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를 좋아하냐고 물으신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무라카미하루키를 굳이 한자로 쓰는 이유는 하도 하루키라는 이름이 유명해져서 식상해졌기 때문이랄까요. 이상한 부분에서 참신함을 추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심야서점에서는 하루키상을 춘수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춘수씨도 괜찮고요. 제 먼 친척형님이 춘순데..암튼.

 

춘수님의 글을 읽은지가 한 이십여년 되어가네요. 그러다보니 성쇠랄까 그런 것도 느껴지고 오래 같이산 애완견과 주인의 사이처럼 뭔가 서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한 마디로 그렇다라고 답하기는 어려운 뭐 그런 복잡 애매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견주인 춘수님은 저의 존재조차 모르니 애초에 이야기가 안되는군요. 암튼.

 

 그래서 제 방에는 한국에 출시된 춘수님의 책을 비롯, 한국에 미출간된 경우는 원서로 구비가 되어 있고, 소위 그에 관한 문학론 서적들도 모두 있습니다. 춘빠라는 거죠. 한가지 불만이 있다면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바로는 제이 루빈의 책 말고는 제대로된 춘수론이 없다는 거죠. 뭐랄까 개를 한번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 쓴 애견지침서 같은 느낌? 이렇게 말해도 잘 모르시겠지만.

 

 학자들은 그럴싸한 말을 쓰길 좋아하죠. 그러니까 일상적인 표현보다는 문법적으로 켄타로우스같은 형태를 취하더라도 폼나면 그만, 이라는 식의 사고 구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알아들을 수 없고 입에 담기 조차 저어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말 쓰지 않기로 약속해요.

 

 뭐 제가 여기서 춘수론을 전개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알콜중독자가 나 술없으면 못살아요 라고 결혼하기 전에(혹은 후에?) 아내에게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는 거랑 비슷한 겁니다. 벗어나기에는 이미 치명적으로 중독된 상태여서 주기적으로 읽어줘야 합니다. 저같은 사람은.

 

 춘수형의 글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듯이 - 근데, 왜 갑자기 님에서 형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나이로 보아서는 형뻘은 아닌데..-잘 읽힙니다. 것도 아주 잘. 소설 같은 거 안 읽어 하는 사람도 장편 소설 한 권을 뚝딱 읽게 만들죠. 그건 정말이지 대단하다라고 왜 있잖습니까. 태양의 서커스 같은 거 보면 공중에서 몇 바퀴 돌아서 떨어지는 데 완벽하게 착지하는 그런 묘기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랄까요. 춘수형의 글을 읽고 나면 솔직히 왠만한 작가의 딱딱한 글은 읽기가 좀 힘듭니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춘수형의 글빨에 조련당하고 나면 노예가 되는 길 밖에 안 남아요. 다행히 굶어죽지 않을 만큼 부지런히 책을 내주고 있습니다만.

 

 물론 이런 문장은 춘수형만 그런 건 아니고 그 세대의 젊다? 했던 일본 작가들이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죠. 바나나 님이나 가오리 님이나 용(무라카미 류) 형이나.. 추리 소설 쪽에 규오 형(히가시노 게이고)도 그렇죠. 그래서 소위 '빠'가 만들어집니다. 용 형은 요즘 좀 시들하지만..아 갑자기 눈물이..

 

그러고 보니 용 형의 문장은 썩 친절한 스타일은 아니네요. 초기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점점 다른 스타일로 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빠'들이 떨어져 나간 걸까요?혹시 아직 살아계신 빠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기를..안다고 뭐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생사라도 알고 싶어서..

 

가오리 누님은 대체로 여성 분들이 좋아하더군요. 제 예전 여친도 좋아했습니다. 그래요 그런 시절도 있었죠. 문장이 군더더기가 없다는 느낌이랄까.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문장은 좋아합니다. 왜 말할 때도 지루하게 군더더기 많은 사람 있잖아요. 이를테면 저 같은.. 그런 사람들의 문장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마침표가 보이지 않으면 마치 마지막 팬티를 끝내 벗지 않는 스트리퍼의 쇼를 보는 기분이랄까. 사실 스트립쇼 같은 건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상상만 해도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지 않나요?

 

 바나나님은 오늘 서점에서 새 책이 진열되어 있는 걸 봤는데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잘도 이런 얇은 책을 출판해줬구나 싶게 얇더군요. 150쪽 쯤 됐나? 뭐 짧아서 잘 팔리는 걸지도 모르죠.

 

그게 참 이상한 게. 같은 값을 냈으면 살 때는 두꺼운 쪽이 뭔가 득 본 기분인데, 막상 집에서 읽으려고 하면, 너무 두꺼워서 끝까지 못 읽게 되곤 하지 않나요? 제 방에는 그런 두꺼운 안 읽은 책이 수두룩빽빽입니다.

 

 그런 현대 일본 소설은 얄팍해서 읽을 맛이 안난다는 분도 계시겠지요. 20세기 초의 러시아 소설 처럼 주인공이 등장할 때까지 몇 백쪽이 지나가야 소설이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저랑은 좀 취향이 다른 거 겠죠. 주인공의 등장 시점은 모르겠지만, 저도 긴 소설을 읽는 그 맛은 좀 압니다. 무협 소설을 많이 읽었거든요. 두께가 좀 차이가 있지만 기본이 3,4권이고 요즘 나오는 판타지 무협들은 길이가 어마어마 하더라고요. 1부,2부로 나눠지기도 하고. 뭔가 스케일이 어마어마 함.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작가로 마르셀 푸르스트가 가장 유명하죠. 함정은 아무도 완독한 적이 없는 소설을 썼다는 건데, 쓰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고, 뭐 그 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요즘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책들을 보면, 이렇게 써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글의 효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좀 너무 과해진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냥 노동에 가까워 지는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도..

 

 애시당초.(전 이말을 참 좋아합니다만) 글을 쓰려고 한 것. 자, 지금부터 글이란 걸 써볼까 라고 마음을 먹게 되는 건 사실 상당히 내면적인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것이 연애 편지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자기 안에서 원유 기둥처럼 솟구쳐 오르는 감정의 분출을 억누룰 수 없어 종이에 혹은 모니터에 옮기는 것. 그게 글 쓰기의 원시적인 형태가 아닐지.

 

 그러므로 글을 쓰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는 요즘의 책들은 일면 공감이 되면서도, 반대쪽 지점에 있었으면..하고 바라게 되는, 글을 쓰는 내면적 동기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책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불평 비슷한 걸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되네요. 부정적인 사람은 컵의 빈부분만 본다고 하는데, 무좀 걸리지 않은 발가락이 걸린 발가락보다 많다고 해서 발에 무좀이 없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러니까 있는 걸 있다고 하는 건 딱히 불평이라고까지 비난할 필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좀이 있으니 연고를 바르든, 습한 곳을 피하든, 모냥이 안나지만 발가락 양말을 신 듯 할 일을 하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심야서점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자꾸 밤 늦게 글을 쓰고 싶어지네요. 온라인 상에서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상에서도 서점을 오픈하기 위한 저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근데 언제 그런 노력을 한다는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겸사겸사 그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회사를 가고 밤에 퇴근해서 서점을 여는 거지요. 근데 야밤에 서점에 오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네요. 대형서점들은 10시면 문을 닫더라고요. 전 일단 12시까지는 열 생각입니다. 문은 그때그때 봐서 열어야 겠지만.

 

일단은 임대료도 문제고 현실적으론 돈이 걱정이네요. 일단 공간만 확보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암튼, 종종 오픈 관련 진행상황도 블로그에 공유할 생각입니다. 관심과 응원은 안주셔도 되고 오픈하면 놀러오세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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