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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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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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자기의 역사를 찾는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사람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의 몸으로 살아간다. 자기 정의는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비춰 보이는 나, 타인과의 관계 어딘가에 위치하는 나, 나를 둘러싼 관계의 이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나를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그 삶의 궤적을 좇는다는 것은 그 기원과 현재를 훑고, 감각하고,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

위, 아래, 좌우(?)까지 고루고루 잃어가며 살아온 결과, 가장 큰 아쉬움은 그의 삶을, 기억을, 언젠가의 시절을 말해줄 사람이 점점 줄어가다 기어코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OO은 말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알더라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언젠가 너의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너뿐인 때가 올테니 지금이라도, 틈 날 때마다 자주 말해주고 싶다고.

p.16 나는 신문 기록, 수감 중 읽은 책 목록, 공산주의자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직접 고안했던 암호 등 내 할아버지 이철하의 짧은 생애에 관한 사실들을 밝혀냈지만, 정작 내 존재 자체에 깊이 스며든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내 몸을 파고 들어 와, 손녀였고 딸이었으며 마침내 어머니가 된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내 몸에서 풀어내야 했다.

p.58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떠도는 성인기의 내 삶에서 단 하나 변함없는 것은 더 전망 있는, 더 흥미로운, 더 '나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탈출하려는 충동뿐이다. 내 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으로만 채울 수 있었다.


누군가를 영영 보내고 온 날엔 으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뭘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고, 어느 길을 따라 마침내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왔을까. 그 가슴에 무엇이 싹트고 시들어 묻히고야 말았나. 내도록 아쉽고 궁금했다. 서럽기도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지키고 쌓아온 것들,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삭이고 숨겨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그가 따돌려진, 숨이 턱에 차도록 쫓아다니게 한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누가 그의 삶을 들어주었을까. 누가 그 자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고이 닦아 전해주었을까. 그 이야기의 이름을 안다. 상처. 상처. 상처.

p.123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아기 때 자신에게 결핵을 옮긴 이가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감옥에서 옮았을 것이다. (...) 아버지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친이 남긴 유산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거나 적어도 주요인을 제공한 전염병이었던 것이다. 잠복기를 거친 다음 발병해 조직을 훼손하고, 결코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병. 아비 없이 자라난 상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처. 내게로 대물림된 그 상처.

p.198 내가 묻는다. "할머니가 지내던 집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니면 중국으로 탈출한 가장 민강에 관해서 언급한 적은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한다. “내 주위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강을 언급하는 것도 들은 적 없고. 나는 애초에 왜 일본인들이 한국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어. 그 시대는 그랬지."


저자가 추적하는 가족들의 계보는 복원해낸 조부의 삶, 침묵 속에 전달된 조모의 삶, 소외와 포기로 점점이 이어져온 모부의 삶이라는 낱알들의 모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 자기가 살아오지 않은, 알 수 없었던 시대, 파편화된 기억으로만 존재해온 일화를 한데 모아 가족과 핏줄로 이어져는 더 큰 그림이자 새로운 시작에의 첫 획이다. 여전히 미완이며, 영영 완결될 수 없는 '것'을 위한.

그리하여 종국에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가 아닌,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끝내 살아남아 귓가로 입속말로 손때 묻은 흔적들로 전해지는가. 저자가 끝내 도달한 '미완'에서 진정 자기 자리를 찾은, 어쩌면 영영 그럴 수 없게 된 과거와 현재의 의의를 묻기를 바란다. 그렇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들어봐, 너의 이전을 말해줄게. 들어봐, 나는 이 몸으로 이어져 왔으니, 우리는 어느 몸에서 갈라져 어느 '곳'을 살아가는 몸인가…

p.380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7 옛날 옛적에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전혀 편하지 않은 소녀가 있었어요. 소녀는 혼자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달랐어요. 사람들은 소녀에게 묻곤 했어요. "넌 어디 출신이야?" 소녀가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물었어요.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 여성은 여전히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하면서 비로소 집에 온 기분을 느끼게 되었어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과거를,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랄 거예요. 여성은 진심으로 바랐어요. 아이들이 그들 자신과, 어디가 되었든 자신이 살기로 선택한 곳에서 편안히 머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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