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이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 신나는 교과서 체험학습 23
서울역사박물관 지음, 김창희 그림 / 스쿨김영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책을 읽고 조선 시대 물가는 어땠을지 알아보겠습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려면 물건 값을 알아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해요. 조선 시대에는 물건 값이 어땠을까요?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책으로 가격을 비교해 보세요. 1575년<<고사촬요>>에 실려 있는 책값을 보면 <<논어>>라는 책은 면포 한 필 반이나 쌀 두 말 가격이었어요. 면포 한 필은 지금 돈으로 계산하면 약 4만원이니까 책값이 6만 원 정도였던 것이지요.  

책은 가격이 비싸서 아무나 살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답니다. 그럼, 돈이 없어서 이런 면포나 쌀로 계산했을까요? 아니예요. 고려 때부터 은화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조선 전기까지도 은화가 곧 돈이었어요. 은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유통되었고 주로 왕실과 관청, 지배층의 상인, 역관등이 이용했어요. 

하지만 서민 생활에서는 무명 천이 화폐의 가능을 담당했지요. 조선 전기에 법정 화폐는 종이로 된 화폐였어요. 이것을 저화라고 불렀지요. 그러다가 숙종 때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바로 상평통보랍니다. 

아하! 그런데 상평통보가 무었이지? 알아보자 

상평통보 :  1633년(인조 11) 김신국()·김육() 등의 건의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고 주조하여 유통을 시도했는데 결과가 나빠 유통을 중지하였다. 그후 1678년(숙종 4) 정월에 다시 영의정 허적(), 좌의정 권대운() 등의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다시 주조하여 서울과 서북 일부에 유통하게 하였다. 그 뒤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 유통하게 했는데,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올 때까지 통용되었다.


조선시대의 화폐. 화폐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었으며, 모양은 둥근 엽전으로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구멍을 뚫고, 앞면에는 구멍을 둘러싸고 상하좌우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한자를 한 자씩 찍었으며, 뒷면의 구멍 위에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박았다.

나는 오늘 이 책을 읽고 조선 시대 물가는 꽤 비싸고 물물교환으로 하다가 은화로 하고 또 동전을 만들게 되는 데 그것이 상평통보라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도 이런 책들을 많이 읽을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Grace 2012-11-02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평통보도 가짜가 있고 진짜가 있습니까? 어떻게 구분할수 있을까요?
만일 진짜면 가격이 얼마나 될까요? 회답 부탁합니다
 
한국 민속촌 : 옛 사람들의 마을로 놀러가요 신나는 교과서 체험학습 35
이흥원 지음, 정소영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안녕하세요. 저는 어제 이 책을 읽고 오늘 지역별로 집 모양이 다른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남부 지방은 다른 지방보다 무덥고 습기가 많지요. 그래서 남부 지방의 농가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방과 마루, 부엌을 나란하게 지었어요. 또 방과 방 사이에 마루를 두고 창문과 방문을 많이 만들었지요. 

반면 북부 지방에서는 추위에 대비할 수 있게 집을 지었어요. 방들이 서로 붙어 있고 창문은 크기가 작거나 되도록 만들지 않았지요. 그리고 건물은 마당을 둘러싼 형태였어요. 이중 특이한 것은 방과 부엌 사이의 정주간이에요. 주로 여성의 공간이었지만 손님을 맞거나 가조기 식사를 한 때 자주 이용했어요. 또 이곳이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라서 할머니가 손자들과 잠을 자기도 했어요. 이 구조는 뒤에 둘러볼  한지 공방에 가면 잘 갖추어져 있지요. 

중부 지방의 농가는 남부와 북부 지방의 형식을 절충한 'ㄱ'자형이나, 'ㄴ'자형,또는 둘이 결합된 'ㄷ' 자형이 많아요. 그래서 남부지방에 비하여 마루가 좁고, 창문도 적었어요.  

아하! 이처럼 농가의 모습은 지역별로 다른 지형과 기후에 따라 달라서 다 다르게 만든 것이구나! 플러스! 다양한 형태의 가신 신앙을 알아보겠습니다. 

성주 신앙 : 집을 보호하는 신이에요. 가정을 꾸리고 집을 마련하면 모셨지요. 

터주 신앙 : 집터의 신이예요. 뒤뜰 장독대 부근에 항아리를 놓고 모셨어요. 

삼신 신앙 :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비는 신이예요, 산모와 아이를 돌보는 세 신령을 말해요. 

조왕 신앙 : 부엌에 있는 불의 신이에요. 새벽녘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렸지요. 

칠성 신앙 : 북두칠성을 가리키지요. 장독대 곁에 정화수를 떠 놓고 가족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했어요. 

아하! 나는 이 책을 읽고 지역별로 집 모양이 농가의 모습은 지역별로 다른 지형과 기후에 따라 다른 것을 알았고, 옛날에 조상들이 다양한 형태의 가신 신앙이 집안 곳곳에 신이 있다고 믿었기 떄문이라는 것도 알아서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훈민정음 : 세계가 놀라는 우리의 글자 신나는 교과서 체험학습 9
한문희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안녕하세요. 저는 어제 이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읽고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들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럼 지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인지 : 조선 초기 문신으로서 대표적인 유학자 중 한 사람이에요. 역사, 천문, 역법, 아악을 정리하였고,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어요.  학문을 육성하고 제도 정비에도 기여하였으며, 권제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었어요. 

최항 : 조선 초기 문신이자 학자예요. 1434(세종 16년)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집현전 핛로서 훈민정음 창제와 <<용비어천가>>,<<세종실록>>등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어요. 

박팽년 :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단종 복위 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예요. 학사들 중에서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어요.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문 끝에 옥중에서 죽었어요. 

신숙주 : 조선 초기 문신이예요. 세종대왕의 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중국 명나라로 가서 언어학에 관한 지식을 얻어 훈민정음 편찬에 큰 공을 세웠어요. 뒤에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참여해 공신이 되었어요. 

이선로 : 조선 초기의 문신이예요. 1438년(세종20년)과거에 급제하고 집현전 교리를 거쳐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어요. 

강희안 : 조선 초기 문신이자 선비화가예요. 1441년(세종 23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서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대왕이 지은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덧붙였고,<<용비어천가>>이 주석도 붙였어요. 학자들에 의하면, 훈민정음 글씨를 강희안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성삼문 : 조선 초기 문신이자 사육신의 한 사람이에요.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고, 명나라에 가서 언어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공헌하였어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고 세조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했답니다. 

이개 : 조선 초기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예요.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어요.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었어요. 

나는 어제 이 책을 읽고 쓰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이 세종대왕말고 또 있는 것은 알았는데, 이름을 몰랐는데, 어제 이 책을 읽다가 훈민정음을 만근 사람들이 있어서 읽고 써서 내가 훈민정음을 만든사람이 8명이나 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나중에 이런 책들을 많이 읽어야 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여경 2011-12-03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숙제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됬어요!! 감사합니다.

김가윤 2012-05-16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국어 발표를 할 때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유익한 정보인 것 같아요.

권도훈 2013-03-2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독서토론할때도 잘료로 썼고 여태까지몰랐네요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이 8명이라는것을

손민정 2013-05-12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덕분에 숙제가 술술 풀리네요.

탁영서 2013-05-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숙제하는데도 도움 됬어요.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혼자서 만든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요.
새로운 소식 알고 갑니다.

. 2013-06-12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왕 사회 숙제인데...많은 도움이 됬어요*^^*

정답다. 2013-06-2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정다웁게 2014-06-29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도움 많이 됬어요.
 
맹꽁이 서당 15 - 고려시대 강종~공양왕 편 맹꽁이 서당 15
윤승운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안녕하세요. 마침내! 맹꽁이 서당의 15권만쓰면 맹꽁이 서당 책을 마스터!! 하지만 이런 한국사는 다시 못볼수도 있는데.... 암튼 힘차게 오늘은 충선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충선왕 : 초명 원(謜), 휘 장(). 자 중앙(). 충렬왕의 아들. 어머니는 원나라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 비는 원나라 진왕() 감마라(刺)의 딸 계국대장공주(薊  ), 조인규()의 딸 조비(), 서원후(西) 영()의 딸 정비(), 홍규()의 딸 순화원비() 등이었다.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로부터 특진상주국 고려국왕세자()의 호()를 받았다.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의 총애를 빙자, 횡포가 심하던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최세연() 등 40여 명을 죽여 궁중의 기강확립을 기도했다.

이 때 충렬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있었으므로, 무비 등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 정방()을 폐하는 등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제()·세제()를 정비하고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원나라와의 사이가 원만치 못하였고, 곧 이어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선위 7개월 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소환되었는데, 이 때 간신 왕유소() 등이 충선왕을 아주 폐하고, 그 대신 서흥후() 전()을 그 후사()로 삼으려는 공작을 했다.

1305년(충렬왕 31) 원나라의 성종()이 죽고, 그 후 황위()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을 도왔으므로 그 세력의 힘으로 왕유소 일당과 서흥후 등을 제거하였다. 1308년 심양왕()에 봉해졌고, 같은 해에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 후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과 공신자제()의 중용, 농·잠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억제 등 과단성 있는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정치에 싫증을 느껴, 제안대군() 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원나라로 가 전지()로써 국정을 처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각염법(榷  )을 제정하여 소금의 전매를 단행하여, 그때까지 사원()과 권문세가()에서 소금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았다.

1313년(충선왕 5) 아들 강릉대군(:충숙왕)에게 전위하고 계속해서 연경()에 머물러 만권당()을 지은 뒤 내외의 고금서적을 수집하였으며, 이제현(:고려인) ·조맹부(頫:원나라 사람) 등 대학자를 초빙하여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원나라의 환관 임파이엔토그스[禿]와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에 귀양갔다가 이제현 등의 간절한 소청으로 3년 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1325년(충숙왕 12) 5월에 원나라에서 죽었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능은 덕릉(:)이다. 


아하! 성종이 고려 제 26대 왕이었구나! 나는 오늘 이 책을 읽고 충선왕이 고려 제 26대 왕인 것 을 알아서 기쁘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나도 이런 책들말고 다른 한국사책들을 읽고 싶어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1-01-2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잖아, 지희 15개야!

납득이되여? 2011-01-2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쓴거 아님?
 
맹꽁이 서당 14 - 고려 시대 인종~희종 편 맹꽁이 서당 14
윤승운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맹꽁이서당14이라는 책을 읽고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경대승의 mystery(미스테리)를 알아보겠습니다. 

경대승 : 본관()은 청주()이며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경진()의 아들이다. 15세에 음서()로 교위()가 되고, 뒤에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아버지인 경진()이 권세를 이용해 남의 전지()를 많이 빼앗았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부정한 재산이라며 전지 문서를 모두 선군도감()에 헌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

1178년 충주() 사람으로 개경()에 적()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내려온 사람과 청주() 토착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하자, 청주()의 사심관()으로 그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책임으로 박순필()과 함께 파면되기도 하였다.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이 횡포와 비리에 분개하여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정균()을 제거하려 했다. 1179년(명종 9) 9월 허승(), 김광립() 등 무사 30여 명과 함께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인 송유인() 등을 죽이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명종(, 1131~1202)은 정균()이 차지하고 있던 승선()의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경대승()은 문관()이 맡아야 한다며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무신정변 세력을 제거하여 중방()을 무력화시키고, 무신정변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문관()과 무관()을 고루 등용하였다.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을 설치하였고, 무신()의 동정을 감시하고, 유언비어()를 엄격히 단속하였다.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허승()과 김광립()이 폐단을 일으키자 1180년 이들을 제거하였고, 문관()과 무관()을 가리지 않고 비리를 저지르는 자를 처벌하며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1183년 30살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그가 죽은 뒤 도방()은 해체되고 경주로 내려가 있던 이의민(, ?~1196)이 개경으로 올라와 실권을 장악하였다.  

아하! 경대승이 그럼 요약해서 따지자면 고려 무신이었던 사람이 바로 경대승이었구나! 나는 어제 이 책을 읽고 경대승이 바로 고려의 무신이었던 것을 알아서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