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반 고흐의 그림을 최고 성능의 컬러복사기를 이용해 복제한다면, 그 그림은 고흐의 원작과 다를까? 수준 높은 미술평론가들조차 원작과 모작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라면, 양자의 ‘산물로서의 가치‘는 동등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원작이 더 가치 있다고 믿는다. 왜 그런가?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performance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에서

우리가 ‘골형성부전증‘이나 ‘암‘ 또는 청각장애가 가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산물로서의 가치보다는 수행으로서의 가치를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수평적 정체렁으로서 옹호하고자 하는 장애나 질병, 너무 크거나 작은 키, 인종, 특정한 정신질환, 성적지향 등은 한 사람이 써 내려간 역사가 체화된 인간적 속성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납득하기 위해 그것을 해명하는 이야기(신화) 또는 이론(기상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역사학, 사회학 등)을 필요로 했다. 우리 개개인도 자기 인생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론을 만든다. ‘단 하나의 최종적인 이야기‘로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아마 가장 우아할 것이다. 뉴턴의 이론이 달의 움직임과 지구 위에서 떨어지는 사과의 움직임을 중력 하나로 설명할 때 보여준 위대함처럼.

-「인생을 설명하는 통합 이론」에서

병에 걸린 이유, 병에 걸린 자신의 몸과 일상을 삶 전체에 걸쳐 통합적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관심은, 병에 걸린 사람들이 각자 써 내려가는 인생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법은 병에 걸린 이들을 보호하고 치료하고 복지라는이름으로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개인들이 힘들게 구축해온 자기 서사와 나름의 이론을 종종 철저히 무시한다. 이런 ‘잘못된 삶‘들은 법 앞에서 구체적인 서사를 가진 개인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실격당한 삶이 된다.

-「인생을 설명하는 통합 이론」에서

자기 이야기를 자율적으로 써 내려가는 자기 인생의 저자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가 각자 고유한 이야기와 관점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 역시 우리가 가진 고유성, 자기 삶을 직접 작성하는 저자성authorship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작성‘이란 자기 삶의 경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해명(설명)하면서, 자기 선택을 반성적reflective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망상에 빠진 작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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