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 사람을 ‘본다‘고 할 때 그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보다 초상화 그리기에 가깝다. 특히 당장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볼 때가 아니라 기억을 떠올릴 때 더욱 그렇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아무리 친숙한 얼굴이라도 구체적인 사실들이 머릿속에 스냅사진처럼 상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 사항들로 합성된 이미지처럼 나타난다. 그 이미지는 선이 두드러지지 않는 램브란트의 그림처럼 회화적으로 구현된다.

-「초상화 그리기」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비합리적 힘에 도취된 상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합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훌륭한 화가일수록 스냅사진의 매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포착할 것이다. 물론 초상화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초상화 그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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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한 사회의 고민이 보이기도 하고 무의식이 보이기도 한다. 작가 요 네스뵈와 인터뷰했을 때 노르웨이에 이런 범죄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답하기를, 살인사건 보도를 볼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강력 범죄가 거의 없다고, 그의 말이 범죄소설을 즐기는 심리의 일부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피해를 입은 범죄를 장르로 소비하기란 쉽지 않다. 범죄 피해 유가족이면서 스릴러 소설 작가가 된 제임스 엘로이 같은 경우도 있지만, 범죄물을 즐기는 나 같은 사람의 심리란 대체로 안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기인한다. 내가 읽는 것이 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없다면 읽기 어렵다.

-「나를 파괴하러 온 나의 구원자-나의 스릴러 입문」에서

그렇기 때문에 ‘구경꾼‘으로서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심리가 여기 없는가 묻게 된다. 범죄물의 팬은 범죄를 소비하는가, 범죄의 해결을 소비하는가? 일상 미스터리 같은, 잔인함과 거리를 둔 듯 보이는 서브장르에서조차 ‘못된‘ 심리를 전시하는 일을 종종 본다. 사건에 휘말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판단하는 일, 타인을 의심하고 자신의 명석함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일의 속성이 그렇다. 타인을 이리저리 재 판단하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이 장르의 독자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의심받는 사람들에 대한 온갖 정보가 작품 속에 나열되기 때문이다. 의심할 만한 그 사람의 말과 행동, 생각들이.

-「나를 파괴하러 온 나의 구원자-나의 스릴러 입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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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대 로스쿨 교수 켄지 요시노Kenji Yoshino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同化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링covering‘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생리나 출산 등)을 티 내지 말 것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 문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장애로 인한 특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예다.

-「독해 능력과 공저자 되기」에서

만약 정의만이 문제라면, 계단이 10개 있는 회사에 장애인이 다니게 되었을 때 동료 직원들이 그 장애인을 번쩍 안거나 업어서 사무실까지 옮겨주는 것만으로도 ‘정당한‘ 편의 제공이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은 ‘정당한 편의 제공‘ 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런 방식은 장애인을 사무실로 들어가게는 하지만, 그가 휠체어를 자기 몸의 일부로, 일종의 ‘스타일‘로 삼아 오랜 기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유함은 정당하고 정당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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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반 고흐의 그림을 최고 성능의 컬러복사기를 이용해 복제한다면, 그 그림은 고흐의 원작과 다를까? 수준 높은 미술평론가들조차 원작과 모작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라면, 양자의 ‘산물로서의 가치‘는 동등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원작이 더 가치 있다고 믿는다. 왜 그런가?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performance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에서

우리가 ‘골형성부전증‘이나 ‘암‘ 또는 청각장애가 가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산물로서의 가치보다는 수행으로서의 가치를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수평적 정체렁으로서 옹호하고자 하는 장애나 질병, 너무 크거나 작은 키, 인종, 특정한 정신질환, 성적지향 등은 한 사람이 써 내려간 역사가 체화된 인간적 속성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납득하기 위해 그것을 해명하는 이야기(신화) 또는 이론(기상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역사학, 사회학 등)을 필요로 했다. 우리 개개인도 자기 인생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론을 만든다. ‘단 하나의 최종적인 이야기‘로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아마 가장 우아할 것이다. 뉴턴의 이론이 달의 움직임과 지구 위에서 떨어지는 사과의 움직임을 중력 하나로 설명할 때 보여준 위대함처럼.

-「인생을 설명하는 통합 이론」에서

병에 걸린 이유, 병에 걸린 자신의 몸과 일상을 삶 전체에 걸쳐 통합적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관심은, 병에 걸린 사람들이 각자 써 내려가는 인생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법은 병에 걸린 이들을 보호하고 치료하고 복지라는이름으로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개인들이 힘들게 구축해온 자기 서사와 나름의 이론을 종종 철저히 무시한다. 이런 ‘잘못된 삶‘들은 법 앞에서 구체적인 서사를 가진 개인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실격당한 삶이 된다.

-「인생을 설명하는 통합 이론」에서

자기 이야기를 자율적으로 써 내려가는 자기 인생의 저자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가 각자 고유한 이야기와 관점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 역시 우리가 가진 고유성, 자기 삶을 직접 작성하는 저자성authorship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작성‘이란 자기 삶의 경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해명(설명)하면서, 자기 선택을 반성적reflective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망상에 빠진 작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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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앗 리쓰가 드디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어...! ㅠ◇ㅠ 2D 캐릭터도 너무 오래 보니 아는 사람 같이 느껴져서 내가 다 감개가 무량한 와중에 작가가 생각지도 못하게 이이지마 가규의 누이 집안 떡밥을 회수하기 시작함 영원히 연재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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