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나오키 4 - 이카로스 최후의 도약, 완결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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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단 한 가지. 지금 상황을 확실하게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한자와, 자네밖에 없다는 거야.” (p20)

 

도쿄중앙은행 영업 2부로 화려하게 복귀한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의 한자와 나오키 4에서는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TK항공의 재건이란 어려운 임무를 맡아 고군분투한다. 나날이 도태되어 뼈를 깎는 고통을 거부하는 TK 항공 내부의 반발로 한자와가 기획한 수정재건안은 벽에 부딪힌다. 물류 부문 강화를 위해 도쿄중앙은행의 계열사 도쿄중앙상사가 TK 항공에 출자를 검토했지만 리스크가 너무 커 철수하고 나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TK 항공은 한자와의 수정재건안에 적극 협조한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TK 항공 재건 계획은 중의원 선거에서 진정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수렁에 빠진다. 국토교통성 대신으로 임명받은 시라이 아키코가 이전 정권인 헌민당에서 주도한 재건안을 전면 백지화 시킨 것. 시라이는 기업 재건 분야의 전문가로 이뤄진 자신의 사적자문기관을 ‘TK 항공 회생 태스크포스라 명명하고 TK 항공의 채권을 가진 은행들에게 일률적으로 70% 채권을 탕감하라 강요한다. TK 항공에 7백억 엔이 넘는 채권을 가진 도쿄중앙은행이 이 요구에 따를 경우 손실액은 5백억 엔(5700). 수정재건안대로만 실천하며 충분히 자력으로 채권을 갚을 능력이 있다 예상하는 민간 기업에 스피트 재건이란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고액의 채권 탕감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대출해주는 건 어디까지나 사람, 즉 은행원이지. 그렇다면 썩은 건 돈이 아니라 그 돈을 빌려준 은행원이야. 그 썩은 인간들이 바야흐로 높은 자리에 앉아 조직을 좌지우지하며 멋대로 날뛰고 있다면, 팔짱 끼고 구경만 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이 세상에 정의는 없는가, 하는 이야기가 되는 거야.” (p307)

 

도쿄중앙은행은 산업중앙은행과 도쿄제일은행이 합병해 만들어진 메가뱅크다. 이 합병으로 일본 최고의 은행으로 발돋움해 국제 경쟁력을 키우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은 내부에 있었다. 산업중앙은행을 일컫는 옛 S와 도쿄제일은행을 일컫는 옛 T, 출신 은행에 따라 형성된 파벌로 상호간에 불신이 극에 달한 것. T의 수장격인 기모토 상무가 태스크포스의 채권 탕감안에 적극 찬성하자 한자와는 자신이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으리라 확신한다. 합병 직후, 도쿄제일은행의 부정대출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몸살을 앓았던 도쿄중앙은행은 부행장 마키노의 자살로 유야무야됐던 과거가 있다. 한자와는 끈질긴 추적 끝에 여전히 부정대출건이 다 해결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뿐만 아니라 옛 T가 행해온 부정대출이 정치권의 비리와도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챈다. 돈에는 색깔이 없다고 하는데, 돈에 색깔을 입히는 곳이 은행이다(p300). 뱅커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검은 돈을 추격하는 한자와, 진실과 은행의 신뢰 사이에서 고민하는 운영진.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살얼음판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과연 한자와는 뱅커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거대한 비리에 대항하는 한자와를 만나볼 수 있다. 한자와 나오키 마지막 이야기다보니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어찌나 아깝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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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평전 보리 인문학 1
한명기 지음 / 보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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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간난신고를 감내하면서 종사를 살려 낸 최명길은 진회보다 더한 만고의 간신이 되고, 항복 직후 인조를 버리고 낙향했던 김상헌은 조선의 정사正士이자 영원한 사표가 되었다. 기막힌 대비였다. (p11)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인조반정을 일으킨 공신 치고 진정 나라를 위한 충신은 없다고 단언한다. 영화 남한산성의 효과로 최명길은 충신, 김상헌은 꽉 막힌 사대부로 흔히들 생각하는데 내 입장에서 본다면 그놈이 그놈이었다. 병자호란이야말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백성들이 도륙당한 참혹한 전쟁이었다. 능력도 없으면서 권력욕으로 왕위를 찬탈한 정권에 어찌 찬사를 보낼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인조 정권의 주축인사였던 최명길에 대한 내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최명길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지만 그냥 싫었다. 조선을 구한 외교관이라는 칭송이 참 허황되다 생각했다. 지금도 이 생각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한명기 교수의 최명길 평전을 읽으며 최명길의 사람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김상헌처럼 자신의 신념을 주창하며 제 뜻이 관철되지 않자 상대가 이 난국을 얼마나 잘 헤쳐 나가는지 바라만 보는 건 쉽다.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정신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비슷한 성향이다 보니 그의 행동에 상당히 공감했다. 하지만 최명길은 인조를 왕위에 올린 자신의 실책을 수습하고자 세간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전면에 나서서 고군분투했다. 무능한 임금을 버리지 않고 그를 보좌하며 어떻게든 이 난국을 이겨내고자 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단순 권력욕에 심취한 사람으로만 생각했던 최명길에 대해 이전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시선으로 인간 최명길을 바라보게 됐다.

 

애초 거사를 도모할 때는 광해군 정권의 난정과 탐학을 소리 높여 비판했지만 권력을 손에 넣자마자 역적들이 남긴 재산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p134)

 

최명기의 부친 최기남은 광해군 대에 벼슬살이를 했으나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 당한다. 저자는 광해군에게 효성을 다하라는 상소를 올린 최기남의 성품에 최명길이 큰 영향을 받았을 거라 말하지만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비통에 빠졌는데 노망난 줄도 모르고 제 아들보다도 어린 여자를 새어머니라고 들인 선조가 모든 일의 원흉이지 광해군의 잘못이 아니다. 세가 없는 후궁의 자식이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린 새어머니와 자신을 가장 위협할 적통의 아우를 살뜰히 살피라니, 도대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비양심은 어디까지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최명길의 집안은 벼슬길이 막혔고 이는 최명길이 광해군의 치적과 무관하게 인조반정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인조반정은 그저 흔한 권력 다툼이었을 뿐, 효성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는 전혀 없다. 단지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하는 냉소까지 나오는 실정이었으니(p100), 권력욕에 심취한 무능한 인사들이 이끌 조선의 명운이 다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병자호란 항복 이후 최명길은 청과의 외교에서도 자신의 소명을 정립했다. 그것은 가난한 선비의 아내이자 약한 나라의 신하였다. (p415)

 

청나라 군대가 한양 목전까지 왔을 때, 최명길은 적진으로 달려가 그들의 진격을 늦춰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도망갈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임금을 살리고자 한 그의 노력은 가상하다. 평전에서는 최명길의 행동을 참 일괄되게 서술한다. 그는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훗날 김상헌과 화해했다는 대목에서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 그의 본심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다만 약소국의 신하로서, 종묘사직을 살리기 위해 실리를 택한 것뿐이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일종의 풍조가(p385) 되어버린 세상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내는 어떻게 살림을 꾸릴 것인가. 고문관 상사 아래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최명길의 이야기는 참.... 이전까지 덮어두고 손가락질 했는데 이젠 그러지도 못하게 됐다. 무엇보다 피로인과 속환 여성을 보듬으려는 부분은 인상 깊었다. 뭐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으니 그 진정성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다른 신료들보단 백성을 위한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최명길 평전인 만큼 그의 공로를 찬양하는 내용이 절대적이지만 그의 업적보다는 일관된 성품과 책임감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적어도 이전만큼 미워하진 않을 것 같다. 혼란스러운 정국에 심판자, 평가자가 되는 건 쉽지만 일꾼이 되는 건 쉽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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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1~10 세트 - 전10권
김홍정 지음 / 솔출판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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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백성이오. 이 나라를 세운 백성이란 말이오.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라도 호미와 곡괭이를 창칼로 바꾸어 목숨을 던지는 이들이란 말이외다.” (2p279)

 

장장 15년이라는 길고도 긴 시간동안 조선 중기의 대서사시를 쓴 김홍정 작가의 소설금강을 이끄는 이들은 백성이었다. 국난이 닥칠 때마다 가장 선봉에 섰지만 보잘 것 없어 역사 속 한 페이지도 장식하지 못한 그들의 모습을 작가는 잊지 않았다. 10권의 대하소설 금강은 중종반정 이후부터 광해군 때까지, 격동의 시대 한 가운데를 살아간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100여년의 걸친 조선사를 관통하며 이들의 꿈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5부작으로 쓴 10권의 책의 주인공이 모두 여자라는 점이다. 1부의 주인공이자 걸출한 여걸 연향, 그녀를 잇는 미금, 부용, 수련 그리고 영은까지. 영은을 제외한 이들 모두 상단의 대행수의 직에 올라 조선의 돈줄을 좌지우지 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돈만 밝히는 장사치가 아니었다. 재해가 있을 때 솔선수범하여 곳간을 풀었다.

 

지고한 왕실에서는 치열한 권력 투쟁이 한창일 때, 그들은 다른 세상을 꿈꿨다. 노인은 편안하고, 장년들은 쓰일 곳이 많으며, 젊은이와 어린 사람들은 쓰인 곳에 이를 때까지 의지하여 자라고, 과부나 고아, 홀로 사는 이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고,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누리는 여민동락이 이루어지는 세상(1p174),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한다.

 

연향은 소리꾼 연화와 종실 이천의 딸이나, 이천은 모반에 엮여 사사되고 연향의 아비로 여겨지는 종실의 후손 이경 역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게 된다. 서출이지만 종친의 피가 흐르는 그녀는 사림의 거두 충암 김정 밑에서 수학하고, 그의 제자 양지수와 서로 연모해 딸 부용을 낳는다. 공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왕권에 대한 집착이 상당했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한다. 하지만 사림의 급진적인 개혁으로 왕과 공신들의 강한 반발을 사 결국 정암 조광조는 사사되고 충암은 영주(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이때 연향은 자신의 스승인 충암을 모시기 위해 몸소 영주로 향한다. 공자왈 맹자왈도 좋지만 결국 사람이 모이는 곳에 필요한 건 돈이다. 연향은 탁월한 장사 감각을 발휘해 충암을 뒷바라지 했지만 그 또한 사사되고 이후 종자돈을 불려 소리채와 상단을 운영한다. 충암이 사사되던 때 임금을 능멸한 소두로 지목된 정희중은 연향의 기지로 가족들과 목숨을 부지하고 그의 아들 금석과 금석의 딸 미금은 상단에서 일한다. 공납권을 얻은 공주목 정지포 상단은 도성으로 진출해 금수하방을 세우고 미금은 행수가 된다. 충암을 이어 사림을 이끈 남원은 조정에 나갈 때마다 사사건건 공신들과 부딪히고 연향은 남원을 지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궁궐에 피바람이 불때마다 역모와 남원의 엮기 위해 여인들이 모진 고초를 당한다. 사실 어느 순간부턴가 남원, 아니 사림들이 꿈꾸는 세상에 의문이 들었다. 솔직히 단순히 정권다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조정의 일은 긴박하게 돌아가지만 그들이 나서서 이룬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말로는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연향과 미금이 자신들 때문에 고초를 겪을 때 행동하는 이는 없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인가? 남원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이중성에 치가 떨린다.

 

그러나 세상은 태평하였다. 세상은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달리 백성들은 삶의 터전에서 백성들의 곳간을 채우는 일에 열심이었고 인심과 인정에 따라 흥청거리거나 쪼들리기도 하였다. (4p280)

 

미금의 죽음 이후 연향과 양지수의 딸 부용은 상단과 소리채의 대행수가 된다. 그녀는 전륜성왕의 시대를 꿈꾸는 왕족 한산수 이형과 사랑에 빠져 아들 창을 낳는다. 지금까지는 뺏고 빼앗기는 숨 막히는 정치 복수극이었다면 드디어 잔잔한 백성들의 일상이 나온다. 물론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동계가 언제까지고 순탄할 수는 없다. 외척이 득세하는 현실을 소리 높여 비난한 남원은 명종의 친정을 이끌고 결국 사사된다. 선조 즉위 후 정여립의 난으로 사림은 다시 화를 입고 임진왜란 발발로 임금의 신망은 한없이 추락한다.

 

남원 대감께서는 내 종친 어른이셨습니다. 내게 가문을 맡기셨습니다. 남원께서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제게 주셨습니다. 이는 충암의 가르침이라 하셨습니다. 본디 백성이 있었고, 백성들이 나라를 이루어, 나라를 지킬 사람으로 임금을 세웠다 하셨습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임금이 아닙니다. 이 나라는 임금이 없습니다. 새로운 임금을 세워야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나라가 됩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면, 내가 앞에 서겠습니다. 아버지 한산수께서 이루려던 전륜성왕의 시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나와 함께 가십니다.” (6p296)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라는 숭고한 뜻으로 일으킨 봉기는 의병들의 사기저하와 측근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아들을 따라간 부용의 뒤를 이어 양지수의 딸이자 창의 연인이었던 수련이 대행수가 된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다.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고 천은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이창을 배신했던 임억명을 천은으로 낚아 죽이고 이이첨은 이를 간과하지 않는다. 수련은 후금과 소금 거래를 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된다. 공주목사 허균과 동계의 인연은 운명의 장난인지 피바람의 소용돌이로 성큼 더 다가서게 한다.

 

금강의 마지막 주인공은 특이하게도 상단의 대행수가 아니다. 스님이었던 영은은 게십이장을 읽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앞날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사실 책의 포맷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역모라는 이름에 엮이면 아무리 대쪽 같은 집안이라도 한 순간에 풍비박산 날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항상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역모로 그 끝을 맞이한다. 살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 간신에게 구명하기 위해 뇌물을 준비하는 대행수. 책은 마지막까지 참 가슴이 미어진다. 조정에서는 쓸모없는 논쟁으로 목청 높일 때 정녕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왕실의 무능과 아첨꾼들, 이상 속에 살고 있는 선비들. 숨 막히는 조합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흘러간다. 과거에는 미처 꿈꾸지 못한 세상이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다. 10권이라는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조선 중기의 역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책이다. 힘이 없어 이용당해야 했고, 힘을 키워서도 이용당해야 했던, 그들의 울부짖음을 잊지 않고자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책의 리뷰를 마친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191328)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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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봄 - 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8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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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 년 전 목수의 아들 잇페이부터 십일 년 전 사노 촌의 고키치에 이르기까지 네 남자애의 실종. 이 괴사건에 관해 한주로는 며칠 동안 개처럼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파헤쳤다. (p9)

 

시게오키의 착란과 중첩된 점이 없어 보이면서도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네 남자 아이의 실종사건. 다지마 한주로는 아이들의 실종을 조사한 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에 더 큰 의문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이 사건은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직감한다. 그리고 한주로의 직감은 탁월했다.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세상의 봄하권은 상권에서 뿌린 떡밥을 하나하나 회수하며 기타미 가문의 치열했던 세력 다툼을 거슬러 올라간다.

 

도망친 줄 알았던 전 수석 요닌 이토 나리타카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고코인은 위험에 휩싸인다. 그간 고코인의 집지기로만 알려졌던 고로스케가 실은 시게오키를 노리는 자객이었던 것. 이 과정에서 기타미 번을 섬기는 첩자 가게마와리와 기타미 가를 위해 움직이는 첩자 틈새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기타미 번을 섬긴다는 것과 기타미 가를 섬긴다는 건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그 차이는 명백하다. 틈새의 존재 의의는 기타미 가 일문의 안정된 지배와 번영을 뒤흔들 모든 동향을 경계하고 그것이 나타나면 제거하는 것(p33), 그들의 충정은 오직 기타미 가 일문만을 향한다.

 

 

 

나는 원수를 갚았어. 어렸을 때 당한 처사에 대한 원수를. 진심으로 그러고 싶다고 바랐기 때문에 악귀가 나타났어. 소심한 내가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악귀가 대신해서 처리해 준 것이야.” (p125)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시게오키 홀로 간직하고 버텼어야 했을 긴 시간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라 그 일이 밝혀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p30) 스스로를 병들게 한 그의 선택에 누가 돌을 던지랴. 그는 마음속에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직면하기 두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을 소환했다. 가장 어린 소년인 고토네는 시게오키의 소망으로 그가 산다는 것에 짓눌릴 것 같아져 마음속으로 도망치면 고토네가 나타나서 그를 대신해주었다(p116). 시게오키의 노여움의 화신은 항시 그를 대신하여 악인을 처단했다. 첩자 고로스케가 고코인을 위협할 때, 아내 유이를 욕보인 시녀에게, 그리고 자신을 괴롭힌 이들에게 노여움의 화신이 휘두르는 검은 가차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두려워 한 여인.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그녀가 되었던 시게오키. 기타미 가의 귀한 적자에게 도대체 어떤 억한 심정이 있었던 것일까. 왜 시게오키는 스스로 망가지길 택했던 걸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명군으로 명성 자자했던 시게오키의 아버지 기타미 나리오키의 개혁에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지독한 악연은 두 부자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고코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시게오키를 위해 일한다.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활기는 시게오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어 번주로서 실패하고 한 인간으로서도 한 번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목숨을 기타미 땅을 위해, 영민을 위해 가능한 쓰고자 한다(p454). 과거의 악연이 아니었다면 평탄했을 청년 번주가 번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우려했던 내 걱정이 무색하게 시게오키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키도, 시게오키도 참 강한 사람이다. 미미여사의 에도물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각기 작품마다 와 닿는 따스함이 다르다. 세상의 봄을 쟁취하기 위해 합심하는 고코인 사람들의 이야기, 다가올 봄날을 기다리며 읽기 참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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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봄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7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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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럽고 잔인한 운명은 다키처럼 하찮은 한 여자에게도, 오 년 전 그 여자의 눈에 늠름하게 비쳤던 청년 군주에게도 평등하게 찾아들었다. (p21)

 

기타간토의 작은 번 기타미의 6대 번주 기타미 시게오키는 정신착란을 이유로 번주의 별저인 고코인에 유폐된다. 아버지인 5대 번주의 급서로 젊은 나이에 번을 이어받은 그는 일개 향사 출신 이토 나리타카를 수석 요닌으로 등용해 세인들의 불평을 샀다. 기타미 시게오키가 번주에 오른 지 5년 만에 그는 실각했고, 벼락출세한 이토가는 몰락한다.

 

토목청 감독을 지낸 가가미 가즈에몬은 이혼 후 친정에 돌아온 딸 다키와 성읍에서 3(12km)가 넘는 나가오 촌에 은거하며 지낸다. 정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부녀에게 이토의 적자 이치노스케와 유모가 도피해오면서 다키는 접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가가미 가와 이토 가의 인연이 어딘가 얽혀있단 의심을 한다. 사람의 인연과 운. 맺어졌다 끊어지고, 열렸는가 하면 닫힌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p45). 30년 작가 생활을 기념해 야심차게 내놓은 미스터리 소설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의 걸작 세상의 봄, 지금껏 드러낼 수 없었던 과거의 은폐된 진실을 바짝 쫓는 만큼 소설 속 분위기는 내내 어두웠다. 하지만 제목이 말해주듯 언젠가 세상의 봄은 찾아온다. 가가미 가즈에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홀로 된 다키에게 찾아온 사촌동생 다지마 한주로는 그녀에게 급히 짐을 꾸리게 한 후 고코인으로 데려간다.

 

 

 

 

절대로 떠오르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들었는데. 왜 발견된 거야. 큰 나리께서 노여워하실 거야. 누가 옛날 일을 다시 끄집어내려고…….” (p453)

 

실성한 청년 번주 기타미 시게오키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는 한 사람이되, 세 사람이었다. 전 수석 요닌 이토는 시게오키의 착란이 사령 때문이라 확신했다. 십육 년 전, 죽은 이를 만날 수 있는 미타마쿠리(p146) 행하던 쿠리야 일족의 몰살이 그 원인이란 것. 왜 쿠리야 일족이 몰살 당해야했는지 그 이유를 파헤치는 것이 이토에게는 일생의 과제였다.

 

비밀스러운 고코인에서 다키는 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상냥한 그녀의 천성은 낯선 사람을 거부하던 시게오키의 마음을 움직이고, 빗장 속에 가둬 둔 과거를 조금씩 꺼내 보인다. 시게오키의 어린 시절을 살뜰히 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전 에도 가로였던 이시노 오리베는 두 팔 걷어 부치고 비운의 청년 번주의 완치를 위해 나선다. 그것이 설령 선대의 허물을 드러내는 일일지라도 그들은 더 이상 덮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안다. 고코인의 아름다운 호수에서 발견 된 어린 아이들의 유골, 이 차갑고 깊은 호수가 품고 있는 섬뜩한 비밀을 어떤 사악함을 감추려는 것인가. 세상의 봄에 다다르기까지 그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한때는 위풍당당했던 한 사내도, 이혼의 아픔을 겪고 친정으로 돌아온 한 여인도, 모두 말 못할 고민을 품고 산다. 과거를 딛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들의 첫 걸음, 세상의 봄 상권에서 만나볼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펜 끝에서 쓰인 이 소설은 그녀의 에도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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