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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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이 발간되기 전 가제본으로 책을 먼저 받아보게 되었다. 책표지에 적힌 종말이란 두 글자를 보고 종말에 관한 소설의 도입부라고 치기엔 너무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다. 배우 아서 리앤더가 [리어 왕] 공연 도중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지 사이, 불시에 도착한 비행기승객을 통해 퍼지게 된 '조지아 독감' 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그렇게 허망하게 인류의 99.9퍼센트를 죽었고 세상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인류종말을 가져오는 대재앙, 그건 작년 우릴 떨게 만들었던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질병임에 틀림없다.

조지아 독감으로 전멸되다시피한 20년 후, 모든 문명의 혜택이 사라지고 마차로 이동하는 악단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셰익스피어 희곡을 공연하고 있다니 흥머로운 설정이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문장을 마차에 새긴 악단은 북미를 떠돌며 공연을 했는데, 그 무리에 속한 커스틴이 바로 주인공이다. 아서의 죽음을 목격한 커스틴에게는 아서가 준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만화책이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만화책까지 이 소설엔 등장하는데, 신기하게도 스토리 전개에 아무 무리가 없다. 오히려 연극을 통해 남아있던 사람들에겐 희망이란 불씨가 피워지기도 한다.

'예언자'라고 불리는 지배자가 점령한 마을에 공연을 하다가 배우 하나를 예언자의 네 번째 부인으로 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에 악단은 허겁지겁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사실 장면들이 다 스릴이 넘쳐 이 소설이 영화화하는 것에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예전 동료의 발자취를 쫓던 커스틴은 일행과 떨어지게 되고 공항이었던 '문명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언자의 개가 스테이션 일레븐의 주인공 닥터 일레븐의 개와 이름이 똑같다는 설정이 계속 신경쓰였다. 역시 뭔가가 있구나 싶어 만화와 커스틴의 현실을 대조해보게 되었다.

이야기가 전개되어가며 사실 아서와 미란다의 사랑 이야기가 종말 보다 더 재미있었던 건 왜일까. 사랑했고 파경을 맞이하는 그 과정이 마치 소설 속의 또다른 소설처럼 넣어져 있어 우울한 종말 상황이 조금은 로맨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스테이션 일레븐은 아서의 전처 미란다가 쓴 만화가 아닌가. 10부만 만들었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유랑 악단은 클래식과 재즈, 문명 몰락 이전의 대중가요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곡들을 연주하고 셰익스피어 희곡을 상영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현대 희곡도 종종 무대에 올렸지만, 놀랍게도 관객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장 선호하는 것 같았다. 누구도 예쌍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전 세상에서 제일 훌륭했던 게 다시 보고 싶은 거야." (54쪽)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뭘까? 그저 살아남는 것 외에, 인간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외부인이 지나가면 무조건 총을 갈기기도 하고, 조지아 독감이 신의 심판이었다고 주장하는 미친 예언자가 있기도 한 세상이 남아있다. 인간은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증명하듯 유랑악단은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하고,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일구게 되는게 아닐까.

커스틴은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눈을 뜰 때마다 주변에 사람들과 동물들과 마차가 없는 적막한 풍경이 아프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202쪽)

<스테이션 일레븐>은 대중성과 문학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작품이기에 읽는 동안 흥미진진했다. 전염병이 지구를 휩쓸기 전 이야기와 더불어 종말 20년 후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서 재미있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고 잘 버물려진 종말 소설이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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