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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ㅣ 문학동네 시인선 88
문성해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시인의 시집을. 돈 주고 사지도 않은 내가 이래도 되는 지 모르겠다. 얼마전 문성해라는 시인을 선물로 받았다. 일전에 페이퍼에서 인중샷을 올리면서 좋아라 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안했다. 그냥 내 기분에 취해 좋아하기만 했다. 싸가지 없어 보이려고 애쓴 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고집도 무엇도 아닌 그냥 바보다. 머리를 쥐어박는 경망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것을 인증하려면 또다른 경망이 필요해서 지금은 힘들다. 더군다나 지금 내가 울음이 터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후. 이제 겨울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오후. 문성해의 시집을 읽다가, 이미 읽은 시를 다시 또 읽다가 문득, 어떻게라도 리뷰를, 들어가도 될까요 노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자판 앞에 앉았다. 나는 몰라라. 널어야 할 빨래와 쓸어야 할 먼지들. 빨래와 먼지들의 관용이 아니더라도, 이래도 되는 지 모르겠다. 돈 주고 사지 않은 시인의 시집을. 여기 이렇게 몇 편 소개해도 될른지를. 차마 못하겠다 하지 말고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라고 누군가 응원하는 환청을 믿고, 나는 간다.
삽살개야
- 문성해
더부룩한 얼굴에
털이 눈을 가린 개야
네 몸의 털을 총체처럼 너풀거리며
네 다리를 비현실적으로 둥싯거리며
빗물을 걸레질하며 가는 개야
도로를 가득 메운 먼지도
털이 솟구치는 위험도
다 털 커튼 뒤에서의 일
세상은 완벽한 커튼이 쳐진 무대
매일매일 개봉되는 극장
오늘의 공연을 관람하러
너울너울 언덕을 내려오는 개야
하루하루가 흥미로운 개야
나도 치렁한 앞머리를 내리고말고
이 지긋지긋한 주인공에서
하루아침에 관객이 될 수만 있다면야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75쪽
먼 데
-문성해
지난해부터
공원 미니 동물원에
미어캣 다섯 마리가 들어와 살고 있다
모래를 파다가
쪼그만 두 발로 모래를 파다가
두 발로 곧추서서 먼 데를 본다
모래 밑에는
딱딱한 시멘트 공구리
파도 파도 들어가지지 않는 시멘트 공구리
동그란 눈에
뾰족한 하관으로
아지랑이 피는 먼 데를 본다
하루에도 수십 번
얼음땡 놀이를 한다
먼 데는
적이 오는 곳
까마득한 점으로부터
대낮처럼 두 날개를 펼친
맹금류가 오는 곳
있지도 않은 먼 데는 무섭다
올지도 모른다는 먼 데는 무섭다
피처럼 붉은 고기를 찢어 먹다가
또 먼 데를 본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먼 데를 본다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88~89쪽
변덕스러운 사람
-백석풍으로
-문성해
삼월 하순 아파트 중턱에 걸린 해가 하마 사라질까 몸에
햇살을 들이며 앉았노라니 해에 구름이 들명 날명 아직
낮잠이 덜 마른 내 몸에 향기로운 대낮과 어스름한 저녁이
들고 나더니 기쁨도 설움도 날실 씨실로 얽히더니 나도 오늘
하늘의 변죽에 맞춰 아주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고 말아
이런 날은 긴 공터의 햇살과 구름을 구불구불 등에 다 새기며
기어가는 푸르죽죽한 애벌레처럼 나는 그냥 홀로인 나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하고 그 공터에 솟아난 풀들과
날아다니는 비닐들과 엎드린 들고양이 맘도 이런 것이려니
그리하여 모든 한탄이나 탄성들은 아주 오래전 하늘로부터
연결되어 있었단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