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리아스 ㅣ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1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평점 :

인류의 위대한 대서사시, 일리아스
아, 그러나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 (p102)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와 같은 고전의 공통점은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어디선가 들어는 봤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는 거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던 대작을 진형준 교수의 축역본으로 읽으니 술술 읽혔다. 그동안 완역본으로 읽어야 진정 그 책을 읽었다 말할 수 있지 않냐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있었는데 쉽게 읽을 수 없다는 두려움에 아예 읽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더 부끄럽게 느껴진다.
10여년을 혈투의 장으로 만든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우습게도 한 여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 헬레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프로디테의 농간으로 남편 메넬라오스와 생이별한 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여자가 된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가장 분노게이지를 높이는 인물은 누가 뭐래도 파리스였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비겁한 겁쟁이였고, 자신 때문에 전쟁터에서 목숨 바쳐 싸우는 이들에게 그다지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무능하지만 여자만 밝히는 동생을 둔 죄로 영웅의 표본이라 일컫는 왕자 헥토르는 동생 뒤치다꺼리 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다. 그리스의 위대한 전사로 발뒤꿈치, 아킬레스건의 유래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킬레우스의 존재로 인해 전세가 뒤 바뀔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인데 고작 파라스 따위에게 최후를 맞이한다는 게 영 찜찜하다.
일리아스의 묘미는 누가 뭐래도 신들의 전쟁이 아닐까 싶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그리스파와 트로이파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올림푸스 최고 신 제우스의 결정은 한낱 인간의 운명을 너무도 쉽게 뒤바꾼다. 신들의 전쟁에 괜히 새우등인 인간이 낀 느낌이랄까. 그리스신화의 특징이자 묘미지만 신들이 너무 인간다워서 저런 사람들이 신이라니, 한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인간의 생사여탈권이 온전히 신에게 있다니! 제우스가 마음먹는 대로 전선은 수십 번씩 바뀐다. 그의 의지가 곧 승리라니. 장장 10년의 전쟁동안 애꿎은 죽음을 맞이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병사들이 가엾게 느껴진다. 일리아스를 처음으로 완독을 했는데 요즘 나오는 막장 드라마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막장의 끝판 왕이랄까. 옛날 사람들은 음유시인이 이런 막장 스토리를 읊어주면 참 좋아했나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역시 막장이었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서사시로 칭송받는 일리아스를 끝까지 읽어 뿌듯하다. 진형준 교수의 일리아스는 다른 책과 차별되는 특징이 있는데 일단 에피소드 중간 중간 해당 내용에 알맞은 명화를 삽입하였다. 그림과 함께 글을 읽으니 좀 더 이해가 잘 되는 느낌이다. 또한 이 장면을 예술가들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순히 일리아스를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책 마지막에는 토론거리를 던져준다. 청소년들을 위한 책이라 말하지만 사실 성인에게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어렸을 때는 누가 억지로 시켜서라도 책을 읽고 생각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말 그대로 문자만 읽는 독서를 하게 되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어떤 부분을 고민해야 할까 누군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니 참 좋다.
살면서 꼭 한번 쯤 읽어봐야 할 고전을 읽고는 싶지만 그 방대한 양과 어려운 어투로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진형준 교수의 축역본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고 상식이 쑥쑥 자라나는 것 같다. 현재까지 30권의 시리즈로 출간되었는데 다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