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조선 핏빛 4대 사화 3
한국인물사연구원 지음 / 타오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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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가 중, 고등 학교때 배운 역사가 한 번도 왜곡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단지 역사는 역사일 뿐 그냥 옛 이야기로만 생각했고 그 시절엔 당연히 권력과의 싸움으로 인해 부모는 물론 자신의 신화나 백성을 죽이는 일이 대소롭지 않다 여겼다.
한국인물 역사 연구원에서는 원장 이원석 박사를 중심으로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했고 잊혀져만 갔던 왜곡된 역사를 밝혀 과거를 단지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점을 배우게 하였다.
조선시대 4대 사화는 정치적인 탄압과 그로 인해 온 백성이 울부짖었으며 단순한 권력 싸움에만 그 영향이 미친것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변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정치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화는 조선중기에 신진 사류의 훈신과 척신들로부터 정치적인 탄압을 말하며 총 4건의 사화가 조선시대 때 일어났다.

1. 1498(연산4) 무오사화는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2. 1504(연산10) 갑자사화는 갑자년에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대한 연산군의 보복과 이를 기화로 척신세력이 훈구사림세력에게 화를 입힌 사건이다.
3. 1519(중종14) 기묘사화는 기묘년에 일어난 사화이다. 죽음을 수반한 재앙으로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4. 1545(명종1) 을사사화는 조선 왕실의 대윤(인종의 외척)과 소윤(명종의 외척)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의 화옥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이 책에서는 세번째 사화로 기묘사화에 얽힌 이야기와 그에 관련된 인물들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을 물리치고 진성대군이 박원종과 성희안의 뒷 받침으로 왕으로 책봉되었다. 중종의 장경왕후가 왕자(훗날인종)를 낳고 죽자 또다시 외척의 세력들이 이를 기회로 알고 새로운 왕후 자리를 후궁으로 맞이할 것인지 페비 신씨를 다시 궁으로 들일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한다. 중종은 조광조의 유림 일파와 남곤 등 공신 일파의 두 틈 바구니에 끼어 실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 하던 중 한 선비가 출세를 위해 좋은 제안을 한다. 그 선비가 김안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두 파의 말이 모두 맞다면서 벼슬을 슬쩍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로 인해 김안로는 중종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은 어떻게든 원자를 왕으로 올려야지만 자신의 앞날이 보장이 될거라 생각하고 김안로에게 장경 왕후의 딸 효혜공주와 김안로의 아들을 혼인시킴으로서 하나의 안정된 세력을 이룬다. 한편 조정의 정치 세력은 세 갈레로 갈리게 되었는데 한 갈레는 바른 선비들로 구성된 조광조를 주축으로 한 일파이며, 다음은 페비 신씨의 복위를 반대하고 후궁중 하나를 중전의 자리로 책봉하려는 남곤의 세력, 그리고 세 번째가 윤임과 김안로 일파였다. 그리하며 윤임과 김안로는 윤임의 먼 친척 윤지임의 딸(훗날 문정황후)이 중전으로 천거된다. 중종은 왕 초기 때 여러 공신들의 손아귀에 쥐어 왕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제위 10년이 지난 지금 왕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경연관으로 선정하고 나라를 슬기롭게 다스릴 강론을 하도록 했다. 조광조의 높은 학론과 강한 기재, 바른 행실이 왕의 마음을 샀고 중종은 조광조를 신임하게 된다. 그리고 조광조는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계급을 떠나 상인기건 중인이건 경학에 밝고 덕행이 높은 인재가 필요하다면서 그 인재들을 등용시켜 국정에 참여 시키기로 한다. 그것이 현량과 급제자였다. 사실상 이로 인해 더욱 상대파를 자극하는 셈이 되었고 기묘사화의 계기라고 볼수가 있다. 중종의 종과아조 일파로 지꾸만 기울어 가자 남곤 일파가 조광조를 몰아내기 위해 술책을 세우는데 그것은 나뭇잎에 ‘주초위왕’자를 꿀로 쓰게한 뒤 벌레가 그곳만 갈아먹게 한다. 이로 인해 ‘조씨가 왕이 된다’ 라는 말이 퍼짐으로서 중종의 마음이 흔들리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물론 조광조가 정치를 잡고 개혁을 하긴 했지만 자신의 신하를 사사하고 왕위를 과연 제대로 보위를 할 수가 있었을까? 특히나 조광조와 같은 인물은 출세에 눈이 먼 신하들과는 달리 바른 행실을 가진 꼭 필요한 신하였는데 말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사건들은 흔히 있는 사건들이지만 기묘사화는 아주 큰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사림이 정권을 꽉 쥐고 있으니 훈구파에서는 그 일을 그냥 보고만은 있지 않았을터, 훈구파의 많은 미움을 산 조광조였다. 서로 파를 나누어 토론을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좋은 정치 방법이었지만 그 토론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것은 올바르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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