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정의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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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페이스 오페라의 매력

 스페이스 오페라란, SF의 배경을 빌려서 신화나 서사시적인 내용을 풀어놓은 소설이다. 여기에는 엄격한 과학이론이나 고증이 필요하지 않다. 소설 내의 모든 장비들은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체로 비과학적이고, 과학보다는 인간의 상상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이런 점을 좋아한다. 물론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에서 비롯된 소설도 흥미롭지만, 이렇게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과학소설을 읽는 것은 훨씬 편안하기 때문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또 다른 매력을 꼽자면, 인간세계를 옮겨놓은 듯한 서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외계 생명체들과 인공행성, 수 많은 우주함대가 등장하지만, 그 인물들의 행동은 인간과 매우 비슷하다. 체스는 체스인데 말의 생김새가 특이하고, 말들이 날아서 움직일 수 있는 특이한 체스의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이런 특징은 독자들이 소설의 내용과 전체적인 흐름을 쉽게 받아들이고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요소이다. 

 그렇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의 장점에 편안함과 익숙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장르의 가장 큰 매력은 자유로운 설정놀음에 있다. 작가는 자기 마음대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세계의 신화, 역사, 문화 등이 생겨난다. 이런점에 비추어보면 스페이스 오페라는 판타지 장르와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세계의 창조주로서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다른 장르와 달리 스페이스 오페라의 세계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고, 거기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중력이 없고 빛 보다 빠른 우주선이 있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의 우주에서는 아무 문제없다. 

 동시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진중하기도 하다. 이 장르도 작품 속에 인간세계의 모습을 반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사에 제약이 없다는 특징 덕분에 작가는 더 쉽게 작품 속에 현실과 유사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가치관이 투영된다.

 <사소한 정의> 역시 꽤나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인공지능과 자아에 대한 고민, 획일적 사고, 배타적 계급주의, 성차별, 인간의 폭력성 등 은유로 볼 수도 있는 여러가지 사건들이 펼쳐진다. 그때문에 주인공인 브렉이 살아가고 있는 우주는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 속에 잠겨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분위기를 싫어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 속의 그 어두운 공기가 좋았다.


떡밥 보따리

인기있는 시리즈 영화나 드라마에는 항상 떡밥이 있다. 소설에도 마찬가지다. 떡밥은 중간 기착점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서사 속에 떡밥이 없다면 독자는 스토리의 끝까지 하나의 소재에만 집중해야하고, 그렇게되면 필연적으로 피로감을 느끼고 곧 책을 덮게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 흥미로운 떡밥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그것을 따라가는 동안 긴 스토리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소한 정의>의 떡밥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가장 궁금한 내용은 프레즈거에 관한 것이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프레즈거의 위엄이 실로 대단하기 때문인데, 등장인물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라드츠 군주조차 그들을 함부로 어쩌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단지 라드츠와 맺은 조약을 통해 그들의 태도와 우주에서 그들이 갖는 위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과연 프레즈거가 단순히 스페이스 오페라의 필수요소인 강력한 악당일지, 아니면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종족일지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어느쪽이 되었던 간에, 이들이 스토리의 중심에 등장한다면 더욱 흥미진진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293쪽
 -“왜냐하면 프레즈거와 우리가 체결한 평화조약이 프레즈거가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인 ‘유의미종’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 ‘무의미종’을 죽이는 건 프레즈거에겐 아무 문제가 없어. 그리고 같은 종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도 문제가 없지. 하지만 다른 ‘유의미종’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건 용인 할 수 없다는거야."


 또 하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드츠 군주에 관한 것이다. 어떤면에서 라드츠 군주는 보조체와 닮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와 보조체 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과거 역시 흥미로운 소재이다. 그녀는 왜 보조체가 되었을까? 보조체가 되기 전 그녀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런 떡밥들이 회수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야 할 것같다. 


라드츠, 낯이 익은데?

 라드츠 3부작은 말그대로 라드츠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라드츠 제국의 모습을 보다보면 익숙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사는 곳만 다를뿐 지구인의 행태와 매우 비슷했다. 적어도 전쟁과 계급에 대한 태도에서는 그러했다. 특히 오온 대위의 출신을 문제삼던 토렌호 장교의 모습은 거의 지구인 사회의 클리셰처럼 보였다.

 전쟁. 그들이 말하는 “병합”에 있어서, 아마도 라드츠 역사에서 최초의 “병합”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도 그러하듯이 전쟁은 인간의 손에 의해 한 번 시작되면, 인간의 의지로 멈출 수 없다. 전쟁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희생자를 찾게된다. 라드츠에서도 마찬가지였다.“병합”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병합”이 필요했고, “병합” 자체가 “병합”의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특정한 인물의 의지에 따라 “병합”이 수행되기에 이르렀다.
 
 이쯤되면 아무리 지성이 발전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잘린 신체조직을 재생시키고, 함선에 인공지능을 장착하는 엄청난 문명인들도 결국 폭력을 손에서 놓질 못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것을 옳은 길이라고 믿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인간보다 더 폭력에 알맞게 진화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투철한 신념, 라드츠인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종족이었다.

272쪽
-“확장과 병합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야. 하지만 필요했어. 처음부터 그랬지. 라드츠 본국 주변을 완충지대로 감싸  어떤 종류의 공격이나 간섭으로부터도 보호하려면 그게 필요했어. 나중에는, 저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필요했고, 그리고 문명이 미치는 범위를 확장하는데 필요했고… 이전 병합의 비용을 치르는데 필요했고, 보통의 라드츠 국민에게 부를 제공하는 데 필요했어."

314쪽
 -“나는 라드츠가 최근에 내렸던 결정과 정책들에 대항하는 논쟁이 시각적으로 벌어지기를 원했다 … 나는 한번에 탄민드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내게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누군가를 제거할 수 있었겠지.  소소한 목표들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경계심을 늦추거나 무장을 해제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두에게 각인시켜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능한 손에 권한을 부여해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도."


사소한 정의의 정의

 독자가 소설을 만나는 가장 첫번째 문장은 제목이다. 그런점에서 제목을 대충 짓는 작가는 많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소한 정의>는 무슨 뜻일까? 나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만들어봤다. 물론 텅 빈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기 때문에 별 설득력은 없다. 

 우선, 가장 무난한 것은 Ancillary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브렉이 저스티스 토렌의 부속물이었음을 나타낸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저스티스라는 단어가 이 정도로 단순하게 사용되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저스티스는 라드츠인이 믿는 정의. 그들의 “병합”을 정당화하는 정의를 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소설 내의 라드츠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병합"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언젠가는 당신들이 우리에게 감사 할 날이 올 것이라는 태도마저 보인다. 
 
 그러나 라드츠 군주가 말한 병합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되면 병합의 목적으로써 라드츠인이 갖는 정의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전쟁과 정복을 정당화하는 정의가 사실은 곁다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저스티스의 부속물인 보조체와 라드츠인들이 갖고 있는 부차적인 목적으로써의 정의. 이 두 개의 justice가 책의 가장 앞을 장식하고 있는 <사소한 정의>인 것이다.


나만의 재미를 찾아서

 지금까지 이 책에대한 리뷰를 진지하게 써내려왔지만, 사실 이 소설은 읽기에 따라 여러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 속 라드츠와 주변 우주의 모습에서 인류의 역사를 보았고, 브렉의 모험을 통해서 첩보물이나 복수장르의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찾았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면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로맨스 소설로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페미니즘적 요소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에 거부감이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꼭 한 번 읽어보고 자신만의 재미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 생각없이 읽어도 재밌는 소설이다. 그게 스페이스 오페라의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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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0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대가로 이언 뱅크스도 유명한데, 그의 ‘컬처 시리즈’를 열린책들 출판사가 꾸준히 펴냈으면 좋겠어요. 책이 잘 안 팔려서 그런지 후속작 출간 소식이 뜸해졌어요.

Postumus 2016-06-03 17:52   좋아요 0 | URL
사실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는 영화만 좋아했는데 이번 기회로 좀 읽어봐야겠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