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에 2027년 12월 1일이라고 쓰지 않았다. 그밖에도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오늘 하루 쓴 글씨는 2027. 12.1. 이것 뿐이다. 볼펜에 라벨을 붙이느라 쓴 것인데, 이걸 대체 왜 붙인 걸까. 괜한 소리 해봤자 우스울 뿐이다. 왜 모르겠는가. 종이와 연필이 함께 하지 못한 이 어긋남을 보면서 지난 시간을 함께 본다. 그 속에 후회할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던가. 있었다고 믿었고 그래서 후회도 하고 자책도 했지만, 소용없는 일임을 이제는 안다. 이 집구석에 있는 종이란 종이, 필기구란 필기구, 책이란 책은 모두 없애고 컴퓨터니 폰이니 하는 것도 죄다 버리고 나면, 마침내 올 것인가. 카타르시스가 당최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 뻔 하지 않았나. 그렇게 살 뻔 했다고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땅이 파이도록 길게 울어도 마침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마침내 흐르던 콧물이 멎고 끓던 가래가 사그라 드는 날. 그 오늘 같은 저녁이 있으리라. 지금 내게 말이다. 지금 당장의 일이라서 걷잡을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 분명하게 와있음을. 나는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