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금은 안창호의 생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78년 : 평안 남도 강서군 도롱섬에서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을 보고 들으며 신학문을 배울 것을 결심했다. 1895년 구세 학당에 들어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신학문을 배우게되었다.
1897년 : 독립 협회에 가입하여 평양 쾌재정 연설을 했으며, 1898년에는 이상재,윤치호,이승만 등과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1899년에는 점진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1900년 : 미국에 건너가 초등 학교 과정부터 공부하고 이듬해 교포의 권익보호와 생활 향상을 위해 한인 친목 단체를 만들었다. 한인 친목 단체를 발전시킨 '공립협회'를 결성했으며, 기관지인 공립 신보를 발행했다.
1906년 :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7년에는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1908년에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출판 사업을 이끌어갈 태극 서관도 건립했다. 1909년에는 신민회의 표면 운동의 하나로 청년 학우회를 세워 인격 수양과 민족 문화 향상을 위한 교육에 힘썼다.
1910년 : 안중근이 거행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그 뒤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안창호는 1912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를 조직했으며, 이듬해에는 흥사단을 조직했다.
1919년 : 3.1 운동 직후 상하이에 가서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내무 총장으로 일했으며 서재필 등과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4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국민회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흩어진 임시 정부 통합을 위해 힘썼다.
1932년 :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되었다가 병으로 보석되어 치료를 받던 중 지금의 서울 대학 부속 병원에서 1938년에 생을 마감했다.
1962년 :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