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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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 이디스 워튼

이 책은 중편 <버너 자매>와 단편 <징구>, <로마열(熱)> 을 포함한 이디스 워튼의 중단편선이다. 특히 <버너 자매>는 국내 초역이라 너무 읽어보고 싶었다. 와, 앞 부분만 조금 읽으려고 펼쳤다가 멈출 수가 없어서 다 읽어버렸다. 다 읽어갈 때쯤에 남자친구가 집에 왔는데 인사만 잠깐 하고서 거의 다 읽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을 정도로 재밌었다. 지난 여름에 <여름>을 처음 읽고 좋았는데 이제는 완전히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순수의 시대>, <기쁨의 집> 등 썼고 이디스 워튼을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

올여름에 이디스 워튼의 <여름>으로 작가를 알게 됐다. 푸른 녹음과 눈부신 햇빛, 시원한 박하향의 여름 속에 있는 기분이다. <여름>이 시골의 여름 풍경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면, 이 책 <버너 자매>는 특히 감정 묘사가 아주 탁월했다. 진짜 반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안다. 내가 너무 극찬을 하는 바람에 이 후기가 어쩐지 조금 유치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여기저기 소문내고 싶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 그녀의 시간을 채워 주곤 했던 소소한 일상이 이제는 미치도록 무의미해 보였다. 처음으로 지루한 삶에 몸서리쳤다. (p.25)

<버너 자매>는 18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버너 자매는 뉴욕 거리의 작은 가게에서 수예품 등을 판매하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아간다. 어느 날 언니 앤 엘리자가 동생 에블리나에게 생일 선물로 탁상시계를 선물하는 것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은 시작되고 만다. 두 자매의 작은 세계 속에 시계방 주인 래미라는 남자가 들어오게 된 것인데, 이후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쓰고 싶어서 입이 아니 손이 근질근질 거리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마치 아침드라마 같은 통속적인 자극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이야기기 때문에 꼭 읽으면서 재미를 느껴보라 말하고 싶다. 생일 선물을 주며 서로를 위하는 자매의 모습을 볼 때만 해도 마치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는 것처럼 사랑스러웠는데 래미라는 남자 때문에 자매에게 균열이 생긴다. 언니 앤 엘리자의 사랑에 빠진 감정 묘사나,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동생을 보며 느끼는 질투, 시기의 감정 표현이 기가 막혔다. 동생을 너무 아끼면서도 질투하게 되고 또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 실망하는 언니 앤 엘리자의 감정에 푹 빠져 읽었다. 장편이 아니라 중편이어서 그런지 이야기의 진행, 속도감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느낌이다. 이후의 파란만장한 자매의 이야기는 꼭 책으로 읽어보면 좋겠다. 염세적인 느낌 한 스푼을 가미한 비극적 결말까지.

/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유익을 내려놓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곧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가 인생의 선물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물이 그녀가 양보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그녀에게 익숙한 천국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앤 엘리자는 더는 하느님이 선량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p.127)

<버너 자매>는 당시의 윤리 기준이나 진보적이고 낙관적인 세계관의 감수성에 맞지 않다 해서 번번이 거절당한 원고라고 한다. 그래서 출간되기까지 24년이 걸렸는데 그것도 징구와 다른 이야기들에 함께 수록되어 출간된 것이라고 한다. 궁핍 그리고 비참한 삶, 그리고 결코 긍정적인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결말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버너 자매뿐 아니라 이 책에 함께 수록된 <징구>와 <로마열(熱)> 또한 짧지만 강력한 단편이었다. <징구>는 지식인인 체 하지만 속은 텅 빈 인물들로 이루어진 독서모임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으로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싶을 정도로 우습다. "징구였죠?" 아주 천연덕스럽고 비꼬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다. 마지막 <로마열(熱)>은 또 어떤가. 언뜻 보기에 친해 보이는 두 여인이 나온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시시각각 하는 말마다 서로에 대한 비난이 숨어있고 곧 이들의 위선적인 관계는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엔 폭탄을 던져주고 끝난다. 짧지만 이렇게 강렬하고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다니! 좋아합니다, 작가님.

이디스 워튼을 얘기할 때 제인 오스틴을 함께 얘기하는 분들이 많아서 찾아보니 제인 오스틴(1775~1817), 이디스 워튼(1862~1937)으로 동시대의 작가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다양한 인물들의 속내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제인 오스틴이지만 사교 파티의 낭만과 결혼이 지겨워질 때가 있는 반면 이디스 워튼은 시시각각 흥미롭다. 읽는 재미가 훨씬 크다. 상황이나 장소에 대한 묘사, 그리고 감정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나 멋진 고전이라니. 다른 작품도 어서 읽어보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 태양에 한 뼘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음산한 구름이 하늘을 덮은 그날 아침은 습하고 추웠지만, 아직은 눈송이가 어쩌다 떨어질 뿐이었다. 이른 아침 빛에 길거리는 철저히 버림받은 것처럼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책임질 필요 없는 더러움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상관하지 않는 앤 엘리자에게 길거리는 이상하리만큼 친근해 보였다. (p.23) - P23

거친 난간 너무 저 멀리 땅이 움푹 파였고, 푹 꺼진 곳에는 작은 숲이 있었다. 그 더운 일요일 오후,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싱그럽고 고요했다. 사과나무 가지들 밑으로 잔디밭을 가로지르자 앤 엘리자는 교회에서 보내던 조용한 오후와 어렸을 적 엄마가 불러 주던 찬송가가 생각났다.
- P61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한 사실이 겁이 났다. 뒷날 돌이켜보니, 앤 엘리자에게 그날 오후의 고독은 무엇인가를 예언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앞으로 내세에서 맛볼 고독의 에센스를 증류하는 것 같았다.
- P75

앤 엘리자는 그들의 친절을 당연히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들이 ‘위로‘라 믿고 건네는 말들은 그녀에게 빈 껍데기와 같았다. 그녀는 익숙하고 따뜻한 그들의 존재 바로 저편에 ‘고독‘이라는 손님이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봤다.
- P88

누구든 독립적인 삶을 ‘아내‘라는 달콤한 이름과 바꾼 사람이라면,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해. 그리고 나는 언니의 삶이 한여름 구름처럼 속박 없고 평온하길 바라.
- P91

그녀의 시간을 채워 주곤 했던 소소한 일상이 이제는 미치도록 무의미해 보였다. 처음으로 지루한 삶에 몸서리쳤다.
- P25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유익을 내려놓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곧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가 인생의 선물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물이 그녀가 양보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그녀에게 익숙한 천국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앤 엘리자는 더는 하느님이 선량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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