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여행 : 폴란드 세계 문화 여행
그레고리 알렌.막달레나 립스카 지음, 이민철 옮김 / 시그마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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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번역한지 어느덧 6개월이 되어간다. 번역을 하는 동안, 폴란드 지도와 폴란드어 표기법이 책상 옆에 항상 함께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폴란드 지도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폴란드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이 몇 달 만에 폴란드 전문가까지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지명과 지형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려면 얼굴을 자주 봐야 하는 것처럼.



번역은 두 달 가까이 걸렸다. 처음 한 달 동안 번역을 하고 나머지 한 달동안 감수를 했다. 감수라고 해도 전문가적 감수라기보다는 교정, 교열, 오역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처음 번역을 할 때는 머리가 뜨거워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이 생긴다. 분명 괜찮은 문장이라고 생각해서 썼는데 나중에 읽어보면 무슨 소리인지 긴가민가한 것들이 있다. 그럴 때는 원문을 대조하고 한국어 문장의 맥락을 고려해서 새롭게 고친다. 그런 문장은 하루쯤 삭혔다가 다시 확인한다. 애먹이는 문장은 챙겨볼 필요가 있다.



되도록 의역은 삼갔다. 의역이냐 직역이냐는 번역씬에서 항상 논란이 많은 골칫거리다. 반드시 의역을 해야만 하는 단어나 표현도 존재한다. 문장도 마찬가지. 어차피 영어와 한국어는 일대일 대응이 안된다. 영어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직역을 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의미가 통하게 문장을 만진다. 그렇게 해서 답이 안나오면 그게 내 한계라고 느낀다. 그때는 두손들고 의역을 한다.



하지만 의역을 적극적으로 하는 나라도 생각보다 많다. 미국도 좀 그런 경향이 있고 대체로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자기 나라 문화가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쪽에서는 '의역'을 선호하는 듯하다. 남들 것을 따라가기 보다 우리 식으로 바꾸어서 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그런 점에서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배우겠다는 입장이 강한 탓인지 최대한 원문의 구조와 의미를 살리려 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직역을 선호하는 이유는 꼭 그들의 문화가 우수해서는 아니다. 전반적으로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니까 그들의 것을 놓치지말고 배우자, 가 아니다. 그보다는 어차피 '번역'이라는 번거로운 작업 자체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나는 '번역'이란 '귀기울이기'라고 생각한다. 상대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의 해석을 거치지 않아야 한다. 최대한 말을 있는 그대로 담아와야 한다. 해석은 그 다음이다. 따라서 나는 역자인 나의 해석을 최소화하고 독자의 해석이 최대화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최대한 말을 있는 그대로 담아오고 해석은 독자에게 넘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독자와 역자의 역할이다.



그렇지만 의미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문장을 만들어 놓고 직역을 했으니 의미를 파악해보시오, 라고 퀴즈를 내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 화자가 한국어 문장을 읽었을 때는 일차적으로 의미가 이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직역이냐 의역이냐를 따지기 전에 번역 자체가 안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내가 스스로 말한 원칙을 모두 지켰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이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실제로 번역을 하다보면 해석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문장을 무수히 마주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이 많아지다보면 '저자'는 사라지고 '역자'만 남을까봐 불안하다. 좋은 번역은 반대로 '역자'가 사라지고 '저자'만 남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사실 역자 후기에 이 책의 이런 부분이 어땠고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역자는 책을 건네주는 사람이지 대신 읽어주는 사람은 아니다. 이건 상당히 묘한 차이이긴 하다. 가끔 나도 번역을 하다보면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이 이야기를 꼭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케이스는 꼭 끝이 좋지 않았다. 의욕이 앞서다보면 저자가 말해야 할 곳에 역자가 서서 저자보다 큰 목소리로 떠들게 되어 버린다. 역자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자기 목소리가 커지다 보니 저자의 목소리가 역자의 귀에도 들리지 않게 되어 버린다. 오역은 그럴 때 나온다.



그래서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심호흡을 하고 잠시 거리를 둔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두고 기다린다. 그래서 마음이 차분해지면 그때 번역을 한다. 저자의 작은 목소리, 말투, 손짓을 듣고 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귀 기울였을 때 만나게 되는 저자가 어쩔 수 없이 나의 해석이 가미된 저자라고 할 지라도 가장 그 사람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기대한다.



어쩌면 모든 번역가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서의 저자가 말한 그대로를 옮겨서 들려주겠다는 꿈 말이다. 그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수평을 이루어서 절대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평행선처럼 말이다. 하지만 평행선이라도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어쩌면 손을 뻗으면 손이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완벽히 하나가 되지는 못해도 그 사람의 체취와 표정이 또렷하게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갈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건 굉장히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일이 그렇듯, 번역도 정답이 없다. 이런 나의 번역관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이런저런 사람이 이런저런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모습이 아름답듯, 번역도 이런저런 번역이 존재할 때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가끔 그런 순간을 만난다. 무수한 시도 끝에 내가 뻗은 손이 저자의 손에 닿았다는 감촉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것은 착각일지언정 황홀하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내가 진심으로 들었고 정확한 말로 옮겼다는 착각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번역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착각을 더 자주 느끼기 위해 나는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문서프로그램을 연다. 그리고 누군가가 했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숨을 죽인 채 가만히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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