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생물에게 자신의 깃발을 꽂기 위해 그는 주석 이름표에 그 성스러운 이름을 펀치로 새기고, 그 이름표를 유리단지 속표본 곁에 담그고 뚜껑을 닫았다. 우주의 또 한 귀퉁이가 포획된것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높이, 더 높이 쌓아가며 전시했다. 그가 질서 속으로 끌어다놓은 혼돈의 양이거의 건물 두 층 높이로 올라갈 때까지.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여기는 바로 그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들이 올 자리다.

모든 곳에 물고기들이 있었다. 바닥 위 모든 곳에 유리 파편이흩뿌려져 있었다. 가자미들은 떨어진 돌에 깔려 더 납작하게 뭉개졌다. 장어들은 무너진 선반에 깔려 절단되었다. 복어는 유리 파편에 찔려 살이 터져나왔다. 에탄올과 시체 냄새가 코를 쏘아댔다.
그러나 물고기들의 살집에 발생한 그 어떤 피해보다 훨씬 더 고약한 피해는 실존적 피해였다.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남은 표본들이 수백 개, 거의 천 개에 달했지만, 그 모든 표본의 신성한 이름표들은 모두 연구실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 47초 사이에 창세기가 뒤집혔다. 그가 꼼꼼하게 이름을 지어줬던 물고기들이 다시금 형체 없는 미지의 존재들로 돌아갔다.

내가 이 연극의 감독이라면 무대 디자이너에게 조금 살살 하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받아들이자. 이것이 우주가 우리에게준 것이다. 혼돈이 지배한다는 것, 나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는 없어 보였다.
나라면 이 지점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신성이 훼손되고, 꿈이박살 났으며, 수십년동안 끈기 있게 해온 일이 헛수고로 돌아갔다면, 나라면 지하실로 내려가 패배를 인정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물을 뿌리고 뿌리고 또 뿌렸다. 이토록 억눌리지 않는 불굴의 끈기는 어쩌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그건 미친 짓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선에 대한 믿음을,
별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가슴속에는 존재하는 따뜻함에 대한 믿음을 조용히 실행에 옮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신뢰 비슷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다고 한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인용문을 독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차단해버린 적이 있다면 그들 역시 브루노를 살해한 자들과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를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그것뿐이었다. 오만에 대한, 마술적사고에 대한 엄중한 경고. 예를 들어 진화론에 대한 강의 요강에서도, 우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룬 섹션 하나를 통째로 끼워 넣은 걸 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창조하기 시작한 이래, 사람이 노력해서이룬 결과가 그토록 처참하게 파괴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엄청난 규모의 재앙 앞에서 그렇게 푸념하지 않는 인간을 만난 일은한 번도 없었다. 평범한 한 남자가 자기 자신에게 그토록 희망차고,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은 그전엔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그지진과 화재가 준 교훈이다. 그가 지은 집은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지은 집이지만, 그는 집 밖에 서 있고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다.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볻 더 경이로운 일은 도시가 되는 것이다. 도시란 사람들오 이루어지며, 사람은 영원히 자신이 창조한 것들보다 높이 올라가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수 있는 모든 일들보다 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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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28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데이비드의 인생은 그렇게 계속될 수도 있었다. 꽃들을 수집하려는 필사적인 충동에 이끌리는 채로, 세상은 그의 소명에 가치가 있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채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는천천히 잎사귀들만 가득한 외로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갔을지도 모른다.
4그가 페니키스 섬에 발을 들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될 거라고 했다.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어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인간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고 도덕적으로 얼마나 졸렬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가시가충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 "인간은 [어류와] 그를 구별해주는 도덕적·지적 재능을 활용할 수도고 남용할 수도 있다. (…) 인간은 자기가 속한 유형 중 가장 낮은위치까지 가라앉을 수도 있고, 영적인 높이로 올라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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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를 만난 뒤 데이비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무미건조하고 못생긴 꽃들-민들레(타락사쿰오피시날레Taraxacum officinale)나 미나리아재비(라눙쿨루스 아크리스Ranunculus acris) 같은-이 자연의 청사진에 대한 더 좋은 실마리를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 한 종류의 큰 꽃 백 송이보다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적 관심과 구별되는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특별한 증거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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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엄마를 감싸안았다. 나 또한 몰라볼 정도인 거울 속 모습에,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 거대한 악마의 물리적 현현에, 나도 엄마와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몸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단단해지며, 감정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지금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울면 엄마는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단호한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만이아니라, 나 스스로도 진심으로 그걸 믿게 하려고.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엄마. 금방 다시 자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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