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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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소주를 살 일도,

노래를 부를 일도,

춤을 출 일도 없을 텐데.

 

 

 

이제서야 사랑이라니.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고 벌써 16년이나 흘렀는데, 다시 사랑이라니.

 

밀레니엄 시대가 열린다고 시끄러웠던 2000년대 이전에 만난 내겐 너무 지독했던 그 사랑, 그 지독한 놈때문에 몸서리치게 싫어도 지금도 난 다시 사랑타령 중이다.

이런...사랑이라니...미친 그 두 글자.

 

바로 그 순간, 게접스럽게도 부케의 오른쪽 윗부분이 광수의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삶에서 스쳐지나는 수많은 순간 중 하나였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광수는 자신의 결혼식에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7쪽)

 

바로 그 찰나의 순간...어쩜 광수가 결혼사진 속에서 팔레노프시스 꽃대 하나가 꺾여있는 그 찰나를 우연히 발견하는 그 순간, 사랑인지도 모를 그 무시무시한 질투라는 집착을 시작하고 말듯이 사랑은 그렇게 불현듯 내 곁을 찾아들어온다.

 

그게 뭔지도 몰랐고, 그게 사랑인지도 몰랐고, 그렇게 그 감정에 비틀비틀 취해버리고 만다. 나만이 흔들거리는 그 세상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날 막을 수 없다. 그냥 체념하고 기다려야할 뿐. 그게 끝나가길 기다려야할 뿐.

 

 

 

우리가 사랑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그 녀석을 눈 앞에서 맞닥뜨리면 이성과 의미없는 싸움을 시작한다. 나는 그랬다. 몇년 간 다가오는 사람을 피해 도망다녔던 밀레니엄 시대가 열리기 두어 해 전, 그 녀석을 만났다. 나랑 다른 놈, 그런데 나보다 착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 놈. 진우처럼 찌질하지도 광수처럼 지루하지도 않았던 그 이상한 놈. 그때 도망쳤어야 했다. 차라리 나쁜 남자였음, 욕한번 징하게 하고 돌아서고 말았을 것을.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바뀌는 과정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일과 비슷하다. ....(중략)

미혼녀에서 유부녀로 바뀌는 건, 뭐랄까 호두를 깨무는 일과 비슷하다. (12-14쪽)

 

결혼이란 게 약속에 묶인 연인 사이엔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비행사의 안위와 호두를 깨물어 이가 아작이날 만한 일에 비할 정도로 중대한 결정이었을까. 왜 난 2003년 6월에 나온 이 책을 놓쳤던 걸까. 맙소사. <사랑이라니, 선영아> 출간 두 달전 신혼여행을 떠났었구나. 그래. 난 선영이 너랑 같은 해에 결혼을 했었구나. 선영이 너처럼 광수같은 사람과...그럼...진우는? 나의 진우는 그 순간 어디에 있었을까.

 

"난 너하고 결혼하게 되어서 너무나 기뻐. 네가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진심이야." (15쪽)

 

선영이 넌 끊임없이 광수에게 되뇌이곤 했지. 사랑이라고 외치고 확인받고 싶어했지. 그건 사랑이었을까.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 역시 그랬으니까. 매번 확인하고 매번 불안해 했으니까.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에 둘이서 처음 입맞췄던 기억,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투정을 부리다가 되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 그만 혼자서 울어버린 기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106-107쪽)

 

몇 줄로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버렸다. 사랑했던 기억이 없는 사람과 질투가 없는 사람 누가 더 나쁜 걸까. 이 몇 줄의 사랑이 기억되고 질투가 심했던 낯선 모습을 마주하게 되다니, HJ야. 너 사랑을 했구나. 그것은 사랑이었어. 질끈 눈감아 버리지말자. 그것도 사랑이란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113쪽)

 

어딘가에 있을 나의 진우야. 찌질해도 그당시의 널 내가 많이 좋아했던 거 알지? 사랑은 변하더라. 니가 바라본 세상 안에 내가 없었을 뿐이야. 그 안에 이젠 다른 누군가가 있겠지. 우연히 화면에서 본 너 참 멋지더라. 니 옆에 있었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좀 더 편안한 건 나만의 진우를 찾았기 때문일까. 아님 진우 같은 광수를 찾았기 때문일까. 난 왜 후자라고 믿고 싶을까.

 

아이들은 자라나 어른이 된다지만, 어른들은 자라나 무엇이 될까? (119쪽)

 

선영아. 우린 자라나 무엇이 되었을까. 쭈볏쭈볏 서성대다가 문득 뒤를 돌아봐. 내가 타박타박 내딛었던 그 거친 길을..그 길 끝에 내가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두려워하며 슬픈 표정을 지어. 너도 그럴까. 우린 첫 애도 같은 해에 낳았구나. 그때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었을까. 내 안에서 나온 그녀석들에게도 사랑이 찾아들겠지. 너처럼, 나처럼.

 

다시 시작해보고싶네. 그 사랑이란 거.

잊고 있었던 사랑, 그 지독한 놈...몸서리치게 싫어도 다시 사랑이라니, 선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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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라슈 2016-07-31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고 하네요. 다시말해 사랑엔
면역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그래서 ˝이제 난 다시는 사랑따위 안해˝ 라고 해도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면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는 게 인간이라고 ㅎㅎ. 글 잘봤습니다. 김연수 소설 올만에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도시여행자 2017-01-06 02:55   좋아요 0 | URL
댓글을 늦게 보아 죄송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도 사랑을 하나봅니다. ^^
연수쌤 소설은 언제나 좋지요~
좋은 시간되셨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