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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곽미경 지음 / 자연경실 / 2019년 1월
평점 :
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한중일 3국 실학자 99인 중 유일한 여성 실학자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빙허각 이씨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규합총서, 청규박물지와 같은 저서활동과 더불어 자동약탕기 발명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음에도 그녀의 이름은 왜 역사 속에서 잊힌 것일까, 안타까움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이제껏 조명 받지 못했던 한 여인의 일생을 책을 통해 만나보게 되어 반가웠다.
명망가의 막내딸로 귀염 받으면서 자란 빙허각 이씨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소설 속 배경이지만 청나라 연행길에 합류해 건륭제를 만나 자신의 당당한 포부를 밝힌다.
“기댈 빙, 빌허, 집각 빙허각이온데 ‘허공에 기대어 선다’라는 뜻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담은 이름입니다.(p107)”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겠다는 것, 지금에야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의 이름 그 자체보다는 누군가의 아내 혹은 어머니로 살았던 그 시대 여성들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당돌한 언사다. 빙허각이 연경에 가는데 힘쓴 세손과 풋정에 빠지지만 마치 태양을 하루 종일 바라보며 움직이는 해바라기들 같은(p148) 세손의 여인들을 보며 목각인형 같은 삶을 거부한다.
빙허각 이씨의 언니는 시댁에서의 모진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자진을 하였는데 이는 빙허각의 친정 집안에 큰 상처로 남는다. 혼기가 찬 빙허각에게 아버지 이창수는 말한다.
“넌 벼슬아치에게 시집가지 말고, 책 읽기를 술 먹기보다는 좋아하고, 평생 우리 딸의 예쁜 모습만 눈과 가슴에 담고,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만큼의 차밭을 가진 눈빛 선한 선비에게 시집을 갔으면 좋겠다.(p55)”
아비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빙허각 선정은 연행 길의 부사 서호수의 큰아들 서유본을 만나 짝을 이뤄 평생을 해로하길 약속한다. 남편 유본과 시동생 유구와 함께 수학을 깨우치며 공부를 지도하지만 유서 깊은 달성서씨 가문의 맏며느리의 업무는 과중하기만 하다. 총명한 내자를 도와 내자가 가고자 하는 길을 함께 가고 싶다는(p187) 유본의 발언은 시어머니 한산 이씨의 미움을 사 빙허각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종부로서 해야 할 의무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자동약탕기의 발명이란 과업을 이룬다. 금술 좋은 부부는 자손을 번창하고, 함께 수학한 시동생 유수의 과거급제와 왕위에 올라 마땅한 세손의 즉위는 달성서씨 집안의 영광을 불러온다.
탄탄대로를 달리는 인생에는 흥망성쇠가 있는 법. 찬란함에 반짝이던 시절은 과거의 영광일 뿐, 정조 사후 달성서씨 가문은 낭떠러지로 내몰린다. 집안 어른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간 빙허각이 말처럼 홀로 살아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시아버지 서호수를 보내며,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녀의 기둥을 자처했는지를 알게 된다.
빙허각이라며 허공에 기대어 산다 오만하였지만 사실은 당신이라는 큰 기둥에 기대어 살았던 것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p310).
집안이 곤궁해지고, 여염집 아낙네였던 빙허각은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이때 대규모 차밭을 경영해 다시 한 번 그녀의 능력을 발휘한다. 아슬아슬하게 지탱하던 그녀의 일상은 큰 아들 민보의 죽음을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그 아이를 위해 나무를 심었지만 열한그루나 되는 나무의 주인은 이승에 몇 남지 않게 되고 이 아픔은 그녀의 영혼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산산조각 내버린다(p388).
그녀에게 그 어떤 인생의 낙을 찾을 수 있으리. 참척의 고통을 딛고 일어나 소녀 시절 갈망했던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다시금 그녀의 심장을 떨리게 한다. 빙허각은 남편과 시동생의 든든한 지지로 규합총서 5편을 완성한다.
첫째는 <주사의>니 무릇 장 담그며 술 빚는 법과 밥, 떡, 과일, 온갖 반찬이 갖추어 지지 않은 것이 없다.
둘째는 <봉임칙>이니 심의, 조복을 손으로 마르고 짓는 치수 및 물들이기, 길쌈하기, 수놓기, 누에치기 등과 그릇 때우고 등잔불 켜는 모든 방법을 덧붙였다.
셋째는 <산가락>이니 무릇 밭일을 다스리고 꽃과 대나무 심는 일로부터 그 밖의 말이나 소를 치며 닭 기르는 데 이르기까지 시골 살림살이의 대강을 갖추었다.
넷째는 <청낭결>이니 태교, 아기 기르는 요령과 삼 가르기와 구급하는 방문이며, 아울러 태살이 있는 곳과 약물 금기를 덧붙였다.
다섯째는 <술수략>이니 집의 터전을 정하는 법과 음양의 꺼리는 법을 알아 부적과 귀신을 쫓는 일제의 방법에 미쳤으니, 이로써 뜻밖의 환란을 막고 무당이나 박수 따위에게 빠짐을 멀리할 것이다. (p399)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 그녀에게 더 이상 빼앗을 것이 남은건지 한날한시에 죽고 싶어 했던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부인인 빙허각을 그 누구보다 신뢰한 남편 유본, 좌소산인의 죽음은 그녀의 삶의 의지를 앗아버린다.
이 책을 읽은 시간이 야심한 새벽이라 그러한가. 먼 길을 떠나는 좌소산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하염없는 눈물을 자아냈다. 나도 그와 그녀처럼, 변함없이 한결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수님은 남편과 태어난 지 열다섯 해 만에 반쪽씩 합해 부부가 되었고
부부가 된 지 마흔아홉 해 만에 미망인이라 칭하였다.
그로부터 또 세 해만에 합장하여 다시 합했으니
그 헤어짐과 만남을 헤아려보면
어느 것이 짧고 어느 것이 길까?
그 말씀을 실천하고 뜻을 이룬 것을 슬퍼하여
명을 써서 드러내노라.”
시동생 서유구가 바친 빙허각의 묘지명처럼, 그와 그녀의 신뢰 가득한 사랑은 이승을 떠나 저승에서도 혼과 백이 만나리라 믿는다.
빙허각 이씨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담은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고 허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그녀의 삶에 몰입했다. 다른 사람이 정해주는 삶이 아니라, 나다움을 꿈꾼 소녀는 그녀의 신념에 맞는 길을 꺾이지 않고 묵묵히 걸었으며 그 저서를 후대에 남김으로서 약속을 지켰다.
처음에 이 책을 읽기 전, 실학자라고 하여 정약용의 거중기처럼 거대한 물건을 발명한 건가 싶어 호기심가득하게 읽었지만 그러한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눈에 보이기에 거대하고 생각하기에 위대한 것만을 실학이라 여긴 나의 아둔함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내고 영정조 시대의 아낙네가 되어 실용적인 게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지금에야 당연한 것들이, 그때는 당연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실학,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더 실용적인 걸 연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책을 계기로 이타적인 삶을 지향한 빙허각이 좀 더 조명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