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 지음, 박미경 옮김 / 베리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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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 (원제 :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

● 영화계의 전설적 요부 에블린 휴고, 세상을 떠나다!!

50년대엔 스타일 아이콘으로, 60년대와 70년대엔 섹시한 요부로, 80년대엔 오스카상 수상자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휴고는 육감적인 몸매와 대답한 역할, 그리고 떠들썩한 연애사로 명성을 떨쳤다. 일곱 번 결혼했고, 어느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았다.

최근에 이 작가 작품이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두 권 출간되었다. <데이지 존스 앤 더 식스>에 관심이 더 많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을 먼저 읽게 됐다. 이 책은 대출했고 <데이지...>는 밀리의 서재에 전자책으로 올라와 있어서. 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감정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다 읽고 난 후 어쨌든 '재밌었다'라는 생각이 든다.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더 재밌을 것 같다. 영상으로 만들기 더없이 좋은 스토리다.

먼저 이 책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얘기해 보자면 (스포가 될 것 같아서 많이 말할 수 없다)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무명의 기자 모니크는 커리어도 가정도 순탄하지 않아 고민이 많은데 어느 날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여배우 에블린 휴고가 모니크를 지목해 인터뷰를 자청한다. 잡지 인터뷰는 핑계고 에블린 휴고는 아무에게도 노출하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모니크한테 빠짐없이 다 이야기하기로 하고 모니크는 그걸 쓰되 그 자서전을 모니크의 이름으로 출간하는 기회까지 준단다. 도대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모니크는 일단 다시없을 그 기회를 잡기로 한다.

모니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에블린 휴고는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되었는지, 그녀의 일생에 걸친 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연히 그녀의 일곱 남편들과의 스토리도 말이다. 섹슈얼한 이미지의 할리우드 여배우의 일생은 그야말로 화려하고, 시끄럽다. 초반의 흥미로움에 더해 진행도 빠르고 재밌지만 중반쯤 가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너무 노골적이어서 다소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50년대 전후 배경으로 바닥에 있던 여성인권이나 성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 여성의 자기결정권 같은 것들을 그냥 모조리 '다 넣자'라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아니 오히려 그래서 컨셉이 확실해서 좋다고 해야 하나? 내가 지금 <여전히 미쳐있는>이라는 책에서 딱 동시대의 여성운동에 대해 읽고 있어서 더 뚜렷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중간에 다소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에블린 휴고의 사랑 이야기를 어떻게 끝까지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야기 자체는 재밌어서 페이지터너인 건 확실하다. 그녀가 왜 무명의 모니크를 지목했는지 알고 싶다면 꼭 끝까지 읽자.

화려함, 열정, 야망에 가려진 진실은 무엇일까?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은 과연 누구였고? 스포가 되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이 책에서 나는 해리를 좋아했는데 해리 때문에 너무 슬펐다. 에블린 휴고에 대한 내 마음이 완전한 연민도, 완전한 미움도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녀가 현실의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삶이 어땠는지 와는 별개로 누군가의 치열한 일생을 들여다보는 일은 항상 먹먹함을 동반한다. 마지막에 원고를 완성한 모니크가 하는 말이 참 공감된다.

에블린은 매우 복잡한 여성이었다. (...) 어떤 날은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지만, 또 어떤 날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에블린은 이런 상반된 평가에 만족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순수한 숭배에도, 추잡한 스캔들에도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진실에만 관심을 뒀다. Ι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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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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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1941~2008)
한국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생존자로, 종전 후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에서 일하다 상선 선원이었던 백인 미국 남성을 만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양공주나 튀기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동족의 차별적 시선을 벗어나 이주한 미국이지만 그곳은 또 다른 차별의 시작이었다. 다양성이라곤 없는 보수적인 남편의 고향 마을에서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 특유의 생활력과 강인한 의지로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기도 하며 두 아이를 키워냈다. 딸이 열다섯 살 되던 해, 조현병이 시작되어 모든 것을 접고 소파에 틀어박힌 채 은둔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군자의 과거는 오랫동안 침묵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사회학자로 공부하던 딸 그레이스(저자)는 과거 엄마 군자가 겪었을 사회적인 맥락과 그녀를 조현병으로 몰고 갔던 온갖 인종차별적 언어와 폭력들을 되짚어 나간다. 이 책은 딸 그레이스가 쓴 엄마의 회고록이자, 전쟁 생존자, 한국계 미국인 가족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인 동시에 디아스포라 문학 그 자체다.

엄마에게도 그런 상차림은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의 세계를 상징했다. 다른 사람을 먹이면서 엄마는 당신의 출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살아남았다는 증거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도 했다. | p.345

​군자가 경상도 사람이어서 이 책에는 '답답어라', '함 묵자' 같은 방언을 볼 수 있다. '한번 주면 정 없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원 타임, 노 러브' 같은 말들을 발견할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찌르르했다. 그 시절 여러 이유로 미국으로 건너온 1세대 한인에게 팔을 걷어붙이고 김치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던 군자. 음식이란 군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기지촌에서 일할 때 처음 먹어보았던 미군들의 음식 '치즈 버거'는 기회와 가능성이었고 미국에서 힘들게 만들어 먹었던 김치는 군자의 고향과도 같았다. 그렇게나 몰두해 만들었던 쿠키와 애플파이는 미국에 녹아들기 위한 도전이었고 강인한 채집인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때 만들었던 블랙베리 파이는 오롯한 자기 의지이자 삶의 의지였다.

​<버섯 여자>라는 장은 군자의 빛나는 매력과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던 장이고 웃음도 많이 났다. 그래서 더 슬펐다. 심장이 안 좋아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군자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집 근처 숲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바로 어마어마한 블랙베리를 발견한 것. 블랙베리를 채집하는 과정은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못 냈지만 군자는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매일매일 채집량을 갱신했고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물량과 가격으로 블랙베리 여사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블랙베리 철이 지나고는 버섯 채집에 나선다. 버섯은 독성이 있기에 버섯에 대한 치밀한 공부를 마친 후 온갖 버섯을 채집하기 시작했고 블랙베리 여사답게 이번엔 진정한 '버섯 여사'가 되기에 이르는데 읽는 동안 너무 재밌고 웃음이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너무 한국적인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대가족은 주말에 야외로 나갈 때가 많았는데 목적지에 가는 동안 여러 번 내려야 했다. 누구 하나가 '여기 쑥 많겠는데.' 하면 언제 그렇게 챙겼는지 각자 50원짜리 칼과 검은 봉다리를 주섬주섬 꺼내서 쑥을 캐기 시작했다. 요즘엔 무분별한 채집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 당시엔 그런 일이 예삿일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았지만 채집량은 우리집 식구들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고모들에 삼촌들에 고모부들까지 있었으니까. 쪼그리고 앉아서 땅만 바라보며 쑥을 캐고 있던 식구들이 생각났고, 그 생각은 봉다리에 가득 찬 쑥으로 쑥떡을 해먹고 쑥국을 해먹었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책에서 군자도 '지천에 쑥이 널렸네, 국 끓이기에 최고지'라고 했다. 너무도 한국적인 군자의 모습을 보니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녀에겐 얼마나 큰 싸움이었을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 시절에 거리를 두게 되면서, 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보게 되었다. 우리 가족 내 권력 역학에 더 넓은 사회적 불평등이 반영돼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로, 아버지는 내 주요 비판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열심히 일해서 얻고자 했던 바로 그것, 내가 누리는 최상의 교육으로 인해, 우리 사이의 거리는 아주 깊고 넓게 벌어져서, 다시는 같은 땅을 딛고 눈을 맞추며 설 수 없게 되었다. p.276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레이스만큼이나 읽는 나도 참 혼란스러웠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그레이스 자신도 어렸기에 자각할 수 없었겠지만 기지촌에서 어머니를 만나 미국에 데려와 아이까지 낳고 가족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보수적인 시각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세대가 속해 있는 사회적인 맥락 자체가 그러하기도 했겠으나 사회학을 공부하는 그레이스가 가족이 침묵해왔던 과거에 몰두할수록 아버지에 대한 혼돈은 분명 아픔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기회나 희망은커녕 온전히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채로, 어쩌면 평생을 생존자로 살아남는 데 힘을 다 써버린 군자는 더 이상 아무 기력이 남지 않았던 걸까?

나는 국에 밥을 말아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에 상을 차렸다. 엄마는 바닥에 내려와 앉았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국밥을 떠먹었다. p.374

이후 집 안에서 은둔생활을 한 군자는 음식을 거부할 때가 많았고 강인한 매력으로 휘어잡았던 주방은 그대로 방치됐다. 그레이스는 어머니에게 찾아갈 때마다 H마트에 들러 한국 식재료를 산 후 엄마가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을 만들었다. 소고기국, 콩국수, 찹쌀떡, 생태찌개를 해서 둘이 같이 먹었다. 소파에 앉지 않고 소파 앞 바닥에 앉아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게 그렇게 슬펐다. 그레이스가 자신을 더러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을 이젠 안다고 할 때도, 그레이스가 사회학자로서 엄마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꼭 써달라고 부탁할 때도, 함께 마지막 생태찌개를 먹고 한국식 이불을 덮은 채 딸의 발을 조물조물 만져줄 때도 마음이 먹먹했다. 가족사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전후의 한국 상황과 이민자에 대한 미국인의 인종차별주의, 젠더화된 노동과 폭력, 정신건강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맥락까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좋았다. 다음에 다시 읽어보고 싶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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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옮겨 온 동네는 피난처가 되지 못했고, 소위 구제되었다는 명목으로 이민자들에게 끊임없이 정신적 대가를 치르게 했던, 제국의 폭력으로 얼룩진 또 다른 장소에 불과했다.
- P20

식민지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침묵당해서,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에요. 그 목소리가 얼마만큼 가치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 P266

엄마가 나를 막으려 했던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당신이 탈출해서 과거에 묻어두려 했던 삶을 내가 미화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게 엄마의 삶이었을 수 있을까?
- P291

1945년 9월 미국은 일본군으로부터 군사기지를 접수했고, 주변 공창 지역은 이후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 업소 집결지로 탈바꿈했다. 1950년대 기지촌 업소들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먹고살기가 어려워졌거나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시골 소녀들을 끌어들였다. 1960년대 들어 한국 정부는 미군만을 위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를 공식적으로 관리하기에 이른다.
- P293

엄마는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버지의 고향에 녹아들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미국 요리에 숙달됨으로써 스스로 그곳에 동화되려고 노력했다. (...) 엄마는 미국식 요리를 메시아를 따르기라도 하는 듯한 열성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 음식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대신 엄마는 한국 음식을 몰래 먹는 법을 익혔다.
- P318

치즈버거는 생존과 종속의 복합적 상징물이었고, 한국인들이 굶주리는 와중에 미국인들은 남겨서 버릴 수도 있는 사치품이었다. 엄마에게 치즈버거는 미국이 줄 수 있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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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골고루 많이 보시네요~
나는 여행의장면 책 보고 있어요~
알라딘에서 최은영 작가님 신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예약판매 해 났어요~ㅋ
 
미드나잇 스완
우치다 에이지 지음, 현승희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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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좀 더 아무 생각 없이 나기사의 손을 잡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한 적이 있다. 그때는 뭔가 하려고 나서면 그 행동으로 인해 나기사가 상처를 받을 것만 같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나기사가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p.282-283


중학생 소녀 이치카는 아빠의 얼굴도 모른 채 엄마의 방치와 학대 속에서 자랐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녹록지 않은 삶이 엄마와 이치카를 더욱 힘들게 했다. 주변에서 학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할머니는 도쿄에 있는 삼촌 나기사에게 한동안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도쿄에 도착한 이치카 앞에 자신을 데리러 온 삼촌은 어째선지 여자였고 서로가 불편하고 낯선 상황에서 이들의 동거는 시작된다. 사실 나기사는 아무도 모르게 트랜스 젠더가 되었고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업소에서 쇼걸로 일하면서 수술비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이치카는 친구도 없고 웃을 줄도 모르는 아이지만 딱 하나, 좋아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공원의 한 할머니에게서 배운 발레. 집 근처 발레 스튜디오의 레슨 소리에 이끌려 몰래 수업하는 걸 지켜보던 이치카. 미카 선생님은 이치카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봐 주었다. 이 발레 스튜디오에서 만난 부잣집 소녀 린, 친구가 되고 이치카가 계속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아르바이트를 시키는 등 가깝게 지내지만 결국 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발레를 하고 있다는 걸 나기사에게 들킨다. 나기사는 가뜩이나 귀찮을 일은 떠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까지 만드니 더 마뜩잖다. 하지만 이걸 계기로 나기사는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는 이치카의 빛나는 재능을 알게 되었고 또 조금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구멍을 이해하게 되었다. 평생을 자신은 여성이라고, 남은 생이 얼마든 여성으로 살고 싶은 나기사. 수술을 한다고 해도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이치카의 아픔을 이해하고 이치카가 훨훨 날 수 있도록 그 재능을 꽃피우게 해주고 또 꿈을 지켜주고 싶다고 마음먹자 나기사의 삶의 의지도 확고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치카의 엄마가 이치카를 데리러 오는데...


나기사가 밤무대에서 추던 백조의 춤을 이치카가 추는 장면이나 나기사가 밤무대에서 사용하던 머리 날개 장식을 이치카의 머리에 씌워주던 장면, 공원에서 이치카가 연습하는 모습을 나기사가 지켜보던 장면이 좋았다. 이치카의 재능을 알아보고 끝까지 도움을 주었던 미카 선생님도 아름다웠다. 이치카의 친구 린의 결말은 너무 충격적이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마음 아픈 건 나기사였다. 그냥.. 다 읽고 나서는 눈이 시큰했다. 슬펐다. 나기사가 뭐 대단한 걸 바랬던 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만 들어서 슬펐다. 이치카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그의 삶이 그랬고 너무도 가혹한 마지막도 그랬다. 아무래도 음성적일 수밖에 없는 트랜스 젠더의 직업적인 한계나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인한 악순환으로 더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환경이 그랬다. 나기사가 이치카를 위해 짧은 머리를 선택하고 작업복을 입은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또 그랬다.


이 책이 나왔을 때 영화화된 작품이란 걸 알고 영화부터 봤다. 영화에서는 쿠사나기 츠요시가 나기사로 열연했는데 영화도 괜찮았지만 책에서 아무래도 인물들의 생각들이 좀 더 많이 표현되어서 감정이 잘 쌓였던 것 같다. 이치카를 연기한 배우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이 없는데 정말 팔다리가 길쭉길쭉하니 발레를 하던 사람일까 생각되기도 했다. 영화가 끝났을 때보다 책을 덮었을 때 여운이 더 진했다.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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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기사가 어른들의 세계에서 소외된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 P102

너무 가까운 거리는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비슷하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비슷한데 왜 몰라주나 싶어 괴로울 때 또한 많았다. - P110

이게 남들이 말하는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치카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싫은지, 싫지 않은지는 알아도 행복한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이게 그런 감정일지도 모른다. 가슴 언저리가 서서히 따스해지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그런 순간. - P147

맞아. <백조의 호수>는 비극이야. 나기사의 귀에 노인의 말이 암시처럼 울려 퍼졌다. 당장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백조로 돌아가야만 하는 때가 분명히 온다. - P182

그때 사오리는 각오했다. 아무리 높은 벽을 쳐봐야 날개를 가진 자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 P271

나기사 씨를 위해서, 나기사 씨를 잊어줘.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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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 일기 - 시간 죽이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2
송승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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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PIN 에세이 002

오늘도 삶을 버텨내고자 다양한 작품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을 이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사랑하시기를.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들의 총합이 여러분 그 자체이니까. p.270

핀 에세이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두 번째로 만나게 된 <덕후일기 - 시간 죽이기>는 시인 송승언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살아내기 위해) 했던 것들에 대한 일기다. 정작 프롤로그에서는 자신이 덕후는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에필로그에서는 결국 인정)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이 주를 이루는데 목차를 확인하고서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난 게임에 관해서는 바보 천치고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많이 봤지만 교묘하게 내 취향을 비껴갔길래 내가 공감할 수 있을까 싶었다.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목차 사진도 함께 찍었다. 아는 만큼 더 재밌을 책이라는 점에서 나는 좀 아쉬웠다. 이런 책은 격하게 공감해서 발을 동동거리며 읽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아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 다양한 게임이나 애니들을 이야기하면서 좋은 점, 별로인 점을 솔직하게 썼기 때문에 내용을 잘 몰라도 어쩐지 잘 읽혔다. 내가 아는 것들은 많이 없어도 그중에 좋은 걸 추천받는 느낌으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는데 대부분 별로인 점을 적나라하게 써서 건진 작품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뭔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덕후이기에, 깔 수도 있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굉장히 재밌게 읽을 수도 있을 거다.

게임 바보인 나는 아주 어릴 때 게임기로 하던 8비트 게임, 컴퓨터 게임에서 유일하게 열심히 했던 카트라이더(캐릭터가 귀여워서 하기 시작해서 무지개 별장갑까지, 내 인생 최고로 열심히 한 게임이다), 모바일 게임으로는 사천성, 애니팡, 캔디 크러시 정도가 해본 게임의 전부다. 그러니 책에 있는 게임을 알 리가 있냐고. 그런데 그 와중에 낚시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눈이 반짝 반짝 재밌었는데 그건 작년에 VR로 하는 낚시게임인 <리얼 VR 피싱>을 해봤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여. 남자친구는 현실에서 낚시는 하지도 않으면서 낚시 게임은 좋아하길래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했더니 세계 곳곳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와 바다에서 낚시를 하는 게 마치 여행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남자친구 쉬는 동안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해놓고 몇 시간을 내리 잡았다. 일단 낚싯대를 원하는 곳에 던지는 것부터 재밌다. 손에 입질이 느껴지고 물고기와 밀당을 하면서 한 마리씩 잡는데 성취감이 대단했고, 솔직히 낚시에 재능이 있을지도? 하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다. 점점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는데 물고기가 커지면서부터는 물고기와 밀당히 몹시 힘들어졌고 사투 끝에 놓치길 반복하니 재미 없어졌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라는 걸 해봤는데 내가 한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는 점과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이 좋다는 점에서 기분이 묘했다. 남자친구가 옆에서 흥미롭게 본 이유가 내가 다른 선택을 많이 해서 스토리가 상당히 다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 하고 있다가 안드로이드 해방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을 죽게 만들었다. 인간에게 많은 해를 입은 안쓰러운 안드로이드들을 해방시켜주고 싶었는데 죽음으로 인해 스토리가 많이 달라졌고 기분이 몹시 찜찜해졌다.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리지도 못한다.(진부하지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사람을 죽여놓고, 또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쳐놓고 시간을 잠깐 뒤로 돌릴 순 없는 것이다.) 몰입도가 상당해서 하루 종일 했던 기억이 난다. 열렬히 게임에 몰입하는 그 기분만큼은 좀 알 것 같았다. 다소 아쉽지만 내가 낸 결말을 인정하고 사람들이 유튜브에 올려준 다양한 엔딩들을 감상했다. 이 책을 잘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남자친구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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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어딘가로 떠날 수 있다는 것, 죽지 않고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 그 모두가 좋은 일이고 시간을 죽여볼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 P30

암흑세계에 자신을 내던지고 그야말로 개쓰레기가 되는 경험...... 그리고 자신을 쓰레기로 만드는 일에는 분명히 중독적인 쾌락이 있다는 것을 재차 깨닫는 순간, 여러모로 이것이 게임이어서 다행이었다.
- P88

비록 허구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음이라 하더라도, 그 죽음은 ‘작품 내에서 다시 볼 수 없음‘이라는 방식으로 진짜 죽음의 핵심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 진짜 죽음의 일면이 부정될 때 그 작품은 죽음의 슬픔도 무게도 잃어버리고 만다.
- P109

한가지 분명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 웹소설이든 장르문학이든 뭔가를 읽는 이들이 순수문학 또한 읽었다는 거다. 한 때 이 점을 간과했던 고리타분한 어르신들이 장르문학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일도 실제로 있고, 장르문학하는 분들은 또 무시당하던 것에 대한 한이 있으니까 과거의 순수문학 망령들을 향한 멸시를 늘어놓는 일도 있었지만... (...) 어떻게든 읽는 사람 자체를 늘리는 데 주력하는 웹소설 콘텐츠 창작자들은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질투하거나 미워할 것도 없다. 오히려 동맹군이면 동맹군이었지, 최소한 그들이 순수문학의 적은 결코 아닐 것이다.
- P243

내가 지속해온 오타쿠와의 거리 두기 자체가 일종의 농담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오늘도 삶을 버텨내고자 다양한 작품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을 이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사랑하시기를.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들의 총합이 여러분 그 자체이니까.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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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걸 배드 걸 스토리콜렉터 106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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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로보텀의 새로운 시리즈 '사이러스 헤이븐'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

믿고 보는 작가, 마이클 로보텀의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됐다. 골드 대거상 수상으로 화려하게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나는 작가의 '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로 입문해서 국내 번역된 작품은 전부 읽어봤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는 더 안 나오나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되다니! 너무 궁금해서 안 읽어볼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The other wife>는 왜 국내 번역이 안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엔 '사이러스 헤이븐'이라는 인물을 내세운다. 그런데 좀 의아했다. '조 올로클린'도 심리학자였는데 새로운 시리즈에서도 심리학자를 내세운다는 것이 말이다. '조 올로클린'이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데다 가정이 해체되면서 짠함을 불러일으켰다면 '사이러스 헤이븐'은 과거 정신 질환이 있는 형으로 인해 온 가족이 살해되는 아주 비극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비 코맥'이라는 소녀가 있다. 이 소녀에게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 끔찍한 과거가 있다. 소녀는 6년 전 끔찍한 범죄가 일어난 현장의 밀실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랫동안 학대받아온 소녀는 부패해가는 시체와 한 곳에서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발견되었다는 거다. 이후 '이비 코맥'이라는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사건의 진상이나 자신의 진짜 이름과 나이 등을 알리지 않은 채로 소년원에서 지내고 있는 고슴도치 같은 소녀다. 소년원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견인이 필요한 상태다. 소녀에게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능력이 있는데 상대의 얼굴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는 거다. 사이러스는 이 비밀스러운 소녀에게 이끌려 후견인을 자처하고 집으로 데려오게 되고 유사 가족물의 형태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한편 사이러스의 집 근처 오솔길에서는 '조디'라는 소녀가 살해당한 채 유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피겨 스케이트 유망주로 꽤나 이름과 얼굴을 알린 소녀다. 심리학자 사이러스는 과거 연을 맺었던 경찰에 협조하며 조금씩 사건의 비밀에 다가간다. 이 소녀의 죽음에 관한 비밀에 다가가는 동안 티격태격, 계속 어긋나기만 하는 사이러스와 이비의 관계, 아슬아슬 불안한 이비의 상태, 알쏭달쏭 밝혀질 듯 말 듯 한 조디 사건의 전말까지 첫 시리즈인 만큼 많은 내용이 담겨있다.

이 시리즈에서 사이러스 헤이븐뿐 아니라 이비 코맥도 계속해서 만날 수 있는 듯하다. 결국 이비 코맥의 과거에 대한 비밀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끝났고 아마 앞으로 출간될 후속편에서 조금씩 밝혀지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전 시리즈의 '조 올로클린'이 사이러스의 대학 스승이라는 게 살짝 언급되고 있고 역자의 말에서 보면 이후 출간된 후속편에서 그들이 조우하는 것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심리학자를 주요 인물로 내세우는 만큼 역시 심리적인 묘사는 깔끔하고도 탁월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이미 후속작이 두 편 더 나와있는데 국내엔 언제 출간될지 너무 궁금하다. 2편까지 동시 출간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보니 해결해야 하는 주요 사건뿐 아니라 주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야 하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진행되기보다는 흥미를 유발하는데 그친 감이 있어 2편까지 바로 이어 볼 수 있었다면 좀 더 빠르게 새로운 시리즈에 정을 붙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아직 밝혀진 게 많지 않아서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크다. 빨리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ㅠㅠ 그나저나 박찬욱 감독은 작가의 <라이프 오어 데스>를 영화화 준비 중에 있다고 하는데 이놈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시 읽어봐야 될까.



*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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