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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답사기
신정일 지음 / 푸른영토 / 2019년 8월
평점 :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주장을 외치는 동학도들을 조선왕조는 회유와 군대로 막으려 한 것이다(p260).
내가 진정 혐오라는 표현으로도 다 표하지 못 할 만큼 증오하는 임금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단연 고종이다. 망국을 눈앞에 두고서도 제 이권 챙기기에만 여념 없었으며 무능한 주제에 탐욕스럽기만 하고 사리분별도 못해 민중의 삶을 고달프게 만든 이, 훗날에 와서 그 원을 제 아비와 부인에게 다 떠넘기기까지 했으니, 어찌 보면 참 운 좋은 사내는 맞다. 고종을 평할 때 무능한 건 맞지만 당시의 조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그를 최악의 임금으로 꼽기보다는 시대를 잘못타고 난 불쌍한 사람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에서 그와 조선 조정이 벌인 행태를 떠올린다면 선조와 인조가 양반으로 보일 지경이니. 왕조를 바꾸겠다는 것도 아니요, 무능력한 조선 왕실이 하지 못하는 척양척왜를 외치는 제 백성들에게 총, 칼을 들이민 자를 어찌 국부라 할 수 있겠는가? 동학도들의 피가 한반도를 짙게 물들였어도 건재했던 탐관오리 조병갑의 위세를 떠올리면 고종의 무능함에 치가 떨린다.
그는(최시형, 동학 2대 교주) 재판장 조병직과 판사 조병갑에 의해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6.2일 교수형을 받았다. 그에게 사형을 내린 사람은 동학농민혁명을 일어나게 한 장본인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p265).
<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 답사기>는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어야만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 흐름을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p7)”는 동학의 핵심사상은 당시 기득권이었던 이들에게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을테다. 자신들을 지탱해 주는 사상을 위태롭게 할 수 있으니, 수탈당하고 고통스럽게 외치는 농민들의 외침을 외면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를 시작으로 장흥까지. 만약 고부에서부터 장흥까지 살아남은 동학교도가 있다면 그 험난했던 여정이 얼마나 고됐을지 상상해보며 이 책을 읽었다. 내가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더라면, 이 길을 걸으며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그저 바라는 건 모두가 존중받는 세상일 뿐이었는데, 죽음 앞에서 의연해야 했을 그들의 울분이 내게 전해져 긴 여운이 남았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해 먹어도 정도껏 해먹어야지, 말 그대로 백성들을 수탈하다 못해 못 살게 만든 고부분수 조병갑의 횡포로부터 시작된다. 이미 제 구실을 못하는 왕실의 관직은 더 이상 명예가 아니었으니.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그 시대, 당하기만 하던 농민들이 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실상 이걸 무기라 말하기도... 농민들이 무슨 무기가 있겠는가?) 사건의 진장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 온 관리도 탐관오리. 임금도 멍청. 생각만 해도 답이 없는 대환장파티니, 살기 위해 울부짖던 농민들의 기세는 황토현, 황토령 전투에서의 승리를 부르고 전주에 입성하는 쾌거를 올린다. 당시의 일을 교과서 속 몇 줄로만 배웠던지라 잘 알지 못했는데 전주화약이 체결되기까지 급박했던 혁명군의 상황도 알게 되어 나를 더 분노에 차오르게 한다.
전라도와 충청도를 오가며 말 그대로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했던 동학교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각 지역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준 답사기를 읽으며, 외세를 끌어들인 조선 정부로 인해 왜군과 싸워야 했던 우금치에서의 패전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1차 동학농민혁명과 달리 2차 동학농민혁명은 그 자취조차 희미하다는 저자의 증언을 곱씹어보니 실상 가봤던 지역임에도 ‘동학’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나오는 몇 줄로만 그들을 기억하기에는, 처참하게 쓰러졌던 그들의 생을 미처 헤아릴 수 없을 것 같다. 나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답사를 실제로 다녀왔던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역사 초심자가 읽기에는 조금 난이도가 있고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서 진행하는 답사에 한번 참여해보고 이 책을 읽는 다면 그들의 바람이, 최신 무기 앞에서 쓰러졌을 그들의 마지막 열망을 더 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