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판사가 되어 일을 하면서 뒤늦게 깨닫는 것들이 많습니다.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한다 해도 오판으로 남의 인생을 망칠 수 있는일을 하면서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살겠다는 자신감이 얼마나 헛된 망 상인지, 책에서 본 추상적인 인간과 실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

파산먄책을 이용해 남의 빚을 안 갚는다고요? 안 갚는 것이 아니라못 갚는 것입니다. 면책결정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빚 갚을 능력은 고사하고, 신불자로 취업도 안되고, 신용거래도 되지 않아 가족의 기본적인 생활도 꾸려 나가기 힘든 사람들이 파산선고와 면책을 받는 것이고, 그나마 수입이 조금이라도 있어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라도 갚아 나간 후 남은 채무를 면책받는 것이 개인회생입니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이런 사람들에 대한 채권은 액면이 10억이든 100억 이든 이미 가치가 제로나 다름없는 부실채권입니다. 어찌 보면 법원의
‘면책결정은 별 게 아닙니다. 원래 가치가 0원인 채권을 0원이라고 공
‘식 확인해 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죠.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합니다. 도전하다가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 대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진실은 어느 한쪽 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치상대주의에 기반한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엄벌주의‘와 ‘필벌주의‘는 모두 형사정책적 수단에 불과하지 목적이라고는 볼수 없습니다. 그리고 범죄 역시 인간사회의 다른 모든 위험과 마찬가지로 절멸의 대상이라기보다 관리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신뢰야말로 사회를 지켜내는 중요한 버팀목인 것입니다.

당시 국회의 형법 개정 이유는 "현행법은 유기징역의 상한을 15년으로 제한하고 있어 무기징역과 유기징역 간 형벌 효과가 지나치게 차이가 나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그에 따른 형벌을 선고하는 데제한이 있으므로, 유기징역의 상한을 상향 조정하여 행위자의 책임에따라 탄력적으로 형 선고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이 법관에게 부여한 양형의 재량에 대하여 스스로 삼가고 자의를 막기 위해 최대한 편차를 줄이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만의 하나 그 재량을 두려워하여 다른 것을 다르다고 선언하지 못하고 선례와 기준으로 도피하여도 안 될 것이 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오판으로 누군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죄는 무간지옥에서 영원히 속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늘 용서를구하는 마음으로 법정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아프고 막막하게 느꼈던 측면은역설적이게도 ‘희망‘이 사람들의 고통을 증폭하고 불나방처럼 실패의나락으로 이끌기도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희망이 무슨 죄냐고요? 희망과 꿈이 없이 어떻게 삶과 행복이 있냐고요? 맞습니다. 문제는 희망이 획일화되고 빈곤하다는 데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누구나 부모님으로부터 또는 책에서 ‘돈이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해도 정직한 사람이 훌륭하다‘는 식의 교훈을 들으며 컸지만 이제는 그런 소리를 하면 바로 ‘웃기시네‘ 라는 냉소만이 돌아오죠.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웃고 가치를 전복하려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제는 위악이 쿨한 것이고 날것의 욕망이 솔직한 시대가 돼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뭐죠?
물질적인 부가 인간의 가치까지 결정해 버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부의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가기만을 희망합니다.

아파트 평수 늘리기, 서울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한 걸음씩 이사 가기, 자동차배기량 늘리기가 한 인간의 자아 성장인 시대.
그나마 다들 조금씩이라도 사다리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고속 성장기에는 마약처럼 그 가속도에 취해 버티지만, 그 속도가 더뎌진 후에는자신의 인생 자체가 실패인 것 같은 좌절감과 분노만이 남게 됩니다.

「맞벌이의 함정이라는 책에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하버드 로스쿨의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가 씨티그룹 중역들 앞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교수는 신용카드 남발과 소비자 신용 과다가 평범한미국 중산층을 파산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런데 높은 중역이 말을 가로막고 한마디 합니다. "교수님, 바로 그 사람들이우리 그룹의 이윤 대부분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수입의 범위 내에서 근검절약하던 미덕을 촌스러운 시대착오적 행동으로 치부하게 되고, 실현 가능성 없는 미래의수입을 당겨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카드 대금 고지서는 쌓여만 가는데, 월급봉투는 그대로, 남들은 모두 손쉬운 대박으로 부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는데 자기만 낙오되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조급해 지기 시작하죠.

어느 세월에 쥐꼬리만 한 월급을 한 푼 두 푼 저축해서 부자가 되겠어, 인생 한 방인데 나도 승부를 걸어야지. 그리고는 불나방처럼 승산 없는 게임에 몸을 던집니다. 돈 빌려서 주식 투자, 그것도 데이 트레이딩, 돈 빌려서술집 개업 등 좀 더 투기적인 사업 그리고 그놈의 피라미드, 다단계까지….
유감스럽게도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전장은 게임의 규칙을 지배하는 극소수의 승자들이 독식하는 피비린내 나는 곳입니다. 감히 어리바11

제가본 세상의 이치에 따르면 누군가 나에게 권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들이 한사코 감추고 있는 일입니다.

저는 이 모든 끔찍함의 배후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가부장주의, 남성우월주의가 괴물처럼 도사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행히도 한국의 엄마들이 조장하는 면이 크고요. 아들은 항상 큰 꿈을 꿔야하고, 마누라를 휘어잡아야 하고, 사내대장부가 소소한 일에 연연해선안 되고, 사내놈이 욱하는 심정에 실수할 수도 있는 거고, 남의 집 귀한 딸을 강간해 놓고도 판사에게 탄원서를 내서 한다는 소리가 "젊은혈기에 실수한 건데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년을 용서해 주세요" 라니..
‘엄마들은 앞날이 구만리 같기는커녕 앞으로 사고 칠 게 구만리 같은
‘싹수없는 놈을 살려 본다고 빚내고 집 팔아 합의를 보기 위해 쫓아다니다. 이건 엄마들의 책임이기도 해요. 일본 부모들처럼 무슨 일이있어도 남에게 폐 끼치는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무섭게 가르쳤어야죠.

부의 분배는 불평등해도 행복은 평등할 수도 있습니다.

삶에서 다양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을 바로 지금,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주는 것이 직업 교육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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