서늘한 감정을 함께 호흡하다 보니 공포영화를 보는 듯 자꾸 놀라게 된다. 단순히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살인 사건의 진상이 너무 엄청나다.

 

 

한숨 돌리면 또 한번 뒤집는 반전 같은 장치들에 정신을 빼앗겨 혼미할 때쯤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미쓰다 신조가 만들어내는 공포 소설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이어져 나오는 미쓰다 신조의 집시리즈가 또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더운 여름 집안에서 나갈 수 없다면, 에어컨을 켜두고 <화가(禍家)>를 읽어보는 건 어떠할까. 그런 섬뜩한 피서 같은 독서 덕분에 어느 새 폭염은 저 멀리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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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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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소주를 살 일도,

노래를 부를 일도,

춤을 출 일도 없을 텐데.

 

 

 

이제서야 사랑이라니.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고 벌써 16년이나 흘렀는데, 다시 사랑이라니.

 

밀레니엄 시대가 열린다고 시끄러웠던 2000년대 이전에 만난 내겐 너무 지독했던 그 사랑, 그 지독한 놈때문에 몸서리치게 싫어도 지금도 난 다시 사랑타령 중이다.

이런...사랑이라니...미친 그 두 글자.

 

바로 그 순간, 게접스럽게도 부케의 오른쪽 윗부분이 광수의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삶에서 스쳐지나는 수많은 순간 중 하나였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광수는 자신의 결혼식에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7쪽)

 

바로 그 찰나의 순간...어쩜 광수가 결혼사진 속에서 팔레노프시스 꽃대 하나가 꺾여있는 그 찰나를 우연히 발견하는 그 순간, 사랑인지도 모를 그 무시무시한 질투라는 집착을 시작하고 말듯이 사랑은 그렇게 불현듯 내 곁을 찾아들어온다.

 

그게 뭔지도 몰랐고, 그게 사랑인지도 몰랐고, 그렇게 그 감정에 비틀비틀 취해버리고 만다. 나만이 흔들거리는 그 세상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날 막을 수 없다. 그냥 체념하고 기다려야할 뿐. 그게 끝나가길 기다려야할 뿐.

 

 

 

우리가 사랑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그 녀석을 눈 앞에서 맞닥뜨리면 이성과 의미없는 싸움을 시작한다. 나는 그랬다. 몇년 간 다가오는 사람을 피해 도망다녔던 밀레니엄 시대가 열리기 두어 해 전, 그 녀석을 만났다. 나랑 다른 놈, 그런데 나보다 착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 놈. 진우처럼 찌질하지도 광수처럼 지루하지도 않았던 그 이상한 놈. 그때 도망쳤어야 했다. 차라리 나쁜 남자였음, 욕한번 징하게 하고 돌아서고 말았을 것을.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바뀌는 과정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일과 비슷하다. ....(중략)

미혼녀에서 유부녀로 바뀌는 건, 뭐랄까 호두를 깨무는 일과 비슷하다. (12-14쪽)

 

결혼이란 게 약속에 묶인 연인 사이엔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비행사의 안위와 호두를 깨물어 이가 아작이날 만한 일에 비할 정도로 중대한 결정이었을까. 왜 난 2003년 6월에 나온 이 책을 놓쳤던 걸까. 맙소사. <사랑이라니, 선영아> 출간 두 달전 신혼여행을 떠났었구나. 그래. 난 선영이 너랑 같은 해에 결혼을 했었구나. 선영이 너처럼 광수같은 사람과...그럼...진우는? 나의 진우는 그 순간 어디에 있었을까.

 

"난 너하고 결혼하게 되어서 너무나 기뻐. 네가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진심이야." (15쪽)

 

선영이 넌 끊임없이 광수에게 되뇌이곤 했지. 사랑이라고 외치고 확인받고 싶어했지. 그건 사랑이었을까.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 역시 그랬으니까. 매번 확인하고 매번 불안해 했으니까.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에 둘이서 처음 입맞췄던 기억,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투정을 부리다가 되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 그만 혼자서 울어버린 기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106-107쪽)

 

몇 줄로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버렸다. 사랑했던 기억이 없는 사람과 질투가 없는 사람 누가 더 나쁜 걸까. 이 몇 줄의 사랑이 기억되고 질투가 심했던 낯선 모습을 마주하게 되다니, HJ야. 너 사랑을 했구나. 그것은 사랑이었어. 질끈 눈감아 버리지말자. 그것도 사랑이란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113쪽)

 

어딘가에 있을 나의 진우야. 찌질해도 그당시의 널 내가 많이 좋아했던 거 알지? 사랑은 변하더라. 니가 바라본 세상 안에 내가 없었을 뿐이야. 그 안에 이젠 다른 누군가가 있겠지. 우연히 화면에서 본 너 참 멋지더라. 니 옆에 있었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좀 더 편안한 건 나만의 진우를 찾았기 때문일까. 아님 진우 같은 광수를 찾았기 때문일까. 난 왜 후자라고 믿고 싶을까.

 

아이들은 자라나 어른이 된다지만, 어른들은 자라나 무엇이 될까? (119쪽)

 

선영아. 우린 자라나 무엇이 되었을까. 쭈볏쭈볏 서성대다가 문득 뒤를 돌아봐. 내가 타박타박 내딛었던 그 거친 길을..그 길 끝에 내가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두려워하며 슬픈 표정을 지어. 너도 그럴까. 우린 첫 애도 같은 해에 낳았구나. 그때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었을까. 내 안에서 나온 그녀석들에게도 사랑이 찾아들겠지. 너처럼, 나처럼.

 

다시 시작해보고싶네. 그 사랑이란 거.

잊고 있었던 사랑, 그 지독한 놈...몸서리치게 싫어도 다시 사랑이라니, 선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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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라슈 2016-07-31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고 하네요. 다시말해 사랑엔
면역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그래서 ˝이제 난 다시는 사랑따위 안해˝ 라고 해도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면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는 게 인간이라고 ㅎㅎ. 글 잘봤습니다. 김연수 소설 올만에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도시여행자 2017-01-06 02:55   좋아요 0 | URL
댓글을 늦게 보아 죄송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도 사랑을 하나봅니다. ^^
연수쌤 소설은 언제나 좋지요~
좋은 시간되셨길 바래봅니다~~
 
 전출처 : 작가와의만남님의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한창훈 X 한단하 북토크"

[ 1인 ] 사람냄새가 나는 한창훈 작가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바다냄새가 베인 <그 남자의 연애사>가 제 마음을 후비며 들어오기도 했고,
<순정> 같은 첫사랑 소설도 한작가님의 손에서 빚어졌죠. 어쩜 소설안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실까요.
<내 밥상의 자산어보>보며 이렇게 사는 삶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부럽기도 했습니다.

독자들과 만나는 북토크도 소탈하셔서 거리감 느껴지지 않게 편안하게 대해주시는 한작가님과 따님까지 뵙게 되는 자리라니 어떻게 안 갈 수가 있을까요?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제목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오네요.
이번 소설에 담겨진 아픔과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까지 다 듣고 오고싶습니다.
그 섬에 가고 싶은 독자입니다. 우선 책부터 읽고 가야겠네요~그날이 기다려집니다.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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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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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카만 머리의 금발소년> 작가 안드레아스 그루버..그가 다시 돌아왔다!

 

너무 재밌게 읽었었던 <새카만 머리의 금발소년> 작가 안드레아스 그루버가 새로운 시리즈 <지옥이 새겨진 소녀>를 들고 우리 곁으로 다시 왔다. 비너발트 숲...숲이란 곳은 언제나 비밀스럽고 괴기스럽기 마련이다. 그 곳에서 발견된 소녀의 등엔 피, 천사, 악마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 34편 서사시 중 여덟 번째 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역시 소름끼치는 도입부가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그 소녀는 1년 전 비너발트 숲 근방의 놀이터에서 갑자기 행방불명된 열한 살의 클라라였고 주인공인 형사 자비네의 친구 딸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실종되어 등에 지옥이 새겨지고 그 숲에서 도망치고 있었을까.

그리고 발견되는 등의 피부가 벗겨진 소녀들의 시신이 연달아 발견되는데, 비너발트 숲의 연쇄살인사건들 중심에 클라라가 있었다. 범인은 소녀들의 등에 무엇을 새긴 것일까. 그리고 유일한 목격자이자 살아있는 피해자인 클라라에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걸까.

 

특별수사팀이 클라라의 컴퓨터에서 발견한 ‘michelle’과 ‘heiko’라는 의문의 이메일 주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5년 동안 일어난 미해결 살인 사건 속엔 숨겨진 완벽한 살인자가 있었다!

한편 독일에서 일어나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이는 살인 사건들이 1년 간격으로 일어나고 모든 증거는 한명을 향하는데, 그가 진짜 범인일까? 결국 영순위 범인들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마는데, 미해결 살인 사건을 쫓던 슈나이더와 자비네는 빈에서 일어난 실종 소녀 클라라의 사건이 연결되어있음을 깨닫는다.

 

그 뒤에는 마르틴 S. 슈나이더는 물론 독일 연방범죄수사국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또 다른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고 작가는 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프로파일러 슈나이더와 매력적인 여형사 자비네 환상의 추리가 펼쳐진다!

독일 최고의 스릴러 작가 안드레아스 그루버. 그는 프로파일러 슈나이더와 여형사 자비네를 환상의 복식조로 등장시킨다. 괴팍한 프로파일러 슈나이더는 천재적이지만 광기가 번득이고 자비네 또한 전작 <새카만 머리의 금발소년>에서 엄마를 잃은 자비네와 계속 엮인다는 설정이 재미있었다. 과연 미해결 연쇄살인의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그 범인이 소녀의 등에 지옥을 새기는’ 범인일까? 이렇게 살인을 조종하는 복수극을 조종한 사람은 누구일까.

 

프로파일러 슈나이더와 여형사 자비네 콤비를 통해 다시 올 여름 우리의 심장을 어택하는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작품 <지옥이 새겨진 소녀>에 다시 한번 박수를 치고 싶다. 실망시키지 않는 그루버의 작품들로 이번 더위를 이겨내시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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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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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이 발간되기 전 가제본으로 책을 먼저 받아보게 되었다. 책표지에 적힌 종말이란 두 글자를 보고 종말에 관한 소설의 도입부라고 치기엔 너무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다. 배우 아서 리앤더가 [리어 왕] 공연 도중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지 사이, 불시에 도착한 비행기승객을 통해 퍼지게 된 '조지아 독감' 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그렇게 허망하게 인류의 99.9퍼센트를 죽었고 세상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인류종말을 가져오는 대재앙, 그건 작년 우릴 떨게 만들었던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질병임에 틀림없다.

조지아 독감으로 전멸되다시피한 20년 후, 모든 문명의 혜택이 사라지고 마차로 이동하는 악단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셰익스피어 희곡을 공연하고 있다니 흥머로운 설정이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문장을 마차에 새긴 악단은 북미를 떠돌며 공연을 했는데, 그 무리에 속한 커스틴이 바로 주인공이다. 아서의 죽음을 목격한 커스틴에게는 아서가 준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만화책이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만화책까지 이 소설엔 등장하는데, 신기하게도 스토리 전개에 아무 무리가 없다. 오히려 연극을 통해 남아있던 사람들에겐 희망이란 불씨가 피워지기도 한다.

'예언자'라고 불리는 지배자가 점령한 마을에 공연을 하다가 배우 하나를 예언자의 네 번째 부인으로 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에 악단은 허겁지겁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사실 장면들이 다 스릴이 넘쳐 이 소설이 영화화하는 것에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예전 동료의 발자취를 쫓던 커스틴은 일행과 떨어지게 되고 공항이었던 '문명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언자의 개가 스테이션 일레븐의 주인공 닥터 일레븐의 개와 이름이 똑같다는 설정이 계속 신경쓰였다. 역시 뭔가가 있구나 싶어 만화와 커스틴의 현실을 대조해보게 되었다.

이야기가 전개되어가며 사실 아서와 미란다의 사랑 이야기가 종말 보다 더 재미있었던 건 왜일까. 사랑했고 파경을 맞이하는 그 과정이 마치 소설 속의 또다른 소설처럼 넣어져 있어 우울한 종말 상황이 조금은 로맨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스테이션 일레븐은 아서의 전처 미란다가 쓴 만화가 아닌가. 10부만 만들었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유랑 악단은 클래식과 재즈, 문명 몰락 이전의 대중가요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곡들을 연주하고 셰익스피어 희곡을 상영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현대 희곡도 종종 무대에 올렸지만, 놀랍게도 관객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장 선호하는 것 같았다. 누구도 예쌍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전 세상에서 제일 훌륭했던 게 다시 보고 싶은 거야." (54쪽)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뭘까? 그저 살아남는 것 외에, 인간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외부인이 지나가면 무조건 총을 갈기기도 하고, 조지아 독감이 신의 심판이었다고 주장하는 미친 예언자가 있기도 한 세상이 남아있다. 인간은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증명하듯 유랑악단은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하고,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일구게 되는게 아닐까.

커스틴은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눈을 뜰 때마다 주변에 사람들과 동물들과 마차가 없는 적막한 풍경이 아프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202쪽)

<스테이션 일레븐>은 대중성과 문학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작품이기에 읽는 동안 흥미진진했다. 전염병이 지구를 휩쓸기 전 이야기와 더불어 종말 20년 후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서 재미있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고 잘 버물려진 종말 소설이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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