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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평점 :

십 대의 우리는 어리석다. 잘못된 말을 하는가 하면, 겸손하게 처신하는 법도 모르고, 수줍음을 덜 타는 법도 모른다.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비로소 보이는 것이, 그런 우리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배우고 또 성장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게 일어났던 일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내가 성취한 것들이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도달한 방법에 따라서 말이다. p.372
배경은 2차 세계대전 후 아직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혼란한 영국이다. 어린 소년 너새니얼과 누나 레이철은 어느 날 아버지의 싱가포르 발령으로 인해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된다.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어머니의 동료가 아이들을 돌봐주게 된다. 아이들은 이 남자를 '나방'이라 부르는데 참 수상한 인물이다. '나방' 뿐 아니라 이후 집을 드나드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 위험하고 수상하다. 그들의 일상은 아슬아슬하고도 평온하게 흐른다. 하루는 지하실에서 아버지를 따라 간 어머니가 들고나갔던 트렁크가 발견된다.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며 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1부는 수상한 '나방'과 갑자기 발견된 어머니의 트렁크로 인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별다른 사건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가까워지는 모습을 다룬다. 비밀스럽긴 하지만 딱히 뭔가 밝혀지는 건 없어서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갑자기 극적인 사건과 함께 눈앞에 어머니가 나타나고 영화처럼 1부가 끝난다. 2부에 들어서며 확 몰입이 되었다. 시간은 흘렀고 너새니얼은 어머니의 고향에서 둘이 함께 지내던 시절을 회상하는 한편, 전쟁이라는 혼란 속 어머니가 했던 일들을 추적하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동안 자신이 의지하고 지냈던 '이상한' 인물들도 추적하며 이야기를 완성해나간다. 결코 쉽게 읽어지는 구성은 아니었지만 좋았다. 1부를 읽을 때만 해도 뭔가 '폴 오스터'를 연상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는 느낌이었다. 2부를 읽을 때 개인적으로는 분위기가 전환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1부에서 2부로 이어지는 느낌이 굉장히 영화적이었다. 1부를 읽을 때만 해도 이 책을 '좋았다'라고 기억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전혀 없었는데 2부와 마지막까지 읽고 난 후엔 참 좋았다. 전후의 상황들은 당연히 어둡고 혼란스러웠지만 어디 하나 요란 떠는 부분이 없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하나 재정립되는 과정이 좋았다. 1부의 주요 인물인 '나방'과 '화살'도 인상적이지만 어머니 '로즈'와 '마시 펠론'이라는 인물이 정말 강렬했다. 이 책은 전혀 시끄럽지 않은 책인데 강렬하다는 표현이 쓰면서도 좀 이상하지만 인물들을 알아가는 시간은 정말 그랬다. 정말 이상한 감각인데 우아했다. 문장은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는 독특한 부분이 있어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시종일관 비밀스럽다. 이렇게 우아한 전후(戰後)의 성장소설이라니.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현재로 무장한 채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그곳이 아무리 어두워도 결국에는 불을 밝히고 떠나게 마련이다. 어른이 된 자신의 자아를 가져가니까.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목격하는 것이다. - P166
이제 도시는 전보다 덜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삶을 재정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을 뿐 아니라 두 시대를 살고 있었다. - P202
우리는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알고 보니 지척에 있는 시대를 살아왔다. - P385
우리는 간신히 유지되는 이야기들로 우리 삶을 정돈한다. 혼란스러운 곳에서 길을 잃은 듯이, 눈에 보이지 않고 말이 되지 못한 것들을 모두 한데 모아 꿰맨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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