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업 - 하 - 반룡, 용이 될 남자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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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왕의 패업을 이루는 길에서 우리는 함께 사우는 지기니라. 만약 나를 그저 귀하고 연약한 여인으로만 본다면 나를 알고 믿는 그 소기가 아닐 것이고, 나 또한 그런 평범한 사내와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p404).

 

비록 처음은 삐끗거렸던 만남이었으나 어느새 소기와 왕현은 패업의 길을 위해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된다. 천상 무인이었던 소기에게는 이미 사람의 목숨이 하찮았겠지만 규방의 귀한 여인이었던 왕현도 점차 피도 눈물도 없는 여인으로 변모한다. 제 대의 업보를 다음 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잠시나마 황제의 자리를 맡아 줄 장기짝이 필요했기에 불러온 자담과의 만남은 그녀와 소기 사이를 잠시 멀게 만들지만 이내 둘의 사랑을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된다. 한때는 흠모한다 믿었던 자담의 짝을 제 손으로 지어주는 왕현의 독한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자담의 성정은 차분하고 온화했다. 그는 결코 투쟁하지 않고 상황에 순응했으니. 모든 것을 투쟁해서 얻은 왕현의 낭군 소기와는 전혀 반대의 인물이었다. 만약, 태평한 시대였다면 왕현에게는 자담이 어울렸을지 소기가 어울렸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한 가지 확실한건, 만약 왕현이 예장왕비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목숨역시 한 줄의 역사로도 기록되지 않은 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곱고 어여쁜 미인이 아무리 많은들 눈앞에 있는 이 한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그의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내 유일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풍랑을 막아야만 할까? (p223).

 

 

패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내를 만나 그에 걸맞은 걸출한 배우자로 손색없던 그녀였지만 세상은 그들을 단 한시도 편하게 두지 않는다. 자식이 없는 이들 부부를 호시탐탐 노리는 외부의 방해와 싸우고, 평범한 아녀자로 전락하는 자신에게 왕현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목숨과 맞바꾸어 소기의 아이를 낳았지만 정작 함께해야 할 순간에 낭군은 없었다. 소기의 부재는 왕현의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배신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계략을 짜는 왕현의 비상함은 그녀를 빛나게 했다. 하지만 산고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쳐온 수많은 사건들은 그녀의 수명을 갉아먹었고, 개국황후에 올랐음에도 그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 채 미인박명의 허망함을 남겼다.

 

천하의 제왕이 된 것은, 소기에게는 평생의 큰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자 앞으로 남은 인생의 웅대한 계획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격렬히 싸운 반평생을 끝내는 것이었다. 마침내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더는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이 세상에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누구도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었다(p464).

 

천하를 지배하는 제왕이 된다한들, 그 자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 누구도 그들을 헤치지 못하지만 하늘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천하를 얻었다 한들, 세상의 모든 영약으로도 한 여인의 목숨은 살릴 수 없었다.

 

왕현의 이른 죽음은, 깊은 여운이 남게 만들었다. 그들이 천하의 제왕이 되기 위해 흩뿌린 피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결말이 걸맞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의 치열한 투쟁을 가장 가까이서 봐왔기에 이제야 겨우 행복해질 찰나에,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그녀의 처지가 참 안쓰러웠다.

 

죽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왕현을 저버리지 않고 그녀만을 그리는 소기의 외로움을 보면서 왜 이리도 가슴이 아린건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제왕이고 패업이고 다 부질없으니, 한 평생 서로 같은 길을 걸으며 오래도록 서로의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왕현과 소기의 일대기를 따라가 보면 정말 어마어마하다. 단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그렇기에 순식간에 완독했다. 왕현과 소기를 떠나보내는 이 아쉬운 마음을 잘 아는지 2020년에 드라마로 제작된다하니, 반드시 본방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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