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정명수 옮김 / 모모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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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년이었을 때의 레옹 베르트에게 (p7).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유명한 생텍쥐페리의어린왕자. 어린 왕자는 올해 초에 다른 버전으로 한 번 읽었는데 한 해의 마지막에 다시 읽으니 새로운 책을 읽은 것 같다. 왜 사람들에게 읽히고 또 읽히는 명작이라 불리는지 조금을 알 것 같다.

 

어린왕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동심이다. 이상한 모자를 그리고는 코끼리를 소화시키는 보아뱀이라고 우기는 이 어처구니없는 설정이 어른이 될수록 상상력이 빈약해 진다는 걸 알려주는 에피소드다. 소행성 B612출신의 어린왕자는 아주 작은 소행성의 주인이다. 꽃과 싸우고 여행을 떠난 어린왕자는 다른 소행성에서 기괴한 이웃들을 만난다. 처음 만난별에서는 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린왕자를 대사로 임명한다며 함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린왕자는 떠난다. 허언쟁이도, 술꾼도, 소유에만 집착하는 사업가도 어린왕자에게는 이상한 어른일 뿐이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가로등지기를 만나서야 비로소 그가 이전의 이웃들보다는 조금은 더 가치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바빠서 정작 탐험은 떠나지 못하는 지리학자의 추천으로 지구라는 곳을 오게 된 어린왕자는 사막에서 뱀과 여우를 만난다.

 

그런데 길들이다는 말이 무슨 뜻이니?”

요즘엔 많이 잊혀진 말인데,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p100)

 

내가 예전에 어린왕자를 읽었을 때, 여우와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의미가 이렇게 무거운 의미라는 걸 알았을까. 초등학교때 친한 친구들에게 명언 문구를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때 자주 등장했던 게 어린왕자와 여우의 에피소드였다. 그때는 막연히 좋은 글이라 생각했던 이 문장이, 지금은 왜 이리도 아리게 와 닿을까. 누군가에게 자연스레 스며들어 길들여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건지, 떠나는 어린왕자를 눈앞에 두고 눈물 흘리는 여우를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어른인 비행기 조종사 가 얼마나 무심했는지, 어린왕자의 진심을 알아주기엔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몽상가가 되기엔 너무 커버린 것이다. 어린왕자가 바라는 건 그와 함께 하는 시간과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비행기를 고치고,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나에게 그렇듯이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도 어딘지 모를 그 어느 곳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 한 마리가 장미꽃을 먹었느냐에 따라 우주 전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하늘을 보라. 그리고 그 양이 꽃을 먹었는가, 먹지 않았는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런데 그것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어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려 든다. 우리가 쓸데없다 여기는 것들이 새롭게 보일 때, 어린왕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다. 내 안의 어린왕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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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김그린 옮김 / 모모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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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p152)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결국 아브락사스를 찾은 여정인걸까. 처음 읽는 책은 아니지만 이번에 재독하니 확실히 처음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상당히 거슬렸지만 중2병스러운 싱클레어가 정서적으로 힘겨워할 때, 그 곁에서 이끌어준 이는 데미안이었다. 이전에도, 지금도 항상 의문인 것은 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신경을 쓰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싱클레어는 누가 봐도 어른인 척하는, 어른인 척 보이고 싶은 어린 아이였다. 소위 삥 뜯김을 당하는 크로머와의 에피소드는 싱클레어의 어리석음에 탄식했다. 데미안과 헤어지고 싱클레어가 벌인 온갖 비행청소년의 정석과도 같은 행위는 도대체 이 아이의 결핍이 무엇인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게 했다. 싱클레어의 중2병은 여전히 수습불가였지만 그의 영혼의 끌림이 베아트리체에서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으로 옮겨가기까지, 그 과정을 생각해봤다.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며 한 상상은, 결국 데미안을 그리워해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인가. 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마치 운명의 실이 연결된 것처럼 만날 수 있는 거지? 데미안에게 싱클레어는 어떤 존재이며,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어떤 존재인가.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를 찾은 걸까. 아브락삭스가 나타내는 건 무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괴로운 이유는 나 조차도 답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내가 하는 고민을 해봤으며 과연 이 답을 과연 알까, 싱클레어의 성장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싱클레어의 방황하는 영혼이 점차 하나로 모아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갈 길 잃었던 유년시절의 그와 달리, 전쟁을 겪고 사랑하는 것들을 잃은 싱클레어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 전쟁이라는 잔혹한 수단이지만 한 사람을 성장시키는데 이보다 더 강력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책 뒤에 작품 해설집이 실려있는데 솔직히 읽어도 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 그저 싱클레어가 중2병을 극복하고 조금은 더 사람 구실하는 청년이 된다는 것, 그 과정에 방황도 많이 하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관계 맺는 법을 배운다는 점에서 데미안이 성장소설의 대명사로 손꼽힌다는 걸 느꼈다. 도대체 데민안은 왜 싱클레어를 기꺼워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았다. 세계명작의 묘미는 읽을수록 새롭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모모북스에서 나온 데미안은 번역이 간결하고 깔끔해서 난해한 데미안을 다행히도 조금은 덜 난해하게 만들어줬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같은 문장이 또 다르게 와 닿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에 읽은 데미안은 이전에는 그리 깊이 생각지 않은 아브락사스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재독, 삼독도 충분히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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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 하 - 반룡, 용이 될 남자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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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왕의 패업을 이루는 길에서 우리는 함께 사우는 지기니라. 만약 나를 그저 귀하고 연약한 여인으로만 본다면 나를 알고 믿는 그 소기가 아닐 것이고, 나 또한 그런 평범한 사내와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p404).

 

비록 처음은 삐끗거렸던 만남이었으나 어느새 소기와 왕현은 패업의 길을 위해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된다. 천상 무인이었던 소기에게는 이미 사람의 목숨이 하찮았겠지만 규방의 귀한 여인이었던 왕현도 점차 피도 눈물도 없는 여인으로 변모한다. 제 대의 업보를 다음 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잠시나마 황제의 자리를 맡아 줄 장기짝이 필요했기에 불러온 자담과의 만남은 그녀와 소기 사이를 잠시 멀게 만들지만 이내 둘의 사랑을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된다. 한때는 흠모한다 믿었던 자담의 짝을 제 손으로 지어주는 왕현의 독한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자담의 성정은 차분하고 온화했다. 그는 결코 투쟁하지 않고 상황에 순응했으니. 모든 것을 투쟁해서 얻은 왕현의 낭군 소기와는 전혀 반대의 인물이었다. 만약, 태평한 시대였다면 왕현에게는 자담이 어울렸을지 소기가 어울렸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한 가지 확실한건, 만약 왕현이 예장왕비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목숨역시 한 줄의 역사로도 기록되지 않은 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곱고 어여쁜 미인이 아무리 많은들 눈앞에 있는 이 한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그의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내 유일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풍랑을 막아야만 할까? (p223).

 

 

패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내를 만나 그에 걸맞은 걸출한 배우자로 손색없던 그녀였지만 세상은 그들을 단 한시도 편하게 두지 않는다. 자식이 없는 이들 부부를 호시탐탐 노리는 외부의 방해와 싸우고, 평범한 아녀자로 전락하는 자신에게 왕현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목숨과 맞바꾸어 소기의 아이를 낳았지만 정작 함께해야 할 순간에 낭군은 없었다. 소기의 부재는 왕현의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배신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계략을 짜는 왕현의 비상함은 그녀를 빛나게 했다. 하지만 산고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쳐온 수많은 사건들은 그녀의 수명을 갉아먹었고, 개국황후에 올랐음에도 그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 채 미인박명의 허망함을 남겼다.

 

천하의 제왕이 된 것은, 소기에게는 평생의 큰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자 앞으로 남은 인생의 웅대한 계획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격렬히 싸운 반평생을 끝내는 것이었다. 마침내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더는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이 세상에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누구도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었다(p464).

 

천하를 지배하는 제왕이 된다한들, 그 자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 누구도 그들을 헤치지 못하지만 하늘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천하를 얻었다 한들, 세상의 모든 영약으로도 한 여인의 목숨은 살릴 수 없었다.

 

왕현의 이른 죽음은, 깊은 여운이 남게 만들었다. 그들이 천하의 제왕이 되기 위해 흩뿌린 피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결말이 걸맞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의 치열한 투쟁을 가장 가까이서 봐왔기에 이제야 겨우 행복해질 찰나에,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그녀의 처지가 참 안쓰러웠다.

 

죽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왕현을 저버리지 않고 그녀만을 그리는 소기의 외로움을 보면서 왜 이리도 가슴이 아린건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제왕이고 패업이고 다 부질없으니, 한 평생 서로 같은 길을 걸으며 오래도록 서로의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왕현과 소기의 일대기를 따라가 보면 정말 어마어마하다. 단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그렇기에 순식간에 완독했다. 왕현과 소기를 떠나보내는 이 아쉬운 마음을 잘 아는지 2020년에 드라마로 제작된다하니, 반드시 본방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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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 상 - 아름답고 사나운 칼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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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부모님 슬하에서 마냥 응석을 부리던 어린 아무는 사라지고, 지금은 한 남자의 아내인 왕현만이 남았다 (p93).

 

명문세가 랑야왕씨의 금지옥엽 왕현, 지고한 황제폐하도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혀 귤을 까먹일 만큼 만인의 사랑을 받던 그녀의 평온했던 삶은 결혼으로 인해 어그러진다. 어머니가 황제의 누이요, 아버지는 황후의 오라비니 이보다 더 존귀한 핏줄이 어디 있겠는가. 어린 아무는 모든 게 허용됐지만 장성한 처녀 상양군주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한미한 가문 출신의 무장 예장왕 소기와 혼인을 한다.

 

영예와 책임, 이제 보니 모든 행복에는 대가가 있었구나 …… (p59).

 

명문 세가의 여인에게 사랑은 사치요, 어릴 적부터 정을 통한 셋째 황자 자담을 가슴에 묻고 올린 혼인의 대가는 첫날밤의 소박이었다. 제 아무리 돌궐의 대군이 변경을 침범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새 신부에게 얼굴을 맞대고 작별인사조차 고하지 못할 만큼 시급하던가. 이리도 허망하게 헤어진 영웅과 미인은 3년여의 시간이 흐를 동안 서로를 돌보지 않고 허울뿐인 부부로 살아간다. 지난 날 행복의 대가는, 지독한 외로움과 천시였다.

 

수도인 경사를 떠나 휘주에서 요양 중이던 왕현은 예장왕 소기에게 억한 마음을 품은 돌궐의 잔류세력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모순되게도 이 납치로 인해 서로 떨어졌던 신혼부부가 만나게 된다.

 

어서 가요, 나는 이자와 함께 죽을 터이니!” (p186).

오늘 이후로 당신은 나의 비이자 나와 이번 생을 함께할 여인이오. 나약함은 용납할 수 없소.”

 

죽음 앞에서 돌궐의 왕자와 동귀어진을 각오한 영웅의 아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연약하고 보호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제 신부를 알았던 소기의 마음이 요동친다.

황실의 음모가 도사리는 와중에 휘주성을 성공적으로 지킨 왕현의 재치와 지략은 소기에게 왕현을 평생을 함께할 유일한 여인으로 각인한다. 왕현은 제 혼인이 자신을 사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의 배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잠시 방황하지만 이 조차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왕씨가문의 상양군주가 아닌 예장왕 소기의 배필 예장왕비 왕현으로 살기위해 마음을 다진다.

 

무려 1,000페이지가 넘는 긴장감 넘치는 소설이지만 언제고 타의적으로 살아야 하는 황실 여인들의 운명이 너무 안타까웠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황실의 비정함은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전면에 드러난다. 등장인물 면면이 살펴보면 누군가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뿐이다. 겉보기에는 우아한 백조일지 언정 이들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죽지 않기 위한 끈질긴 투쟁을 해야 한다. 제왕업 에서는 패업의 길을 가기 위한 전초전이었다면 제왕업 부터는 진정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장이 열린다. 전장에는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 옳고 그름은 없다. 내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적이 나를 죽일 뿐이다(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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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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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독서 카페 리딩투데이에서 '함께 읽는 도서'로 선정된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후기 작품들은 용서를 믿는다. 하지만 무엇을 용서하는 것일까? (p395).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서거 400주년을 기념해 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다시 썼다. 예술과 거짓말,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로 익히 명성을 알린 지넷 윈터슨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겨울 이야기>시간의 틈이란 작품으로 재창조했다.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는 질투에 눈이 먼 왕을 다룬다. 시칠리아의 왕 레온티즈는 아내와 친구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의심으로 갓 태어난 제 딸조차 거부한다. 결국 아내와 딸, 아들 그리고 친구까지 잃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우친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가족들에게 레온티즈가 용서를 구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고 용서를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시간의 틈역시 이 포맷을 따른다.

 

노래의 제목은 <퍼디타 PERDITA>.

이게 아이의 이름이군. 잃어버린 작은 아이 (p39).

 

어느 날, 솁과 그의 아들 클로에게 기적처럼 온 아이 퍼디타, 작고 여린 아이는 병원의 베이비박스에서 발견됐다. 작은 여아가 발견된 그 장소에서 한 사내는 유명을 달리했다. 솁과 클로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퍼디타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퍼디타는 백인이고 우리(솁과 클로)는 흑인이므로 퍼디타 역시 자신이 주워온 아이임을 안다(p40).

 

성공한 사업가 리오는 아내 미미와 한때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친우 지노가 불륜을 저지른다고 굳게 믿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자신의 침실에 웹캠을 설치한다. 지노가 침대에 누워있는 미미에게 물 잔을 건네는 영상만으로도 망상을 하는 리오는 질투에 눈이 멀어 막 출산한 미미에게 몹쓸 짓을 한다. 미미가 낳은 딸이 지노의 아이라 믿고는 유전자 검사도 거부한 채 그 아이를 지노가 있는 곳으로 보낸다. 그런데 지노는 그곳에 없었다. 아이의 운반을 맡긴 정원사 토니가 무참히 살해당하고 여아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그렇게 리오와 미미도 남이 된다.

 

변명은 없다. 이유도 없다. 용서도 없다. 희망도 없다 (p325). 

  

그날의 선택은 리오에게 많은 걸 앗아 같다. 아내와 아들, 딸을 잃었고 학창시절을 함께했던 친구와의 관계도 단절됐다. 모든 것을 그의 손으로 망쳤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 광기, 그 집착, 그 질투, 이성을 잃은 그의 실책은 단란했던 가정의 평화를 빼앗고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더 이상 어떤 말이 필요하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그의 인생에 우연처럼 행운이 찾아온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되찾을 수는 있다. 그렇지 않은가? (p364).

 

셰익스피어의 원작처럼, 시간의 틈도 해피엔딩이다. 잘못된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후기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용서라는 소재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내가 너무 어린 것일까.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다고 믿기에, 리오의 해피엔딩은 여전히 탐탁지 않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 받았는가? 그는 과연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가? 용서와 화합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발판을 만든 다지만 리오는 가족을 잃고도 여전히 이기적이었다. ‘퍼디타로 인해 과거의 조각을 다시 맞췄지만 과연 이들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뼛속까지 사업가인 리오, 그의 본성은 과연 변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나이가 더 들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가 막이 올랐던 그 때, 그 시대 사람들의 감상이 궁금하다. 이 작품에 공감하며 찬사를 보냈을지.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를 만화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과거는 되돌아갈 수는 없다. 시간에게 시간을 준다면 어긋난 시간을 다시 메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뿐. 인간의 가장 간절한 욕망을 담은 작품인걸까.

 

셰익스피어와 윈터슨, 두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그들은 정녕 레온티즈와 리오를 용서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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