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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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은행잎4기 #은행잎서재 #에두아르르베 #자화상


자서전이 아닌 자화상인 이유를 알겠다. 극도로 촘촘하게 쌓아올리는, 덧대고 선을 긋고 겹치고 덮어씌우는, 집요하고 치밀한, 어느 순간 탁 풀리는 공백이 정교한 형상으로 나타났다 사라져버린다. 몇 문장을 따라해보다 포기했다.

샅샅이 훑어내는 추격? 아니, 묘사, 그래, 묘사. 그것에 기묘한 쾌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낀다. 선 하나, 점 하나, 장면 하나가 모여 쉴새없는 반추와 회상을 소묘한다. 영사기 도는 소리가 착착착,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p.8 내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p.94 나는 가끔 특별한 이유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적인다. 나는 영화를 볼 의도 없이 지면에 실린 영화 시놉시스를 읽는다. 나는 편성표를 읽지 않고, 채널을 돌려 무작위로 TV를 본다.


읽는 내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오래, 적어도 이 생각을 완전히 회상불가능한 정도로 잊기 전에 누구도 내게 말해줄 수 없게 될 과거의 일화를 말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을 꺼내보이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일화에 온갖 장식을 덕지덕지 붙여 번쩍 들어올리고 싶었다. 언젠가 베푼 보잘것없는 친절을 죽기 직전까지 떠벌리고 싶었다. 보물처럼 모아둔 칭찬을 싹싹 닦아 늘어놓고 싶었다.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p.7 10대 때, 나는 《인생 사용법》이 사는 법을, 《자살 사용법》이 죽는 법을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했다.

p.50 소름이 돋을 때면 수 세대 전 내가 짐승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나는 시력을 잃지 않을 것이고, 청력을 잃지 않을 것이며, 팬티에 오줌을 싸지 않을 것이고, 내가 누군지 잊지 않을 것이며, 그 전에 죽을 것이다.


다시 없을 행복한 순간을 말하며 웃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아직 잃지 않은 기회에의 그리움에 엉엉 울고 싶어졌다.

이 모든 것을 빼곡히 적은 노트를 탁, 소리나게 덮어버리고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숨기고 싶었다. 얼마 안 가 꺼내보고 뒤져보다 언젠가 여는 방법을 잊어 골머리를 싸맬만한 방법으로. 언젠가 정말, 꼭 필요한 때에 딱 한 번만 꺼내보겠다는 마음으로.

p.69 나는 내 내부 장기를 전혀 본 적이 없다. 단지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몸의 어떤 부분들을 보았지만, 어떤 부분들은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도 결코 본 적이 없고 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p.143 내가 언제 죽든 열다섯 살은 내 인생의 중간이다. 나는 삶 후의 삶은 있지만 죽음 후의 죽음은 없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내가 거짓 없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번뿐이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생을 덧그리고 덧덧칠하고 덧덧덧그으면, 그 끝은 무엇이 될까. 쉴새없이 생동하는 동시에 모든 순간을 한데 모은 기묘한 상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 생의 종장을 끌어다 꽝, 찍어버린 이가 집요하고 난잡하게, 파괴적이고 사랑스럽게 그러모은 삶을 보며.

예감한다. 언젠가 삶에서 나를, 나에게서 세계를 소거하려는 결단 앞에서 이 책을 반드시 떠올리고야 말리라는.

p.142 내가 나눈 가장 아름다운 대화는 청소년기에 친구의 집에서 나눈 것이었다. 우리는 친구 어머니의 술을 무작위로 섞어 만든 칵테일을 마시며 말라르메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그 큰 집의 거실에서 해가 뜰 때까지 얘기하곤 했는데, 밤새 나는 사랑과 정치와 신과 죽음에 관한 담론을 풀어냈고, 때로는 바닥을 굴러다니며 생각해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중 단 한마디도 철회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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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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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유지영 #심장듣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오래도록 이야기해왔다. 읽는 일은 곧 듣는 일과도 같다고. 잘 읽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하고, 잘 듣기 위해서는 나의 '자리'를 내어줄 필요가 있다고. 듣기는 말하기와 말하는 사람, 이 둘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한다.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 덜렁 놓인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고 물을 때조차 그는 듣는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고. 듣기와 말하기는 이토록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 너무도 혼자인 고독, 스스로를 쪼개 바라볼 수조차 없는 외로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스스로의 존재를 전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p.7 내가 뭔갈 듣기로 결정했다면 그건 내가 그걸 듣고, 느끼고, 변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된다. 우리는 결국 들은 것이 된다. 단지 내가 들은 내용뿐 아니라 듣는 태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듣기는 그렇게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p.87 "말하기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주체적인 외향적 행위인 반면, 듣기는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내향적 응대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듣기는 단순히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응대가 아니다. 듣기는 오히려 적극적인 상대에서만 가능하다. 귀는 입과 달리 늘 열려 있는 기관이지만 누군가의 말을 새겨 듣는다는 건 선택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최소한 스스로에게 타자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혹은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세계와 전능자는 듣기와 말하기 모두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들을 수 없고, 아무도 듣지 못하니 말하기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적막한 절멸이란 말인가.

여기서 물을 수 있다. 듣기에는 무엇이 요구되는가. 이는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듣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단단히 틀어쥐고 올라앉은 나의 자리를 말하는 이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말하는 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의 초대에 응해야 한다. 그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p.48 인터뷰를 하다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각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말하는 이의 말을 아주 정확히 듣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퍼즐 조각의 모서리가 빈 공간에 딱 들어맞은 것 같은 정확감, 내가 어찌저찌 흘러온 삶이 말하는 이의 삶과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고, 말하는 이의 감정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p.115 듣는 행위에는 이렇듯 비생산적인 구석이 있다.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잘 들으려 애쓰는 일은 생산적일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 듣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생산해낼 수 없고, 자랑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듣기에 성공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형태일 것이다. 매순간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듣는 일이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


동시에 '듣는 나'를 그 세계에서 소거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는 이를 이 장에 홀로 남겨두지 않아야만 그의 말을 허공에 던져버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듣고 말하기란, 누군가의, 나의 말을 잘 듣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각기 소리높여 '나'의 자리를 다투니 기다리고 바라볼 여유가 없다. 크고, 많고, 사나운 목소리에 작고, 약하고, 느린 말이 설 자리가 없다. 하물며 듣기의 자리란 얼마나 좁고, 얕고, 위태로울까.

저자가 인용한 판결문을 보며 김진영의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 힘껏 내뻗는 손이 있다면, 오직 단 한 사람이 또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홀로 남겨두지 않는 세상이, 귀 기울여 듣는 사람 하나만이라도 꼭 있으리란 믿음을 잃지 않는 세상이 그 한 사람을 그대로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p.105 내 안에서 이미 옳고 그름이 정리된 주제라면 어느 한쪽의 편에 서는 게 크게 주저되지 않는다. 가치중립이라는 명제 아래 어떤 목소리는 과대 대표되고 어떤 목소리는 과소 대표된다고 믿어서다. 과소 대표되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그들의 편에 선다. 어떤 목소리는 편파적일 때 더 정확하게 들린다.

p.116 나에게 잘 듣는 일이란 구체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쓸모를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증명할 수 없음으로 인해 무가치해지지는 않는 일. 그것은 잠시나마 '나'를 넓혀가는 일이다. 내가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일이다.


부디, 이 사납고 잔인한 세상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듣기 위해 눈을 마주치고, 이해하기 위해 어깨를 기울이고 가슴을 맞대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연약하고 짧은 삶, 한 명이 외로운 홀로가 아닐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뿐이리라.

p.198 듣는 사람이 없이는 말하는 사람이 없고, 말하는 사람이 없이는 듣는 사람이 없다. 이 문장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의 곁에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하는 사 람의 곁에는 듣는 사람이 있다. 두 역할은 어느 한쪽으로 고착될 새도 없이 수시로 바뀐다.

p.199 앞으로도 내내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설령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소망일지라도 계속 소망하고 싶다. 이렇게 겁도 없이 쓴 문장이 앞으로의 내 삶을 붙들어줄 족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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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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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비밀의들판 #마거릿주혜리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자기의 역사를 찾는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사람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의 몸으로 살아간다. 자기 정의는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비춰 보이는 나, 타인과의 관계 어딘가에 위치하는 나, 나를 둘러싼 관계의 이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나를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그 삶의 궤적을 좇는다는 것은 그 기원과 현재를 훑고, 감각하고,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

위, 아래, 좌우(?)까지 고루고루 잃어가며 살아온 결과, 가장 큰 아쉬움은 그의 삶을, 기억을, 언젠가의 시절을 말해줄 사람이 점점 줄어가다 기어코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OO은 말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알더라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언젠가 너의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너뿐인 때가 올테니 지금이라도, 틈 날 때마다 자주 말해주고 싶다고.

p.16 나는 신문 기록, 수감 중 읽은 책 목록, 공산주의자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직접 고안했던 암호 등 내 할아버지 이철하의 짧은 생애에 관한 사실들을 밝혀냈지만, 정작 내 존재 자체에 깊이 스며든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내 몸을 파고 들어 와, 손녀였고 딸이었으며 마침내 어머니가 된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내 몸에서 풀어내야 했다.

p.58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떠도는 성인기의 내 삶에서 단 하나 변함없는 것은 더 전망 있는, 더 흥미로운, 더 '나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탈출하려는 충동뿐이다. 내 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으로만 채울 수 있었다.


누군가를 영영 보내고 온 날엔 으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뭘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고, 어느 길을 따라 마침내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왔을까. 그 가슴에 무엇이 싹트고 시들어 묻히고야 말았나. 내도록 아쉽고 궁금했다. 서럽기도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지키고 쌓아온 것들,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삭이고 숨겨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그가 따돌려진, 숨이 턱에 차도록 쫓아다니게 한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누가 그의 삶을 들어주었을까. 누가 그 자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고이 닦아 전해주었을까. 그 이야기의 이름을 안다. 상처. 상처. 상처.

p.123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아기 때 자신에게 결핵을 옮긴 이가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감옥에서 옮았을 것이다. (...) 아버지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친이 남긴 유산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거나 적어도 주요인을 제공한 전염병이었던 것이다. 잠복기를 거친 다음 발병해 조직을 훼손하고, 결코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병. 아비 없이 자라난 상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처. 내게로 대물림된 그 상처.

p.198 내가 묻는다. "할머니가 지내던 집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니면 중국으로 탈출한 가장 민강에 관해서 언급한 적은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한다. “내 주위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강을 언급하는 것도 들은 적 없고. 나는 애초에 왜 일본인들이 한국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어. 그 시대는 그랬지."


저자가 추적하는 가족들의 계보는 복원해낸 조부의 삶, 침묵 속에 전달된 조모의 삶, 소외와 포기로 점점이 이어져온 모부의 삶이라는 낱알들의 모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 자기가 살아오지 않은, 알 수 없었던 시대, 파편화된 기억으로만 존재해온 일화를 한데 모아 가족과 핏줄로 이어져는 더 큰 그림이자 새로운 시작에의 첫 획이다. 여전히 미완이며, 영영 완결될 수 없는 '것'을 위한.

그리하여 종국에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가 아닌,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끝내 살아남아 귓가로 입속말로 손때 묻은 흔적들로 전해지는가. 저자가 끝내 도달한 '미완'에서 진정 자기 자리를 찾은, 어쩌면 영영 그럴 수 없게 된 과거와 현재의 의의를 묻기를 바란다. 그렇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들어봐, 너의 이전을 말해줄게. 들어봐, 나는 이 몸으로 이어져 왔으니, 우리는 어느 몸에서 갈라져 어느 '곳'을 살아가는 몸인가…

p.380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7 옛날 옛적에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전혀 편하지 않은 소녀가 있었어요. 소녀는 혼자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달랐어요. 사람들은 소녀에게 묻곤 했어요. "넌 어디 출신이야?" 소녀가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물었어요.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 여성은 여전히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하면서 비로소 집에 온 기분을 느끼게 되었어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과거를,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랄 거예요. 여성은 진심으로 바랐어요. 아이들이 그들 자신과, 어디가 되었든 자신이 살기로 선택한 곳에서 편안히 머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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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앙의 책
오다 마사쿠니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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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검은숲(시공사)

**눈을 감고 그려보라. 눈을, 감고, 그려보라. 매일이 무너지는 순간을. 다시, 눈을 감고, 그려보라. 톡,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코앞에 들이밀어지는 순간을. 어떤 두려움은 지극히 현실을 닮아 연신 눈을 깜빡이게 하지만, 어떤 공포는 현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자리를 꿰차는 꼴을 보고도 손 쓸 길이 없게 한다.**

**문득 들어선 길, 교교하니 다가오는 웃음 앞에 그저 아가리 앞의 짐승처럼 목을 늘어뜨릴 뿐이다. 압도적 공포, 뼈저린 무력감, 새하얗게 끓어오르는 쾌락, 전신의 감각을 터트릴듯 채워오르는 무엇이 두렵게 하는가? 이는 필연히 오래 전 잃어버린 것, 피식자의 감각을 일깨운다. 미쳐버린다. 잡아먹힌다. 집어삼켜진다. …아!**

p.23 〈식서〉 그렇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세상을 빙 에워싸고 붕괴를 막고 있는 것이다. 책을 먹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행위의 일환이 아닐까. 책장에서 한 권을 빼서 펼치고, 한 장을 찢어 뭉친 뒤 입에 넣는다. 그 순간에 세상의 붕괴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런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느낀다면, 제 일상의 붕괴라고 해도 좋다.

p.351 〈머리카락 재앙〉 미쳤다. 모든 것이 광기에 찬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이성마저 갈아버리는 거대한 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잡아먹을 거면 차라리 빨리 잡아먹어라. 울부짖다 지친 나는 그저 벌레처럼 쪼그라든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화, 재, 앙. 제목의 셋은 퍽 다른 꼴이되 그 뜻에서 이어지는 바가 있다. 화는 문책이자 타박이다. 재앙에는 타오르는 불과 벌 받는 자의 형상이 있다. 화와 재앙에는 주는 이와 받는 자가 있다. 행위의 결과다. 바깥과 안, 이곳과 저곳이 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화란 본질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다. 도래하는 것이며, 입혀지는 것이다. 쏟아부어진다. 집어삼킨다.**

**이 말은 곧, 치미는 '화'와 다르게, 재앙으로서의 '화'는 외부 세계, 타자의 질서를 전제함으로서 가능한 존재라는 뜻이다. 화는 스쳐 보낼 수 없다. 화가 겨냥하는 이는 그 자신의 질서에서 재앙의 힘으로 뽑히고 질서-세계의 어딘가에 처박힐 위험에 처한다. 재앙에는 의도가, 방향이, 질서가 있다. 도취되든, 순응하든, 부지불식간에 흡수당하든. 자연현상의 부작용을 재앙이 아닌 재-해, 해를 입었다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p.100 〈미미모구리〉 당신은 자신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갑갑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모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데, 100가지, 1000가지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70억의 인간이 아니라, 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눈 앞에 통째로 매달려 있는데, 감질나게 혀끝으로 핥아서 맛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부당하다고 울분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p.132 〈상색기〉 그런 멸망의 꿈과 '술렁거림', 이 양 바퀴가 사회에서 낙오하여 비탄의 나날을 보내는 그를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궁지로 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따라잡히기만을 기다리며 숨을 헐떡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일곱 이야기의 인물들은 제각기의 무력에 짓눌려있다. 권태, 부전, 흡수, 동화… 표현은 달리하나 기저에는 모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듯하다. 그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그저 저 멀리서,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야기의 일부로 밀려오는 것을 맞이할 뿐이다. 시작부터 문을 닫아걸어 등지는 탓이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먹이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간신히 미끄러져 나온 현실의 틈새 앞에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 공포는 언제고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세계를,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저항할 수 없다. 매혹당한다.**

**긴 악몽의 끝, 어디가 끝이고 현실인지도 모르는 채 눈을 뜬 바로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균열로 침범하는, 권태와 초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나른하게 되뇌어지는 순종하세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세요... 이 달콤하고 환상적인 속삭임은 과연 누구의 목소리겠느냐고. 자, 눈을 감고 그려봅시다. 좁은 길, 바로 그 문을 열고 깊이 아주 깊이 이끌리노라면…**

p.223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낳아줄게. 세상이 끝나면 새로운 세상과 함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낳아줄게. 남자 같은 건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낳을 수 있으니까… (…) 남자는 이미 모든 언어를 잊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쉼 없이 몸을 꿈틀거리며 부드러운 근원의 어둠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p.354 〈머리카락 재앙〉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뭔가 원하는 게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 마음이 찢겨 나갔다. 떠오른 게 맞나? 추락한 게 아니고? 모르겠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저 멀어져가는 의식에 몸을 내맡기고, 영혼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중얼거렸다. 인간이 이런 식으로 죽을 수도 있구나…

#화재앙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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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집 - 재일 이주 여성의 자리를 엮다
조경희 지음 / 사계절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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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사계절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거래되는 부동산-공간'으로서의 의미와 달리, 암묵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집'은 성취로 얻어지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의 승인과 압력으로 주어지는 것에 가깝다. 머물러도,살아가도, 존재해도 된다고,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할' 곳, 마땅히 그 소속이라 불려야 한다고 선언되는 이름. 그것이 바로 '집'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 물어야 한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집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나의 집이 되고, 무엇이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거주하기'를 가능하게 하는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나, 그들,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 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이 집은 어째서 이토록 낯설어-지는가. 어떻게 새로운 집을, 여기저기에, '열린 공간'으로 지을 수 있을 것인가.

p.9 〈들어가며〉 디아스포라에게 집은 종종 불안정과 갈등을 내포한 장소이며, 집 만들기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의 기반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집과 사회를 연결하면서 시민권과 소속의 조건을 협상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친밀성과 공공성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p.289 〈재일여성의 교차성 실천과 반혐오의 정동〉 재일여성들은 각자의 삶의 맥락 속에서 인종주의와 가부장제가 구축한 경계권력과 비판적으로 교섭한다. 이러한 '집 만들기'는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더불어 살아갈 새로운 관계와 삶의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신체를 구성해가는 하나의 실천이다.


국경도, 민족도,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의미도 예전과 같지 않다. 기실 그것에 실체가 있었던 적이 없던 것은 차치하더라도 실존적 붕괴나 절멸의 위협을 경험해본 적 없는 세대들로만 구성된 '국가'가 코앞에 도래한 때다. 이런 시대에, 혈통-구성적 진정성과 순수에의 회귀를 주창하는 이들은 과연 어디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인가. 그곳에 머무를 '자격'은 누구에게만, 어떻게 주어진다고 믿어지는가.

모두가 불안정하다고, 외롭고 힘들다고 한다. 모두가 증명의 압박에 시달리고, 고유한 자리에 '돌아가면' 될 일을 괜한 갈등을 초래한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 어떤 '자격'은 특정한 집단에게만, 낙인처럼 달라붙는 정체성의 '소유자'에게만 요구된다. 어떤 폭력은 누군가에게만 감수해야 할 일상으로 취급된다. 어떤 모욕은 누군가의 몸에 부여된 찬사와 단단히 얽히고 덧씌워진다.

p.192 〈헤이트스피치 이후 배외주의의 '정상화'〉 이들이 관리하려는 젊고 건강한 여성의 몸은 외국인이 아닌 자국민에게 한정된다. 즉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본인 인구의 증가이며, 이민이나 다문화 공존은 대안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 국민 공동체의 유지와 연결되고, 외국인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부자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이는 모성주의와 섹슈얼 내셔널리즘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p.284 〈재일여성의 교차성 실천과 반혐오의 정동〉 트라우마가 삶의 생명력을 잠식하는 양상은 마이너리티 여성들에게 더욱 중첩되지만, 그럴수록 경험의 고유성은 비가시화되고 외면된다. 이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거나 덮기 위해 더욱 강인한 신체적, 정동적 수행을 요구받는다. 앞에서 본 재일여성의 '씩씩함'에 대한 찬양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혐오발언은 사회적 관계의 기반 자체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


읽는 내내 맴돌았던 생각이 있다. '사회'가 소수자를 집단의 이름으로 뭉뚱그려 호명함으로써 증오의 분출구로 삼을 때, 조롱이 놀이가 되고 혐오-폭력이 어떻게든 정당화될 때, 그것은 자체만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보다 숙고를 요하고 비폭력적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시민 토론의 장을 '가로막는 가능성'이 되지 않는가. '그들'을 그대로 둔 채로 세상이 나아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던가.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재일/이주/여성이라는 세 축으로 보이는 일본과 한국 사회는 끔찍이라는 말로는 모자랄만큼 참담한 몰골로 곪아가고 있다. 지적에서 그치지 않고,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의 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서로의 집이 되어, 각자의 이름을 삼켜버리지 않는 채로 뒤섞여 어울릴 수 있을까.

p.189 〈헤이트스피치 이후 배외주의의 '정상화'〉 유해한 것을 제거하려는 사고방식이 개인의 신체와 국가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관통하여 하나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신체가 외부 물질(백신)과 화학 물질(첨가물)을 거부하듯, 국가는 외부자를 공동체의 순수성을 침해하는 존재로 보고 배제한다.

p.227 〈동시대적 정동과 번역 불가능한 신체성〉 사카이 나오키에 따르면, 통일된 언어 사이의 변환이라는 발상은 번역의 '레짐'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번역 없이는 자신의 '민족어'의 통일성을 의식할 수 없다. 즉 애초에 언어와 공동체의 동질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번역이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질성 자체가 번역을 통해 구성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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