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에 관한 책을 읽을 때도 비슷한 문장을 보았는데, 러셀 또한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으며 사실 뭘 알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고 말을 꺼낸다.

주요한 원인은 그의 두 제자인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기억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물론 대체로 신뢰받지 못하는 쪽은 군인에다 답답한 구석이 있던 크세노폰의 서술로 ˝멍청한 자가 현명한 자의 말을 제대로 옮기지 못할 것˝이라는 일반의 편견이 크게 작용한다. 러셀이 언젠가 했던 말을 여기서도 재차 보게 되는데 ˝자신의 가장 멍청한 지지자보다 철학자 가운데 가장 호된 비판자가 자신의 철학을 전달해주길 바란다˝고 한 그 말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데에는, 진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제대로 전해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더 큰 원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좀 다른 얘기로 빠지는데 어째서 지지자는 쉽게 멍청해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말로 하면 빠고 팬심이고 덕질인데 남녀의 사랑과 비슷해보이지만 또 좀 다른 것 같다. 교제하는 남자/여자 친구가 존재해도 덕질은 이어지므로 그 둘은 분리/공존 가능한 감정의 영역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인원이 대체로 집단 내의 사회적 위계를 감지할 줄 아는 능력이 있고 그에 따른 행동 양식을 적절히 취하며 특히 위계가 높은 개체에 대한 복종과 존경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런 인간의 행동을 사회적 관계에 대해 취하는 태도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듯 하다.

덕질의 대상은 일종의 얼터에고처럼 자신만큼 혹은 그보다 더 자신을 대변하는 존재로 여겨지며 따라서 그에 대한 사회적 적대행위, 이를테면 모독은 참을 수 없는 감정적 흥분을 유발하는 듯 하다. 즉 대상과의 동일시의 정도가 빠의 깊이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놀랍게도 다양한 인간 개체에 대해 이런 동일시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심지어 인종과 같은 상징적인 개념에까지 헌신할 수 있다.

이것은 핵발전소가 터지면 재앙이 되는 것과 비슷한 사례로 인간의 이런 추상적 동일시의 능력이 대규모 협력과 연대를 가능케함과 동시에 대규모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어떤 사람들의 우려처럼 세계대전이 20세기에 발발한 데에는 인간의 폭력성이 심화된 것이 원인이라기보다는, 세계규모의 협력이 20세기에 와서 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대규모 협력은 언제나 대규모 분쟁의 씨앗을 품는다는 얘기. 대체로 단결력이 부족한 집단에서는 왕따가 없다. 다같이 한 마음으로 으쌰으쌰할 때 어 난 피곤해서 빠질게 하는 개체가 왕따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으쌰으쌰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다. 물론 그건 거대한 변화를 일구어낼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증명해왔든 그 변화에서 소외되는 이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마치 폭탄돌리기처럼 누군가는 그걸 떠안고 있어야 한다. 그게 내가 아닐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을텐데. 하지만 덜 으쌰으쌰하자고 으쌰으쌰하는 건 논리적으로도 모순일뿐더러 으쌰으쌰하고 싶은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히겠지.

그러니 비록 그것이 어줍잖게 어설프게 이도저도 아닌 모습으로 보이더라도 남은 선택지는 사랑이 충만한 까가 되거나 냉철한 빠가 되는 것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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