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업 - 상 - 아름답고 사나운 칼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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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부모님 슬하에서 마냥 응석을 부리던 어린 아무는 사라지고, 지금은 한 남자의 아내인 왕현만이 남았다 (p93).

 

명문세가 랑야왕씨의 금지옥엽 왕현, 지고한 황제폐하도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혀 귤을 까먹일 만큼 만인의 사랑을 받던 그녀의 평온했던 삶은 결혼으로 인해 어그러진다. 어머니가 황제의 누이요, 아버지는 황후의 오라비니 이보다 더 존귀한 핏줄이 어디 있겠는가. 어린 아무는 모든 게 허용됐지만 장성한 처녀 상양군주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한미한 가문 출신의 무장 예장왕 소기와 혼인을 한다.

 

영예와 책임, 이제 보니 모든 행복에는 대가가 있었구나 …… (p59).

 

명문 세가의 여인에게 사랑은 사치요, 어릴 적부터 정을 통한 셋째 황자 자담을 가슴에 묻고 올린 혼인의 대가는 첫날밤의 소박이었다. 제 아무리 돌궐의 대군이 변경을 침범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새 신부에게 얼굴을 맞대고 작별인사조차 고하지 못할 만큼 시급하던가. 이리도 허망하게 헤어진 영웅과 미인은 3년여의 시간이 흐를 동안 서로를 돌보지 않고 허울뿐인 부부로 살아간다. 지난 날 행복의 대가는, 지독한 외로움과 천시였다.

 

수도인 경사를 떠나 휘주에서 요양 중이던 왕현은 예장왕 소기에게 억한 마음을 품은 돌궐의 잔류세력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모순되게도 이 납치로 인해 서로 떨어졌던 신혼부부가 만나게 된다.

 

어서 가요, 나는 이자와 함께 죽을 터이니!” (p186).

오늘 이후로 당신은 나의 비이자 나와 이번 생을 함께할 여인이오. 나약함은 용납할 수 없소.”

 

죽음 앞에서 돌궐의 왕자와 동귀어진을 각오한 영웅의 아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연약하고 보호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제 신부를 알았던 소기의 마음이 요동친다.

황실의 음모가 도사리는 와중에 휘주성을 성공적으로 지킨 왕현의 재치와 지략은 소기에게 왕현을 평생을 함께할 유일한 여인으로 각인한다. 왕현은 제 혼인이 자신을 사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의 배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잠시 방황하지만 이 조차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왕씨가문의 상양군주가 아닌 예장왕 소기의 배필 예장왕비 왕현으로 살기위해 마음을 다진다.

 

무려 1,000페이지가 넘는 긴장감 넘치는 소설이지만 언제고 타의적으로 살아야 하는 황실 여인들의 운명이 너무 안타까웠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황실의 비정함은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전면에 드러난다. 등장인물 면면이 살펴보면 누군가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뿐이다. 겉보기에는 우아한 백조일지 언정 이들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죽지 않기 위한 끈질긴 투쟁을 해야 한다. 제왕업 에서는 패업의 길을 가기 위한 전초전이었다면 제왕업 부터는 진정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장이 열린다. 전장에는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 옳고 그름은 없다. 내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적이 나를 죽일 뿐이다(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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